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미오름
산들바람에 쓸쓸함이 섞여있는
그런 가을 비치미를 좋아했는데
여름 비치미는 어떤 모습일까.
시침은 아침 6시.
그러나 벌써 덥다.
비치미로 향하는 길.
능선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성읍 방향의 비치미 길과 달리
이 길로 걸으면
비치미의 정상으로 바로 올라서게 된다.
물에 잠긴 하늘.
물에 잠긴 구름.
그 모두가 제빛을 잃지 않는 건
물이 맑기 때문.
이른바 진여묘성이다.
비치미 가는 길에
먼저 얼굴을 내민
개오름과 영주산.
말테우리 집안의 후손도 아닌데
오름에 오르면
마음이 시리다.
저 능선에 오래전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다.
모지오름, 따라비오름.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따라비오름의 아침 초록.
이마에 손을 댔을 때
저릿하게 느껴지는 아침 두통처럼
덜 깨어있다.
한라산 정상에서 성불오름까지
한 길로 이어진
오름의 길을 본다.
동거미, 백약이, 좌보미를 본다.
따라비 그리고 대록산을 본다.
이곳의 아침은 이렇다.
한라의 정상에서
봉화가 오르듯 구름이 오르면
비로소
산아래 오름들이 깨어난다.
한라에서 성불오름까지 이어진 아침.
산정의 아침은
이렇듯 구름 한 점
꽃 한 점.
가까운 선흘 나무카페에 전화를 걸어
커피를 주문하면
그 착하디 착한
주인장 내외와 용용이가 커피를 배달해줄까.
커피 생각은 접고
민오름을 바라보니
민오름 뒤 새미와 밧돌오름은 숨어서 보이지 않고
그 뒤의 체오름만 당당하다.
부대, 부소와 거문오름
높은오름에서 영주산까지
돌리미 뒤로
높은오름, 다랑쉬, 동거미, 백약이, 좌보미
당오름과 둔지오름
그리고 아부오름, 돝오름과 높은 오름
이 모든 것을
한눈에 품을 수 있기에
비치미를
늘
그리워하게 되는 듯하다.
늘 그립던 비치미를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이제사 꽃들이 깨어났다.
잠꾸러기.
개오름 가는 길도
이슬을 떨쳐내고 꽃들이 고개를 든다.
구름 솟고
꽃들이 꽃잎을 펴면
비로소
산의 아침인가.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멀리서 늘
바라봐주는 오름들이 있어서
이곳에 묻힌 부종휴 선생님도
무척 행복하겠다.
깨어난 꽃들을 따라 걷는다.
모지오름과 따라비
그리고
하늘빛을 닮은
한라.
온통 외래종 서양민들레와 엉겅퀴만 피어있고
작년의 다른 야생화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잠깐 잊기로 한다.
잠깐 고개를 들기로 한다.
햇살 눈부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기로 한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야할만큼
현실의 무게는 늘 복잡하고 고단하지만
잠깐 고개를 들기로 한다.
그러다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맛난 산딸기를 만난다.
세 방울을 먹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옛맛을 잠깐 기억해낸다.
업.
삶의 다른 이름.
그러고 보면 삶이란
혹은 운명이란
그저 몇가지 조합된 기억.
그 조합을 해체해 버리고
오늘은 그저 단순히
혹은 자유롭게
그렇게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