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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군위군 삼국유사면 인각사지

by 산드륵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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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로 가는 길에 일연테마로드길이 함께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일연선사는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개경에서 이곳 인각사로 옮겨와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가까이서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일연스님은 인각사 앞 계곡 건너편에 묘를 잡고 어머니를 모셨다. 그런데 훗날 일연스님께서 원적에 드시자 탑을 조성하여 세웠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그 탑에서 광채가 나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군위 인각사.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과 선덕여왕 12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모두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인각사는 화산에 있으며, 동구에 바위벼랑이 우뚝한데 옛말에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은 충렬왕 10년 1284년부터 5년동안 이 절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이곳의 주소는 대구특별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250번지이다. 원래 이곳의 지명은 '고로면'이었으나 『삼국유사』의 고장이라 하여 '삼국유사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각사 발굴 조사 출토 부재들. 이 석재들을 비롯하여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인각사 공양구 및 공예품 등은 통일신라에서 고려까지의 유물들로서 이 시기에 이미 이 사찰이 크게 번창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연선사의 『삼국유사』 특별전이 열리는 국사전

 

 

인각사에서는 전해지는 보각국사 일연의 영정이 없어서 2001년에 새롭게 조성하여 국사전에 봉안했다고 한다. 인각사에서 정리해놓은 일연스님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일연스님은 1206년(고려 희종 2)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일연스님의 속성은 김 씨,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스님은 9살의 나이에 무량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2세에 출가해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스님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1227년 22살의 나이에 승과 최고 시험인 선불장에서 장원급제에 해당하는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했으며, 이후 비슬산 보당암으로 옮겨 수행에 전념했다.

 

몽골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남쪽의 포산, 남해, 윤산 등지에서 수행에 전념한 스님은 1261년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법을 이었다.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진작했던 스님은 왕명으로 개경 광명사에 주석했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돼 ‘원경충조(圓經沖照)’란 호를 받았다. 스님은 이듬해 군위 인각사를 중건하고 『삼국유사』 5권을 저술한 이후 1289년 7월 8일 인각사에서 세수 84세, 법랍 70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보각국사비첩

 

 

보각국사비첩

 

 

인각사의 석불좌상과 보각국사탑

 

 

인각사 석불 좌상.

삼국유사면 괴산리에서 옮겨온 불상이다. 광배와 한 돌로 구성된 석불좌상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하는 인각사 보각국사탑이다. 팔각의 탑의 중심부에 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는 탑명과 사천왕입상과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상층은 불상, 중층은 연화, 하층은 토끼·사자·원숭이 등 여러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 이 탑이 인각사 동쪽 2km 떨어진 부도 골에 있었으나 외지 사람들이 자기 조상의 묘를 안장하기 위해 1928년 서편으로 50m쯤 옮겨 놓은 것을 1978년에 인각사 경내(境內)로 다시 옮겼다고 한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비.

비는 충렬왕 21년(1295) 국사(國師)의 불제자(佛弟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다. 높이 6자, 폭 3자반, 두께 5인치인 탑신의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유필을 집자하여 만들었으며, 지금은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 알 수 있다고 한다.

 

 

산령각.

인각사 너른 도량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솔 그늘에 의지하여 홀로 있다. 한 칸 기와집에서 쉬어가니 산신령이 더더욱 너그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구도이다.

 

 

수많은 기와파편이 지금도 탑을 이루고 있는 인각사. 복원공사가 여전히 진행중이다.

 

 

미륵당 석불좌상

 

 

머리는 깨져 있고 양팔이 떨어져 나갔으며 무릎도 부서지고 허리 앞부분은 훼손되었다. 코는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꿈인 줄 알았으니 내려 놓으시게

내려놓으면 모든 꿈이 좋은 꿈

 

 

극락전

 

 

극락전의 본존불

 

 

인각사에 참배한 이 날은 폭염으로 기온이 38도를 넘나들었는데 가사장삼을 여여히 수지한 스님께서는 아랑곳없이 염불삼매에 들어있었다.

 

 

인각사 삼층석탑

 

 

이 탑은 1층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있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석탑의 규모와 층수, 지붕돌 밑면의 4단 계단식 받침, 꼭대기 장식물 등은 통일신라말기부터 고려전기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덥거나 말거나 늘 미소짓는 포대화상처럼 인각사를 참배했다.

 

 

인각사를 나오니 재현하여 놓은 보각국사비가 보인다. "겁화가 모든 것을 살라 산하가 다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라"는 글귀처럼 보각국사비는 다시 재현되었다. 옛 비가 훼손된 것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어놓은 탓에 왕희지 글씨를 탐낸 이들이 다투어 탁본을 해 간 탓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왕희지를 찾는 이도 드물고 보각국사 일연을 찾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보석도 모르면 보석이 아니다.

 

 

이 와중에 참 보석은 다만 온 적도 없고 간 적도 없다 하니 알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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