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佛家思議

대구 파계사

산드륵 2010. 1.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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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애장왕 5년(804)년 심지왕사가 창건한 파계사로 가는 길

길목의 '현응대사 나무'가 길손을 붙든다.

 

조선 숙종 당시 파계사에 머물던 현응  스님은

조정의 배불정책으로 인해 수행에 전념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자

한 철 동안 삭발을 하지 않고 솔잎 상투를 튼 다음

서울로 올라가 밥집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정과 인연이 닿지 않자

할 수 없이 한양을 떠나려 행장을 꾸렸다.

그날밤 청룡이 나르는 꿈을 꾼 숙종이

내관을 시켜 시정을 둘러보게 했는데

그때 내관의 눈에 띈 사람이 현응이었다.

마침내 숙종과 마주한 현응은

배불정책으로 인해 나라에 인재가 나지 않음을 한탄하며 이를 바로 잡을 것을 간언했다.

그러나 숙종은 어려운 일을 풀어주려면 어려운 일로 보답하라며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현응은 이에 파계사로 돌아와 농상 스님과 함께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기도가 끝나자 농상 스님은 숙종에게는 아들 인연이 없음을 고했다.

그러자 현응 스님이 농상 스님을 보며 "자네가 세자로 태어나게"하고 간곡히 권하였다.

그리고 얼마없어 농상 스님이 열반하고 다음해 영조가 태어났다.

 

현응 스님이 머물던 파계사의 성전암에는

현재 현응 스님의 영정과 부도, 영조가 11세 때 썼다는 편액 등이 남아 있고,

파계사 원통전 법당 불상의 복장에서는 영조의 어의가 나오기도 하였다.

 

 

팔공산 파계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말사로
파계把溪라 함은 절 주위에 흐르는 9갈래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다.
  

파계사 경내에도

'영조임금나무'가 있어서

'현응대사나무'와 함께 옛 이야기를 두런두런 속삭이는 듯 한데

범종각 바로 앞에 '영조임금 나무' 사진은 찍지 못했다. 

 

진동루(鎭洞樓)

2층 누각의 형태로 되어 있다.

 

쌀을 씻는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는데

웬지 노 저어 떠나갈 배처럼만 보인다. 

 

원통전

이곳에서 1976년 개금불사 당시

목조관음보살상에서 영조임금의 어의가 발견되었다.

1740년 9월에 작성된 발원문에는

 영조대왕이 불화 천불을 희사하고

파계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성상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고 기록되어있다.

 

높은 기단 위에 들어선 원통전 좌우로는

적묵당(寂默堂)과 설선당(說禪堂)이 들어서 있는데

현재 동안거 중인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어서

카메라 셔터를 최대한 줄였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법당으로

특히 그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일 때 원통전이라 이름한다.

꿈인 줄 모르고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위하여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나투신다는 뜻이다.

 

당간지주와 배례석

 

기영각

숙종 22년(1696) 영조가 태어나자

숙종이 현응대사의 뜻에 따라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으로 세운 곳이다. 

특히 이 기영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御筆)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어필각(御筆閣)이라고 했으나

지금 어필은 전해지지 않는다. 

 

산영각

풍경 소리를 기다리며 머물러 있었다.

 

 

 

얼어버린 풍경 소리가

뎅뎅 울리는 날

성전암 가는 길에

혹시나 다시 찾아올 수 있을런지...

그때는

소리를 보는 관세음의 지혜로

원통圓通하리라 발원을 심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