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영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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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산으로 오른다. "시인이 일생에 시 다섯편 남길 수 있다면 족하지 않냐"고 했다던 서정춘 시인이 문득 생각난다. 요즘도 같은 생각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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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展.....서정춘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 주시니 방긋 웃으시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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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파르티잔.....서정춘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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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편.....서정춘
여기서부터, 멀-다
칸 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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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보며.....서정춘
그렇다, 하늘은 늘 푸른 폐허였고
나는 하늘 아래 밑줄만 그읏고 살았다
마치, 누구의 가난만은
하늘과 평등했음을 기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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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야 다들 좋아하더라. 그런 시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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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꽃 3.....나태주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피워 봐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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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나태주
밤을 새워 누군가 기다리셨군요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만
새하얀 사람이 되고 말았군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을 땐
당신에겐 손도 없고
팔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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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면 어때
그냥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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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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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간.....이생진
소나무가 바람을 막았다
부처님이 흐뭇해하신다
눈 내리는 겨울 밤
스님 방은 따뜻한데
부처님 방은 썰렁하다
그래도
부처님은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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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쓴 시.....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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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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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정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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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下流.....서정춘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먼
여울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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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와 같은 겨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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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마저 찬란하니 나는 돌아갈 길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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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