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오름에서 신심명을 새기다
안덕면 동광리 지경 당오름
우공들이 서둘러 귀가하며 자리를 내어준 당오름
그 자리에서 보라매가 부른다.
그가 오고 있다.
노을이 다가오고 있다.
우공은 귀가하고
매는 날고
산도 그림자 먼저 서둘러 떠나보내는데
나도 이젠 서서히
기우는 인생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산의 그늘을 따라간다
굼부리 너머로 산그늘이 흘러내린다.
천천히 돌아보면
굼부리 안에도
일제국주의 잔재인 진지 동굴의 흔적
청산하지 못한 역사처럼 깊은 아가리를 내민다.
전망 좋은 곳을 택한 음택
이곳의 모든 것이
동그라니 저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노을을 기다린다.
거북이를 닮았었는데 다시 보니 아무 일 없다.
모든 게 착시구나, 우리네 시선처럼.
문득 승찬선사의 신심명 몇 구절이 떠오른다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쉬고 또 쉬자
마음이 쉴 때 비로소 몸도 쉬는 것을!
오름 위에서도
세간을 떠나지 못하고 생각의 끈을 붙들고 있다면
한번쯤은 다 놓아버려라.
그것이 나이든 사람의 예절.
그것이 선고운 산에 대한 예의
그것이 색고운 산에 대한 경배
산을 이해할 때
산색도 비로소 두 눈에 들어온다.
당오름에 노을이 다가온다.
주인공은 언제나 이 자리
고운 빛으로 거듭나는 산으로의 산책
가을
그리고 그 노을 속에서
유유자적을 향유하는 것이
내가 가진 커다란 복.
가을에 감사한다.
노을에 감사한다.
노을 밑에서 막걸리라도 한 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