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망오름
한라산 쳇망오름.
쳇망오름으로 오르는 여러 길 가운데서
어리목 정류소에 차를 세우고 한밝교를 지나고 한라교를 지나
해발 950고지 표지석 맞은편 숲속으로 스며드는
옛길을 선택했다.
어리목에서 스틱을 잡은 후
표고 1355m 정상을 찍고
하산하여 스틱을 접을 때까지
5시간여.
조릿대가 덮은 그 길가에도
큰개별꽃은 피었다.
그렇게 정상까지
꽃 찾으러 나온듯 걸었다.
계곡을 따라 완만한듯 이어지다가
정상 부근에 이르러 아주 가파라지는 길을
1시간 30분여
쉬지 않고 걸었다.
온통 점령군같은 조릿대가 덮고 있어서
꽃을 만나면 서서 쉴 뿐.
드디어 쳇망오름 정상.
가슴이 뛴다.
꿈에 그리던 쳇망오름인데
시선은 다시 저너머
만수동산을 넘어
한라로 향한다.
구릉이 둥그렇게 둘러져 있는 모습이
쳇바퀴와 같다고 하여
체오름 혹은 쳇망오름 등으로 불렸던 곳.
950m 고지에서 오르는 길이
쳇망으로 향하는 다른 길들보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정상에 가까울수록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나뭇가지에 안긴
큰개별꽃.
바람이 실어다줬나.
그들만의 보금자리가 정겨웁다.
쳇망오름에서 바라보는 한라의 기슭
이 풍경을 만나기 위해
오래 걸었다.
돌이켜보면
월화수목금토일로 쪼개진 시간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스치며
짤막짤막 버려버린 인생이었지만
이 풍경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체하고 싶다.
그 마음을 아는듯
얼굴을 내민
제주 한라 흰그늘용담.
흰사슴똥을 닮은 꽃이라고나 할까.
쳇망오름 풀밭은
흰사슴똥꽃 천지.
즈려밟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쳇망오름과 마주한 볼래오름과 이스렁 오름.
여기서 뛰어가면 금방 닿을 듯하지만
그러다 죽는다.
삼형제오름
붉은오름 뒤로 바리메, 노꼬메
삼형제와 노루오름을 빼고
먼바다의 수평선은
파란 하늘이 지워버렸다.
민들레.
살짝 고개를 뒤집어 살펴보니
우리땅 민들레가 맞다.
쳇망오름 굼부리.
굼부리를 걸어 하늘 가장 가까이 걸어간다.
굼부리가 터진 저 너머로는
어승생과 어리목 산장.
원래 이 쳇망오름 굼부리는
둥그런 형태의 산정 화구였으나
북서쪽이 패이면서 말굽형 굼부리처럼 이루어졌다고 한다.
윗세오름에서부터
꽃소식이 내려올 길.
꽃망울들은
이제 겨우 새끼손톱만큼 맺혔지만
머지않아
한라의 꽃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겠다.
쳇망오름의 얼마남지 않은 초원.
그 풀숲에 숨은 앵초.
조릿대가
이곳의 풀밭과 풀꽃들을
모두 점령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아마 우리는 한라의 초원을 두 눈에 담은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제비의 꽃소식을 기다리며
이제 하산할 시간.
꽃이 피면 다시 오마.
오늘처럼 푸르른 날
내 마음이 더 푸르른 날
그때 다시 오마.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다음 생애라도
다시 오마.
돌아서기 어려운
하늘 바로 아래 풍경.
지키지 못할 약속은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가끔은 지키지 못할 약속일지언정
손가락을 걸어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이 풍경을 두고 돌아서는 순간
알았다.
그것이
돌아서기 어려운 고운 풍경을 두고
뒤돌아서는 방법임을
돌아서고 나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