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베낭골
서귀포시 대륜동 돔베낭골을 찾았다.
돔베처럼 넓은 나무들이 많아서 돔베낭골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의 풍경으로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였었는지 가늠조차 못하겠다.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한라산을 포기하고
맑은 풍경 하나 눈에 담기 위해 터벅터벅 찾아온 돔베낭골.
골이란 논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대던 곳.
지금은 이 지역 대부분이 과수원으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논농사도 제법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 호근동에는 한반도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로 알려진 하논도 있다.
오래전 제주 사람들이 다녔던 길 대신에
잘 단장된 새로운 길이 나 있다.
올레 7코스라 한다.
옛길은 사라지고
신작로는 하루가 다르게 뻗어간다.
돔베낭골로 내려선다.
범섬.
고려 최영장군의 토벌군들에게
목호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곳이다.
제주가 고려의 토벌군들을 맞아
피의 격전지가 된 것은
1270년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273년 삼별초는
고려군 6천, 몽골군 4천명으로 편성된 여몽연합군에 의해 전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격전지가 되었던 제주땅은 피로 물들었다.
바람의 흔적.
지나갈 바람이려니 했는데
그날 이후 제주에는 몽골군대 일부가 주둔하게 되고
제주는 100여년간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그들에게 제주는
쓸만한 목마장이 되고
적절한 유배지가 된다.
몽골에서 파견된 목호들이 제주로 들어온다.
다시 100여년후
명나라가 일어서고
공민왕이 배원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반발한 목호들은 제주도민들과 합세하여 목호의 난을 일으킨다.
최영장군의 토벌군 2만5천여명이 제주로 들어왔고
결국 반란군은 섬멸된다.
그 과정에서 제주는 다시 피로 물든다.
이후
제주의 지배권은 원나라에서 고려로 이양되었고
곧이어 들어선 조선은
제주에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하고
지배권을 강화한다.
"제주목사를 역임하면 3대를 먹여살릴 수 있다."
수탈의 역사가 제주의 역사임을 보여주는 조선의 유행어.
결국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더이상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육지로 도망가는 도민들이 늘었고
이에 따라 1629년에는 제주도에 출륙금지령이 내려진다.
그 출륙금지령이 해제된 것은 1823년.
남자가 태어나면 고래의 밥이라 하여 정을 주기 어려웠고
결국 끝까지 함께 할 딸을 더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제주인들.
거기에 더해지는 무거운 노역
수레바퀴에 짓눌린 삶
양수의 난
번석, 번수의 난
문행노의 난
강제검의 난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제주바다의 돌들이
그 옛 제주사람들의 심장을 닮은 듯싶다.
한라, 그리고 눈물 한 방울.
마른 버짐처럼 버석버석한 옛 이야기.
외양간에 소 한 마리라도 있으면
행복했던 그들의 이야기.
그 옛 이야기들이 사라진 올레길에
개뼈다귀 하나가 새겨져 있다.
숭숭 구멍난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펼쳐도 펼쳐도 끝이 없는
제주인들의 이야기가
바위병풍처럼 굳어있다.
문섬과 섶섬
다시 범섬.
언제 어떤 모습도 아름다운 이곳.
겨울 바람 속에서도
굳게 이겨낸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
이 땅은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