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륵 2013. 10. 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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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에 길을 잃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당초 길은 없었다.

 

맑은 물 속에 비친 고목에서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물속 허공의 낙엽을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없던 것들.

'나'라는 관념조차

애당초 없던 것임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평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성널오름에 오르는 중이다.

깊은 숲속에서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따라오는 벗에게

넙거리, 궤펜이, 물오름을 보여준다.

 

물장오리와 절물오름을 보여준다.

 

어후오름, 불칸디오름, 쌀손장오리, 태역장오리, 물장오리를 보여준다.

그 풍경 앞에 선 후

더이상 여기가 어디인지 묻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붉은 산딸을 보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 뿐이다. 

 

그렇게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등반 3시간여만에 도착한

성널오름 정상

 

표고 1215.2m.

한라산정을 지나 동서 방향으로 뻗는 중앙선상의 기생화산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성널오름.

남쪽과 남동쪽의 작은 봉우리와 북쪽의 주봉을 정상부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험준한 절벽과 깊고 얕은 골짜기가 산체에 담겨있다.

 

한라산정과 사라오름

 

사라오름과 성널오름 서쪽 지역은

'족은속밭'이라 불리는 초원지대였는데

지금은 식생이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 한라산의 초원길을 따라

제주시 삼의양오름 동쪽에서 서귀포시 영천동에 이르는 도로가 나 있었고

드넓은 풀밭에서는 마소를 방목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다.

인공림으로 조성한 산림녹화의 결과라 한다.

 

사라오름 맞은편을 바라보니 흙붉은오름과 돌오름.

 

하산을 준비하는 단풍

 

머지않아 온산이 붉게 물들것이다.

 

굼부리는 없지만 가파른 절벽을 따라

성널오름 둘레를 한 바퀴 돌다보면

서귀포 일대의 지귀섬, 섭섬, 문섬, 범섬도 훤히 내려다보인다.

 

눈길을 돌리면 동수악, 논고악과 마주친다.

하늘가에서 걸으면

서귀포와 제주시의 거리가 몇 걸음이 되지 않는다.

하늘의 거리와 땅의 거리가 갖는 그만큼의 차이 앞에서

웬지 마음이 서늘해져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절벽에 쪼그리고 앉으니

오늘의 산행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 다가온다.

 

다시 가파른 산정을 한 바퀴 돌고나서야

우리도 단풍처럼 하산해야 함을 깨달았다.

 

가을로 치닫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겨우살이는 아직도 푸르다.

저마다 느끼는 시간의 거리는 다르지만

마음을 열고 보면 그마저도 모두 가을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