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

경기도 안성시 칠현산 칠장사

칠현산 기슭에 새의 둥지처럼 자리잡은 칠장사의 고즈넉함은 세상에 난무한 모든 편견을 깨고도 남음이 있다.

금북정맥의 혈에 자리한 칠장사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1014년 현종 5년 혜소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칠현산이나 칠장사라는 명칭은 바로 그 혜소국사가 이 사찰을 중창할 당시에 이 지역을 주름잡고 다니던 7명의 악인을 부처님 법에 교화시켜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1383년 고려 우왕 9년에는 충주 개천사의 고려조 역대실록이 왜구의 변란을 피해 이곳에 옮겨지기도 했다. 1389년 고려 공양왕 1년에는 왜구의 노략질로 폐찰되었다가 1506년 조선 중종 1년에 중건되었다. 이후에 이 칠장사가 사세를 크게 떨치게 된 것은 1623년 조선 인종 1년에 인목대비가 이곳을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으면서이다. 칠장사에는 칠장사 대웅전, 오불회괘불탱, 혜소국사비, 철당간 등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궁예의 활터,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한 꺽정불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에게 과거시험 문제를 보여준 나한전 등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천왕문

칠장사 천왕문에는 좌우로 각 2구씩 모두 4구의 사천왕상이 봉안 되어 있다. 서방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북방다문천왕은 창을 들고 있다.

칠장사 사천왕들은 1726년 영조 2년에 조성된 것이다. 머리에는 꽃이 달린 관을 쓰고 몸에는 혼갑 昏甲·흉갑胸甲 등의 무늬가 있는 갑옷을 입고 있다. 동방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증장천왕은 칼을 들고 있다.

부드러운 칠장사의 겨울 풍경. 부드럽게 내려 쌓인 눈송이에 단단한 나뭇가지가 꺾이듯이 부드러운 것은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아집을 꺾는다.

칠장사 삼층석탑.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옛 사지에 있던 것을 2005년 이전하였다. 고려 전기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형문화재 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뒤로 보이는 칠장사 대웅전.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790년 정조 14년 중창되고 1828년 순조 28년 이건된 건물이다. 경기도권의 조선 후기 사찰 중심 불전의 건축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이며, 지붕은 맞배지붕, 공포는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다포형식이다.

칠장사 대웅전 내부

천정은 우물 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다. 천장 우물반자 청판에 일부 남아 있는 화초모양을 도드라지게 그린 금색의 고분단청은 호분 등으로 여러 번 칠해 도드라지게 한 다음 채색한 것이다.

칠장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고 좌우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칠장사목조석가모니불. 16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손은 아미타수인,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약사여래불로 추정된다. 빨간 환단약을 마주하기만 해도 중생의 오래된 병이 모두 낫기를 기원한다.

대웅전 옆으로 조성되어 있는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들은 경기도 죽산 봉업사지에서 이운되어 온 것이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다. 광배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의 특징이라고 한다.

수인이 독특하다.

광배의 화불도 선명하다.

보살좌상 역시 독특한 수인을 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붓다의 시그널 앞에서 잠시 멈춘다.

칠장사 원통전. 1725년 조성된 전각이다. 정면에 사용된 4개의 초석은 고려시대 초석을 재사용한 것이다.원통전 정면의 축대와 계단 역시 고려시대 석재를 재사용했다. 이 전각은 고려시대 석재를 재사용하면서도 통일감있게 조성된 전각으로 그 의미가 높다.

칠장사 원통전은 안성 청룡사 관음전과 더불어 경기 지역 관음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극히 드믄 사례로 평가된다고 한다. 원통전 내부는 중앙에 우물천장을 두고 앞뒤로 경사지게 빗천장을 조성하였다. 배면 좌우 빗천장은 1칸을 8구역으로 나누어 여러 선인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명부전

1706년 조성되었으며 목조지장삼존상과 21구의 시왕상들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모든 영가의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국사전. 칠장사에 인연을 둔 여러 선지식들이 모셔져 있는 전각이다.

어사 박문수 합격다리.

충청도 천안 박문수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다가 이곳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되었다. 박문수는 나한전에 불공을 올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한님이 과거시험의 시제를 알려주며 총 8줄의 답안 중에서 7줄을 가르쳐준 것이다. 다음날 박문수는 길을 떠나면서도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지막 시 한 구절만을 생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과거장에 도착하여 발표된 시제를 보니 아니, 이럴 수가! 그 시제는 바로 칠장사 나한님께서 일러주신 시였다.

박문수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낙조(落照)’
落照吐紅掛碍山
寒鵝尺盡白雲間
問津行客鞭應急
尋寺歸僧杖不閑
放牧園中牛帶影
望夫臺上妾低鬟
蒼然古木溪南路
短髮草童弄笛還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찬하늘 갈가마귀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남편을기다려 높은 누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나한전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박문수에게 시귀를 알려주셨다는 나한님이 계신 나한전이다. 내부 구조 역시 범상치 않다.

상단에는 석가모니불

그리고 그 아래로 나한님이 좌정하고 계시다. 이 나한님을 만나기 위해 입시철에는 이곳이 많이 붐빈다고 한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이 비에는 칠장사 중창주인 혜소국사가 “개성 광제사 문 앞에 솥을 걸어놓고 밥 짓고 국 끓여 굶주린 이들을 대접하는 데에 일천의 곳간을 비워도 좋다고 했고, 백 섬의 곡식을 베풀지라도 아끼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칠장사 혜소국사비는 혜소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전중승, 민상제 선생이 구양순체로 썼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다.

칠장사 극락전. 이곳 극락전은 임꺽정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임꺽정의 스승은 칠장사 병해대사였다. 병해대사는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살피던 살아있는 부처였다. 임꺽정은 그 병해대사를 하늘처럼 모셨는데, 1560년 스승이 입적하자 꺽정불을 만들어 칠장사 극락전에 모셨다. 오직 백성들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던 병해대사 꺽정불에 불공을 올리면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여 이 극락전을 찾는 이들이 늘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꺽정불은 어디에 있는가.

극락전의 아미타불과 좌우협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리고 본존불 뒤로는 지장보살

닫집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극락전에 계셨던 지장보살도 함께 모셔져 있다. 민초들과 함께 했던 병해대사처럼, 혹은 임꺽정처럼, 한 벌뿐인 옷은 비록 낡고 헐었지만 그 눈매는 여전히 활활 살아있다.

칠장사 혜소선사가 그러했고, 병해대사가 그러했고, 꺽정불이 그러했으며, 임꺽정 또한 그러했듯이 이곳의 현자들은 이 땅의 가장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간 박문수까지도 애민정신으로 백성의 어려움을 푸는 어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곳에서 일곱 도적이 무릎 꿇은 것도 혜소선사의 자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비의 화신들이 머물다간 이곳의 큰 바람이 이제는 2025년의 큰도적들을 잡고 파사현정의 깃발을 드날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