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륵 2023. 7. 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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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리 금성리를 흐르는 정자천

한라산 기슭에서 발원한 두 개의 물줄기가 이곳 금성포구에서 만난다

금성포구의 옛이름은 곽지포

세월에 따라 이름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곽지리와 금성리를 적시며 흐르는 정자천.

정자천 하구는 과거에는 곽지포라 불리었으나 현재는 금성포구라 불린다. 곽지리와 금성리는 원래 한 마을이었으나 1894년 좌시우에 의해 분리운동을 전개한 바 성취되어 금성리(錦城里)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성리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금성포구의 비단교.

 

 

제주도청 마을약사에 의하면

금성리는 마한시대 이전부터 육지와 중국을 왕래하는 선박들이 하구를 이용하게 됨으로 정자천(亭子川) 하구를 중심으로 모슬개촌을 이루어 거주하여 오던 중 삼별초난(三別抄亂)이 발생하여 1273년 삼벌초군을 평정한 원군이 탐라국을 직할령으로 예속시켜 통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1277년 동서아막을 설치하였으나 왜구의 침공이 두려워 전략적 요충지며 기병조련이 용역하고, 馬반출 및 중국 왕래가 용이한 장소 즉 郭支(곽지)로부터 명월 서부를 연결하는 어간이므로 수백동의 와가·옥사·창고·병영지(寺) 등을 건축하고 1374年까지 행정권을 장악하여 고려에 환속시키지 않았다.

몽고족(牧胡)의 행패에 시달린 탐라인이 고려조정에 상언한 즉 1374년 8월 9일 최영(崔塋) 장군이 2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來島(내도)하여 탐라를 지배하여 오던 必思宵古(필사소고)를 사살하고 호도해상에서 석질리(石迭里)와 觀音保(관음보) 등 장병을 생포 평정하였다. 그러나 금성리 일대는 몽고속 장수 석질리 본거지였는데 초토화되었다. 다시 1401년에 이르러 곽지, 모슬촌, 귀덕리 등지에 왜구가 침공하면서 금성리는 폐촌되었다.

 

 

정자천 하구의 이름은 모슬개.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모슬포, 모슬개 등으로 불렸다.

 

 

지금은 하천의 범람으로 토사가 유입되어 옛 포구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곳.

 

 

바닷길은 막혔어도 물길은 여전하다.

 

 

바다를 잊지 않고 찾아온 물길이 길을 잃는 포구.

 

 

이제 더이상 정박할 배들이 찾지 않는 포구에 돛을 내리는 건 바람뿐.

 

 

물길이 다시 바다로 흘러드는 꿈은 나만의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