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둘레길(봉개동 왕벚나무자생지-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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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둘레길 중에서 미개방 구역인 봉개동왕벚나무길에서 관음사까지의 구간을 답사했다. 이 구간은 미개방 구역으로 정확한 개방 일시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길은 제주 4.3 당시 '산왕山王'이라 불렸던 이세진李世震스님이 관음사로 가기 위해 걸었던 길로 '세진世震의 길, 세상을 향한 천둥소리'를 공론화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공개를 결정했다.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으며 '이세진 스님의 길'을 세상에 드러낼 예정이다. '세진스님의 길 1코스'는 물장오리 구역으로 공개불가하여 자료를 첨부하지 못한다. 봉개동왕벚나무길에서 관음사까지의 구간은 '세진스님의 길 2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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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진 스님은 1910년 8월 25일 제주도 한림읍 저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내장사 백학명 스님 밑으로 들어가 공부하다가 기본 교육과정 이수를 위해 잠시 귀향하여, 1924년 제주공립 보통학교 졸업, 1926년 한경면 저지리 한문사숙에서 사서 학습 등의 과정을 거쳤다. 이후 이세진 스님은 1927년 11월 25일 내장사 백학명 스님의 상좌인 한고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29년 백학명 스님이 입적하자 근대불교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박한영 스님이 이끄는 대원강원으로 옮겨 사교과, 대교과, 수의과를 이수하였다. 1934년 6월에는 내장사와 백양사를 오가며 대선법계와 중덕법계를 받았으며, 이때 평생의 벗이 되어준 이일선 스님을 만나 지란지교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1937년 3월에는 표훈사 중향강원 강주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이일선 스님이 제주에 들어가 개혁 운동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세진 스님도 귀향을 결심한다. 그리고 1939년 2월에 이르러 한림 포교당 포교사로 부임 받으며 이일선 스님의 뒤를 이어 제주 불교 개혁의 선두에 서게 된다. 1939년 4월 제주 불교 연맹 발족과 함께, 이세진 스님의 개혁운동은 시작되었다.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 활동했던 이세진 스님은 관음사 시내 포교당 대각사에서 승가 교육을 실시하여 50여 명의 학인을 배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에 나섰으나, 1941년에 제주 전 지역이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전시체제화 되면서 그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이에 이세진 스님은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생력을 갖춘 강원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세진 스님은 1942년 제주시 도평리에 법당과 객실 한 채를 지어 서관음사라 명명하고 학인배출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 사찰 경내에 기와공장을 짓고 생산과 판매 등의 운영에 나섰다. 생산된 기와를 오일장에 갖고나가서 팔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정세는 해방과 미군정, 이승만정권으로 이어지며 급변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전국 승려대회가 열리고 그 영향으로 1945년 11월 30일에는 제주도 불교청년단 결성대회, 12월 2~3일에는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가 열렸다. 이세진 스님은 관음사의 오이화 스님, 이일선 스님, 원문상 스님 등과 함께 개혁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개혁승려들은 서관음사에 모여서 강원설치와 인재양성 등을 결의하였고, 제주교구를 설립하는 등 제주불교의 기본 틀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였다.
하지만 4.3이 닥쳤다. 개혁승려들은 대부분 군경의 총칼에 희생되었다. 이세진 스님 역시 4.3을 빗겨가지 못했다.
1948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군중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제주도민들은 총궐기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제주도민을 청소하기 위한 탄압에 나섰다. 군병력과 응원경찰력을 투입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살육과 폭력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이세진 스님 역시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이세진스님이 올라갔던 곳은 물장오리 인근이다. 물장오리와 태역장우리, 쌀손장오리 삼각점에 위치한 훈련장에는 산으로 피난을 온 가족 단위의 민간인들이 무장대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세진스님은 그곳에서 무장대장 이승진과 함께 민중을 이끌었으며, 관음사에 도당사령부를 이동할 당시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증언에 의하면 무장대원들은 스님을 언제나 예로써 대했다고 한다. 서관음사가 있던 도평리 주민들은 이세진 스님을 '산왕山王'이라 불렀다.
그러나 스님은 수장되었다. 토벌대에 붙잡혀서 건입동 주정공장에 갖혀 고문을 당하다가 잠시 풀려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또다시 검거되어 1949년 산지포에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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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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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가 걸어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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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걸어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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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모든 길은 결국 호숫가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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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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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을 따라걷는 사람들도 결국 산 속 맑은 호수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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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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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물장오리 토벌에 나섰던 ***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물장오리 토벌을 갔을 때는 1949년 초가을 경이었어. 우리는 교래리에 토벌대 막사를 치고 주둔했었어. 아마 2연대 3대대로 기억돼. 그때 토벌대에는 군경, 민간인(의용대)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거기에서 자면서 토벌을 다녔어. 한번은 물장오리 근처로 토벌을 갔었는데 물장오리 채 가기 전에 냇가 부근에서 노루새끼들 모양으로 사람들이 후다닥 튀는 거라. 우리는 재빨리 추적했는데 여자만 19명 잡았어. 갓난아기도 있었어. 집은 ᄄᆞᆼ을 파서 돌을 ᄊᆞᇂ고 어욱으로 덮혀 있었는데 근처를 지나면서도 모르겠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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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공포가 2025년 게엄선포로 재생되었다. 살육을 위한 게엄이 장난이었다는 언어유희의 2025년. 해원의 기나긴 세월이 차가운 눈에 덮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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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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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위치가 3소장 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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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장에 관한 참고자료를 찾아보았다.[제주매일(http://www.jejumaeil.net]
동쪽으로는 제주시 폐기물처리장 입구 약 150m 지점에 건영농축목장의 경계로 사용하고 있는 삼나무 옆에 있는 돌담이 동·서쪽 1㎞정도의 원형 그대로 있는 하잣이며 이곳에 바령팟(1,500평)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목지동산에는 목자들이 마(馬)를 감시하던 곳(초소)에 돌로 쌓은 1.5평(높이 120cm)의 원형(圓形)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제주대학 입구 동쪽과 오라골프장 한천으로 이어진 하잣은 흔적만 남아있다. 3소장 안에는 삼미목장과 제주산업정보대학 그리고 삼의양오름과 남쪽의 관음사 사이에 중잣이 있고 뒷편(남쪽)에 홀담으로 된 상잣이 한천상류로 이어지는 곳으로 기다란 목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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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2시간여를 걸으니 관음사 갈래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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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의 끝에 나무아미타불
_()_
인생에
더 무엇이 있으랴
시린 손 함께 잡고 걸어서 여기까지 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