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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사 원효암

by 산드륵 2023.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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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오어汝屎吾魚

 

 

오늘 낮에 혜공이 원효에게 말했다.

너것은 똥이고 내 것은 물고기이다.

 

 

원효는 이곳 오어사 남쪽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여러 경서를 저술하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오어사의 혜공에게 가서 주저함없이 묻기도 했다.

 

 

그 혜공이 오늘 말했다.

너 것은 똥이고 내 것은 물고기다.

 

 

똑같은 대상을 똥으로 보는 이와 물고기로 보는 이. 이때 원효가 깨달았을까. 아니면 당나라로 유학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했던 무덤 속에서 깨달았을까. "어젯밤은 흙굴인 줄 알고 편안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무덤 속이라 오싹하구나, 그렇지. 마음이 격동하니 사물이 비로소 존재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흙굴과 무덤이 비로소 똑같구나!"

 

 

원효암

 

 

오어사에서 600m 거리에 있다고 하는데 누구는 15분이면 도착하고 누구는 한 시간이 넘어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시간의 거리를 잊어버린 이도 있다. 누구에게는 똥이고 누구에게는 물고기.

 

 

삼성각

 

 

관음전. 1999년 새롭게 중건된 전각이다. 원효대사가 머물던 곳마다 관음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지 않았나 생각한다.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옆으로 작은 불상을 모셔놓았다.

 

 

수인을 보니 지권인을 하고 있다. 나무비로자나불.

 

 

원효대사. 『송고승전』에는 원효대사에 대하여 "蓋三學之淹通. 彼土謂爲萬人之敵, 精義入神爲若此也", 즉 "삼학의 의미에 두루 정통하고, 그 나라의 만인을 모두 상대할만하다고 일컬어졌으며, 정의精義가 신의 경지에 들었음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4 의해편에는 원효의 특이한 사적 '원효불기(元曉不羈) ', 즉 '원효는 남에게 매이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라수에 관해서는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고 창황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워 있었으므로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다. 그 나무의 열매도 보통 나무와는 달랐으므로 지금도 사라밤[裟羅栗]이라고 한다.

예부터 전하기를,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보았더니 한 개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이름을 율곡이라고 하였다.

성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裟羅)라고 하였다. 성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덕(麟德)2년(665) 중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즉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다. 상주는 곧 지금의 상주(尙州)로 혹은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성사가 나서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幢)은 속어로 털이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곧]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始末)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당전唐傳』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다.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 할 수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사적만을 쓴다.

성사는 일찍이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태종이 그것을 듣고서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나, 세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고 한다.]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경서와 역사서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 10현(十賢)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에 통달하고 6경(六經) 문학을 훈해하였으니,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

원효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화엄경』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문귀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佛地)라고 하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初輝佛日)는 뜻이다. 원효도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으로 그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소(華嚴疏를 짓다가 제4 십회향(十廻向) 품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을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과 시각 두 각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법사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임을 알고 화창한 것이다.

[성사께서]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사모하여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그때 옆에서 예배를 하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효처럼 걸림없기, 원효처럼 내려놓기, 원효불기(元曉不羈)하기. 대장부로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