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연동 검은오름

산드륵 2025. 5. 2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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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연동 검은오름. 이 오름은 오라동과의 접경인 연동 산110-1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검은오름'의 '검은'이라는 단어는 신성한 대상을 표현하는 관형어로 이해되고 있는데, 제주의 옛어른들은 알 수 없는 '두려운' 대상을 '검은 거'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제주의 여러 곳에 '검은오름'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오름들이 분포하고 있고, 그 명칭에 대하여서도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어쩌면 제주의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 '민오름'처럼 '검은오름'의 뜻도 단순하게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검은오름 가는 길

 

 

연동 검은오름의 표고는 438.7m, 비고는 129m, 남사면은 가파르고 동서로는 등성마루가 길다. 선인탄금형仙人彈琴形이라는 명당지로 이름이 났고, 김녕 사굴 전설의 서련 판관 후손인 서홍순의 묘, 효성이 지극했던 이필완의 선묘, 탐라사절의 한 사람인 양유성의 묘 등이 이 검은오름에 안겨있다.

 

 

삼나무숲길

 

 

여름 식생들이 발길따라 돋아난다

 

 

나무의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해발고도를 짐작하며 걷는 숲길

 

 

갈림길. 왼쪽길은 가파르고 오른쪽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어느쪽으로 가든 약 한 시간 정도면 천천히 올랐다가 내려갈 수 있다.

 

 

초록이 짙으면 검다. 생각도 짙으면 검다.

 

 

검은 생각도 햇살 아래로 나서면 밝고 환한 본성을 드러낸다

 

 

검은오름 굼부리 속의 이필완 선묘.

 

 

이필완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입도조 이희관의 6세손이다. 경주이씨 상서공파는 이필완 이후부터 명문집안으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이필완은 임금으로부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라는 교지를 받았으며, 아버지와 조부는 물론 그 증조까지 벼슬이 추증되었다. 이필완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이필완'은 나이 90세가 되었으므로 이제 막 가자加資하였으니, 첨추僉樞에 단부單付하라."는 기록도 있다.

 

 

『오름나그네』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 이필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필완은 한림읍 대림리 사람으로(1677-1795) 유복자로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드는 하년 장성하자 아버지를 위하여 추복하고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묘소에 제사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1776) 석달을 소식하며 상복을 벗지 않아 노구를 이끌고 상경, 한여름의 능역부토에 충성을 다했으며 양로연에 초대되었을 때는 제몫의 음식을 먹지 않고 가지고 돌아와서 선묘에 올렸다고 한다. 유복자였던 이필완은 아버지 이세훈의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올렸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지냈으며, 어머니가 생전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죽은 후에도 쇠고기를 쓰지 않고 닭과 꿩고기를 써서 제사를 올렸다. 하루는 제사에 쓸 꿩을 구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마침 매가 꿩을 잡아 무덤 앞에 떨어뜨려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가선대부이공, 정부인고씨지묘

 

 

문인석

 

 

이필완은 정조 5년 1781년 제주순무시재어사 박천형에 의해 효자로 포양되었고, 철종 13년 1862년 제주목사 신종익에 의해 정려가 내려졌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상동의 입구에는 ‘忠孝嘉善大夫 李公弼完之閭’라는 이필완의 충효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운 것이 어디 지나간 것뿐이랴

 

 

걷는 길위의 모든 것이 그리웁고 그리운 것

 

 

찔레꽃

 

 

가막살나무

 

 

산탈

 

 

기억은 뒤로 밀리고 발걸음은 저 산 꼭대기를 향해 나아간다.

 

 

검은오름 정상

 

 

저 숲 건너 노리손이오름, 어승생악

 

 

어승생악

 

 

한라

 

 

남조순, 민오름

 

 

사라, 별도, 원당봉

 

 

거친오름, 삼의악, 견월악

 

 

솔숲 사이로 부는 5월의 바람이 새롭다. 새로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봄의 막바지에서 '스스로 그러한' '자自 연然'의 싱그러움에 마음을 빼앗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