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붉은 오름
흙붉은오름 위를 거닌다.
표고 1318m.
한라와 가장 가까운 오름.
흙붉은오름의 풍경.
한라산 사라오름 등산로를 버리고
오른편 숲으로 들어가
계곡을 왼쪽에 둔 채
서쪽으로 한 시간 가까이 숲을 뚫어라.
고인이 되신 김종철님의 말씀대로
숲을 뚫었다.
선인의 길을 따라갈 때
아무 것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어딘가에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상처로 남는다.
그렇게 흙붉은오름에 올랐다.
길이 없어서
참 힘들었기에
정말로 그 이름처럼
흙붉은지
꼭 보고 싶었다.
아니 이쯤되면 꼭 봐야했다.
흙 붉다.
정상에 드러난 붉은 송이.
화산쇄설물 송이들이
여전히 지표면에 노출된 채 남아있다.
이 오름의 정상 부근이
이렇게 붉은 송이를 벌겋게 드러낸채 남아있게 된 것은
아마도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널오름과 사라오름에서 불어오는 바람.
비를 머금은 바람이다.
세월을 다 날려버릴만한 강풍이다.
흙붉은오름의 바람은 언제나 강풍이다.
정상의 조릿대길.
시로미와 철쭉, 그리고 한라 곰취 등이
바람길 사이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정상에
조릿대는 무서운 번식력으로 올라왔다.
정상 아래의 돌탑.
바람이 무너뜨리면
누군가가 쌓고
또 무너지면 또 쌓는다.
신제주 지역으로도
바람이 분다.
물장오리에서 돌오름과 성널을 거쳐
바람이 올라온다.
바람의 계곡
서서히
비구름이 몰려오는 한라
왕관릉과 삼각봉
한라의 바람에
철쭉도
꽃잎을 다 잃었다.
왕관릉
그러나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니
한라의 풍경도 만난다.
서서히 구름모자를 벗는 한라의 정상.
흙붉은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의 정상 모습.
지봉유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라산에는 사슴이 많다.
여름밤이면 사슴들은 시냇가에 나와서 물은 마신다.
사냥꾼이 활을 가지고 시냇가에 숨어 있노라니
사슴떼가 오는데 몇 백 몇 천 마리 속에
한 마리 사슴이 훤칠하고 빛이 흰데
그 등 위에는 머리털이 하얀 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다.
사냥꾼은 놀라고 괴상히 여겨
감히 그 사슴을 범하지 못하고 뒤에 떨어진 사슴 하나를 쏘아 죽였다.
조금 있더니 사슴에 탔던 이가
사슴의 수를 조사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은 임자순의 <記 聞>에 나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인지
아닌지
와봤으면 알았을 걸.
손에서 책을 놓고
직접 이 길을 걸어와야
한라의 산신도 만난다.
그 광활한 숲 속에서
올라올 때 만났던 꽃을
내려가며 다시 만났을 때
마치 한라산신을 만난 듯했다.
이제 그만 산신과는 작별하고
하산해야 할 때.
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온다.
눈앞으로
구름들이 마구 스쳐지난다.
한라산신의 축복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풍경 속에 있다.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준
풍경 속의 모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