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라는 사명으로 창건했고
조선조 연산군 4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전각을 크게 조영하고 봉은사라 개칭하게 되었다.
이후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조선 불교계는 숭유억불의 정책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는데
그 중심에 봉은사와 보우대사가 있다.
봉은사가 기억하는 한 사람.
허응당 보우대사.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39세에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어
철폐되었던 선교양종을 일으키고 승과를 다시 실시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인재를 배출해 냈다.
그러나 훈구파와 사림파가 극렬하게 대립하던 당시에
그 한 축인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때를 기다렸던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 하였으나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고 보우대사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하지만 끝내 제주목사 변협의 위해로 순교입적한 보우대사.
참으로 강렬한 한 생애였다.
부도전
허응당보우대사봉은탑
허깨비가 허깨비 세상에 와서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사 영욕이야 이제 다 겪었으니
승려의 탈을 벗고 저 푸르디푸른 하늘로 오르네
법왕루 너머 하늘이 푸르다.
임종게를 노래하던 보우대사가 바라본 그 하늘도
오늘 봉은사와 인연이 닿은 내가 바라보는 저 하늘도 푸르디푸르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괘불
봉은사 괘불
삼층석탑.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
지장전
영산전
북극보전
북극보전은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 전각이다.
영각.
개산조인 연회국사와 중흥조 보우대사
그리고 서산, 사명, 영기, 영암큰스님 등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미륵대불.
고통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귀의처.
이 미륵대불은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전북 익산에서 석재를 구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미륵불 옆으로는 미륵전
판전.
철종7년 영기스님이 <화엄경수소연의초> 등의 경판을 안치하기 위해 조성한 건물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판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북청의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과지초당에 머물던 김정희는
봉은사를 자주 찾았다.
이 글씨는 김정희가 사망하기 사흘전에 쓴 것이라고 한다.
<판전> 옆으로
<칠십일과병중작>, 즉 칠십일세의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라는 낙관이 있다.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
1983년 추사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희는
제주에서 척살당한 보우대사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흥선대원군위영세불망비.
봉은사 땅이 주변 농토와 섞여 토지가 혼동되어 있음으로 해서
여러 해 동안 소유권 송사가 있었는데
이를 흥선대원군이 해결해준 것을 기리는 비석이다.
가고 또 오고 사람도 바람도
범종각
연못에는 해수관음상.
이곳의 연못은
아미타불 극락세계에 있는 아홉개의 연못 중 하나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다시 여기 또 한 사람.
감로수를 든 해수관음상 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 간절함이 나그네에게도 전해져오는데
하물며 관세음에게야 더 말해 무엇하랴.
사바에 핀 연꽃자리
마음에 저마다 연꽃을 피운 사람들.
제 스스로 연꽃임을 알면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그 향으로 인해
스스로가 빛나고 향기로움이 가득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