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학가산 광흥사.
이곳 광흥사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관여했던 학조대사가 거쳐했던 곳이다.
학조대사는 세조의 스승이었던 신미대사의 제자이다.
일주문에서 들어서면 새로 건조된 대웅전이 길손을 먼저 맞이한다.
광흥사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 원당으로 안동지방에서 가장 큰 대사찰이었으나,
1827년 화재로 소실되어 500여칸의 건물이 전소되는 불운을 맞이 했었다.
사세는 비록 기울었으나, 이 광흥사에는 한글 창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
한국전쟁 당시에도 훈민정음 목판이 남아있었으나 전쟁 당시 소실되고 만다.
학조대사가 걸었을 그 길.
이 길로는
진리의 소리를 문자로 기록하고자 했던 수행자들만 오고 간 것은 아니었다.
문화재 도굴자들도 이 길을 오고 갔다.
2011년 10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1호 법정에서는 배모씨 재판이 열렸다.
배씨는 경북 상주의 조용훈씨가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훔치고 은닉 훼손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런데 이날 증인으로 출석했던 문화재 도굴 일인자 서모씨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경북 안동의 광흥사 명부전 시왕상에서 훔쳤다고 진술했다.
이 광흥사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보존상태가 더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굴범들이 광흥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후, 광흥사 범종스님은 문화재 전문가와 함께 광흥사의 여러 복장 유물들의 확인에 나섰다. 이때 한글로 적은 많은 불교 경전 등이 발굴되었다.
『월인석보』, 『선종영가집언해』 등은 훈민정음 창제 초쇄본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다.
세종의 친서인 수사금자법화경手寫金子法華經, 영조의 친서 대병풍大屛風, 어필족자御筆簇子 등을 위시한 불경과 조선 왕실 어첩과 유물 등도 확인되었다.
세조가 법화 화엄 등 경전을 간행하여 봉안한 사실도 확인되었으며,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 3~4』,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 1, 3』, 『불설대부모은중경』 등 수많은 중요문화재들이 발견되었다.
광흥사
그리고 학조대사
훈민정음의 성지, 그러나 이곳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광흥사 응진전.
광흥사는 조선 왕실 원당으로 안동지역에서 손꼽히는 대가람이었으나, 근대시기에 들어 1946년 대웅전 화재로 다시 사세가 기울어졌고, 대웅전 대신에 응진전이 광흥사 중심 불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나한을 모시는 불전이다.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모셨으며, 그 양옆으로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상 사이마다 동자상이 있고, 입구에는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제석천상 1구가 있다.
총 4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전체 불상들을 흙으로 조성한 희귀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학조대사의 뜰.
학조대사는 1431년 출생으로 13세 나이에 신미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광흥사 산내 암자 애련사에서 출가했다.
문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 경전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신미대사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소리문자인 산스크리트어처럼 우리말을 소리문자로 전환시켜 불교 경전을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미대사의 언어학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학조대사에게로 이어졌다.
학조대사는 한글불경 간행에 그의 일생을 걸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지장경언해』를 비롯하여, 『금강경삼가해언해』의 교정 인출, 『천수경』 교정, 『증도가남명계송』 완역 등이 학조대사의 업적이다.
이외에도 학조대사의 발문이 첨부된 「오대진언五大眞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陀羅尼」, 「진언권공眞言勸供」 등도 학조대사의 번역으로 보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 중창, 봉선사 창건 등도 모두 학조대사의 원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학조대사는 해인사 팔만 대장경을 간인刊印하고 발문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는 해인사를 중수하고 대장경판당을 중창했다. 현재의 해인사가 바로 그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신다는 광흥사 범종스님의 작품.
훈민訓民은 상구보리上求菩提이 이념이요, 정음正音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실천으로 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보고 있다.
민중들이 문자를 얻지 못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없었기에 그 시절의 이야기는 권력자들의 사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의 어디에도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세종 대왕 승하 이후에 정음청 역시 유명무실해진 것을 보면 집현적 학자들이 과연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한글은 그 원래의 창제 목적처럼 불교 경전의 한글화 작업을 수행하며 이어져왔고, 마침내 민중과 함께 이 땅의 진보를 이끌어왔다.
산신각
나무 석가모니불
명부전
광흥사를 천천히 걸어본다.
애민愛民의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이들을 생각한다면, 광흥사 훈민정음 해례본은 지금이라도 아무 조건 없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밥
많이 먹었으니
이제 그만 부처님 법에 따라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할 때이다.
돌고도는 인생사
그 어디쯤에서
학조대사를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내년 가을이면 될까.
어떤 궁금함은
가끔
시간을 앞당긴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