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복 서자복
폐사지로 여행을 떠나보셨어요?특별한 이유없이 저는 폐사지에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여기저기 남아있는 기단석들... 무너진 돌탑들....잡초만 무성한 그곳에서 그것들을 쓸어보고 있노라면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져 왔었습니다.그런데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아마도 그것은폐사지로 가는 길엔 어김없이 비가 내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주에도 100여군데의 폐사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그날도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제주시 용담동 한두기 마을의 용화사입니다.이 일대에는 원래 고대 고려사찰 해륜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그 시절엔 절경을 뽐내는 용연의 풍취와 어우러져 있었을 것이 분명한 해륜사는그러나 지금은 사진처럼 주택가의 좁은 골목 안에겨우 비집고 들어서 있습니다. 제주의 폐사지로 가는 길은 저 골목길처럼 비좁기만 했습니다.
해륜사지에 들어선 용화사의 모습입니다.이곳이 훼철된 것은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서라고 전해집니다.그의 장계 행장(1733년)에는 도민 700여명이 건포에 모였는데 어찌 감히 공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냐면서 신당과 두 곳의 사찰을 불사르고 불상을 바다에 던졌으며,목사로 부임하여 불과 6개월여 만에 제주의 신당 129개소를 불태우고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이 옛 해륜사터에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미륵부처님이 계시는데요.복신미륵, 돌미륵, 미륵부처 등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제주 현무암으로 조성되어 있고 토속화된 상호를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형상의 훼철이후제주불교는 제주 민간 신앙과 어우러져오히려 민간에 더 깊이 뿌리박게 되는데요.이 미륵부처님은 풍어, 득남 등을 기원하는 제주 백성들의 귀의처가 되었답니다.득남을 기원하는 남근석도미륵부처님 옆에 보이네요.
이 옛 해륜사지에 들어선 현재의 용화사 대웅전 현판입니다.현재의 용화사가 이 자리에 들어선 것은1939년 관음사 오이화 스님의 원력에 의해서랍니다.녹슨 못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현판의 모습이오롯이 일어서지 못한 폐사지의 아슬아슬한 풍경같았습니다.
대웅전 현판 좌우로는 이 익살스러운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는데요.지식이 짧아서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 주시겠어요^^
오른쪽에 조각되어 있는 모습입니다.조금 다른 표정입니다.
제주의 폐사지는 지금껏 찾아다니던 다른 지역 폐사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무어라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해륜사의 서자복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건입동 만수사의 동자복을 만나러 가던 도중산지천에 들렀습니다.물빛만 무심하였습니다.
서자복보다 동자복을 만나러 가는 길은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멀리 보이는 건물이 건입동 노동의원 건물입니다.동자복은 사진에 보이는 회색의 개인주택 건물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도 잘 알지 못하더군요.
이 개인주택 바로 뒤뜰에 동자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살금살금 걸어들어갔죠.제주도내의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불상이라던데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만 발길에 채였습니다.
만수사지 동자복입니다.인자해 보이는 상호가 편안한데좁은 뜰에서 미륵상의 전체 모습을 찍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좁디좁은 뜰안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미륵부처님은 사진찍기마저 외면하는 듯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서 자란 동백마저 누렇게 시들어 있었습니다. 저 미륵과 함께 했던 제주 백성의 삶이곧 제주 역사일텐데그리고 우리도 그 역사의 그물코의 하나일텐데참 무심도 하지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폐사지로 가는 길은 비가 멈춘 후더욱 쓸쓸하였습니다.
그것은 과연 그동안
비가 막아주었던쓸쓸함이한꺼번에 들어닥친 때문만이었을까요? 산책 길에서 만난 님의 생각은어떻게 다른지듣고 싶습니다. .....
So Deep Is The Night - Lesley Garre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