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연호사
2013. 7. 20. 전남 우수영에서 합천 연호사까지
경남 합천 황우산 대야성의 연호사
642년 대야성 싸움에서 죽은
신라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643년 와우 선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황강을 바라보며 대야성 남쪽 석벽에 의지해 서 있는 연호사
신라 김춘추는 그의 딸 소랑을 사랑하여
대야주의 속현인 고타 지역을 딸에게 식읍으로 준 후 고타소랑이라 일컫고
사위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으로 삼아서 40여개의 성과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품석은 부하 검일의 아내를 취하는 등 민심을 배반하였다.
백제 의자왕이 부여윤충 장군을 보내어 대야성을 공격할 당시
품석에게 부인을 빼앗긴 검일이 성안에 불을 질러 백제군의 진입을 도왔다.
품석은 백제장군 윤충에게 살려줄 것을 빌었으나
국토와 백성을 파는 이에게 죽음 외에는 다른 선처가 없었다.
이미 이 대야성 싸움 이전에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을 빼앗자
백제 성왕이 한강회복을 위해 관산성 전투에 나섰다가 살해당하고
그 목이 베어져 경주 북청의 계단 밑에 묻혔었는데
백제는 이 대야성 싸움에서 사로잡은 고타소랑과 품석의 유골을
사비성의 감옥 안에 묻어
성왕의 복수를 대신했다.
의자왕에 대한 김춘추의 증오는 깊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고구려 연개소문은 "세나라가 연합하여 중국의 장안을 공격해 중원 땅을 함께 다스리자"고 제의하였으나
김춘추는 이를 거부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백제 멸망이 먼저였다.
이후 648년 진덕여왕 2년에 김유신은 대야성 공격에 성공하여
고타소랑과 김품석의 유골을 찾아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훗날 문무왕이 되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은
의자왕의 아들 융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밷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이 묻은 적이 있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원래 이 대야주는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땅.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던 이곳에서
임나가라 백성들의 안위는 누가 지켰을까.
극락전 위의 삼성각.
이곳이 원래 연호사의 큰법당이 있던 자리였으나
극락전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으로 바뀌었다.
극락전의 아미타불도
원래는 합천의 성덕사에 있던 불상이었는데
조선의 훼불정책으로 성덕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그곳의 스님이 이곳으로 옮겨서 봉안한 불상이라고 한다.
소나무와 바위에 자취 감추어 천겁을 지내고
중생계에 모습 감추어 사방으로 왕래하네
인연따라 감응함은 맑은 물에 달 비치듯
허공계 순환하며 중생을 제도하네
그 많은 시름들 어디갔나.
푸르름에 젖은 涵碧樓
처마의 빗물이 황강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움을 가졌던 정자라는데
그 앞으로 산책로가 생겼다.
고려 충숙왕 8년 1321년에 지어졌고
이황, 조식, 송시열 등이 찾아
영남 제일이라 불렸던 함벽루.
남곽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니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을 뿐.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였는데
높은 바람이 흩어 버리네.
함벽루에 걸려 있는 남명 조식의 글이다.
백성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정치를 하라고 임금에게 일갈하고
자연으로 돌아왔던 조식.
'열자'와 눈빛만으로도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남곽자'를 그리워했던 걸까.
비록 정치하지 말라하고 뒤돌아섰지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 중에 조식의 제자들이 그토록 많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깊은 심정을 읽고도 남음이 있다.
바위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것.
폭염처럼 보트의 굉음이 진동하는 황강
누구는 고속을 즐기는 쾌감 때문에
누구는 백성 따위는 잊은 애증 때문에
후끈 달아오른 연호사의 황강.
그러나
그 강 앞에서
누구는 서늘한 시선으로 온누리를 바라본다.
그 서늘한 시선이
폭염을 덮고도 남음이 있어
꿋꿋하게 옛길을 따라 걷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