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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굴이 재개방했다. 2023년 지름 70㎝ 규모의 낙석이 발생한 이후 전면 통제되었던 만장굴은 탐방객 안전과 관람환경 개선 등의 종합정비사업을 마치고 2026년 5월 30일 총 길이 7.4㎞ 중 1㎞ 구간을 일반에 재개방한 것이다.

 

 

만장굴은 제주도민에게는 무료로 개방된다. 매월 첫째주 수요일은 휴무이며 입장마감시간은 17:00시이다.

 

 

제주도민이 아닌 경우에는 네이버를 통해서 제주디지털관광증 '나우다'에 가입하거나, 현장에서 큐알코드를 찍어서 인증하면 만장굴 무료입장과 더불어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용암이 굳어서 형성된 화산섬 제주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면 만장굴 무료해설사님과 함께 만장굴을 답사하는 것도 추천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만장굴길 182 만장굴

 

 

만장굴은 천장이 함몰되면서 3개의 입구가 형성되었는데 왼쪽 방향은 미개방구간인 제1입구이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제2입구는 오른쪽 1km 구간이다. 제2입구 개방구간 끝에서 제3입구가 시작되는데 그곳 역시 미개방구간이다.

 

 

현재 만장굴 내부 온도 12도, 외부온도는 29도에 달하고 있다.

 

 

총 길이 약 7.4㎞에 주통로는 폭 18m, 높이 23m에 이르는 다층구조의 만장굴은 세계적으로도 그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이 만장굴은 수십만 년 전에 형성되었음에도 동굴 내부의 형태와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용암유선

 

동굴내부로 용암이 흐를 떄, 용암이 흘러간 자국들이 높이에 따라 동굴 벽이나 바닥에 나란히 선이나 홈으로 남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만장굴 벽면에는 다양한 높이의 용암유선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동굴속을 흐르는 용암의 양이 줄어들면서 용암의 높이가 지속적으로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만장굴에서는 용암유선을 비롯하여 용암종류, 용암석순, 용암유석, 용암선반, 용암표석 등의 다양한 용암동굴생성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인에게 개방된 제2용암길의 끝에 있는 높이 7.6m의 용암석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주로 알려져 있다.

 

 

용암종류

 

 

용암의 길

 

 

용암선반

 

 

낙반

 

 

낙반은 주로 용암동굴이 형성될 때, 혹은 형성된 후에 천장의 암석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바닥의 용암이 굳으면서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경우에는 떨어진 낙반이 그대로 쌓여있지만, 용암이 흐르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낙반은 용암에 의해 하류로 이동하거나 녹아 없어진다.

 

 

용암표석

 

용암이 동굴 속을 흐르는 동안 뜨거운 열기로 인해 천장이나 벽면에서 암석이 쉽게 떨어져 내려 용암과 함께 떠내려 가다가 적당한 장소에서 굳어진 것을 말한다. 크기가 큰 용암표석의 경우 용암이 수위가 내려가면서 용암 위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만장굴 벽면에서는 암석이 떨어져 나온 오목한 흔적도 발견된다.

 

 

용암의 길은 뜨거웠을 것이나 지금은 12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깊이 들어갈수록 더 차가워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다.

 

 

거북바위

 

제주도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용암표석으로 용암석주와 함께 만장굴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바위이다. 용암표석은 천장에서 떨어진 암석이 용암과 함께 떠내려가다가 바닥에 정지하여 굳은 것을 말하지만, 거북바위는 용암표석이 바닥에 정지한 후, 뜨거운 용암이 표석의 가장자리에 달라붙은 것이다. 거북바위 옆면에 남아있는 용암유선은 동굴벽면에 남아있는 용암유선의 높이와 일치한다.

 

 

용암유석

 

 

동굴속을 흐르는 용암의 온도는 1000~2000도로 매우 뜨거운 상태이다. 용암은 흐르면서 동굴바닥이나 벽면을 녹인다. 용암유석은 뜨거운 열에 암석이 녹으면서 벽면을 따라 흐르다가 그대로 굳어져 생긴 구조이다. 따라서 벽면을 따라 흘러내린 용암은 용암유석을 만들고, 천장에서 녹아서 떨어지다가 굳어지면 용암종유를 만든다.

 

 

용암석주

 

천장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 쌓이면서 마치 기둥모양으로 만들어진 동굴생성물이다. 이러한 용암석주는 여러 용암동굴에서 볼 수 있는데 만장굴의 용암석주는 높이가 약 7.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뜨거운 흔적

 

 

차가운 기억

 

 

뜨거운 것이 차가운 것을 만나 굳어진 기억의 길은 담담해보이나 실상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드라마틱힌 마음을 잠시 쉬고 싶을 때 걸어볼만한 곳으로 이만한 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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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70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한라산 관음사에서 2026년 5월 23일 17:00시부터 봉축 전야제 행사가 진행되었다. "올해도 나만 빼고 저들끼리 재밌는 거 한다."라고 생각된다면 내년 전야제 때에는 잊지 말고 이곳 한라산 기슭으로 저녁 산책을 나와도 좋을 듯하다.

 

 

한라산 관음사 평화대불 앞에서 펼쳐진 전야제 행사

 

 

합창과 싱잉볼 연주 등 여러 식전행사가 평화와 화합을 기치로 진행되었다.

 

 

관음사를 외치며 등장한 씩씩한 스님 덕분에 활기차게 시작한 전야제

 

 

점등식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평화와 화합을 위해 정진할 것을 선언하는 자리이다.

 

 

울지마세요, 부처님

 

 

연등을 따라 걷는 산사의 밤

 

 

법요식 준비는 이미 끝났다. 한라산 관음사에서는 오전 8시 55분에 법요식을 시작한다. 차량이 정체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제주대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한라산 관음사 셔틀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 관음사에는 연꽃 만들기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행사가 준비되어 있으므로 초파일 당일에는 3사 순례지 중의 한 곳으로 이곳을 참배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전야제의 볼거리

 

 

여러 장엄구들이 산사의 밤을 빛낸다.

 

 

요즘은 전야제를 진행하는 사찰들이 많으므로 꼭 이곳 산속 관음사가 아니더라도 전야제를 여는 가까운 사찰을 찾아 참여해 보는 것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다독여주는 기회가 될 듯 싶다.

 

 

동자승은 참선 삼매

 

 

법납 높으신 사형은 법고 삼매

 

 

가지가지 공양등

 

 

붓다께서 보여주신 '중도'와 '연기법'을 통해 뭇중생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다

 

 

탑돌이

 

 

유등행렬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예하 중봉 성파 대종사께서는 초파일 봉축법어를 통해 “부처님께서 보여주셨던 수많은 가르침은 대립과 갈등을 화합으로 치유하고, 폭력과 전쟁은 평화로 이끄셨으며, 무명번뇌는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꾸어 쓰도록 하셨다”며,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대립과 갈등을 화합으로 치유해야한다고 강조했으며, “우리 본성 가운데 여래의 지혜덕상이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 모두는 본래 한 몸이라는 생각으로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빛나는 자성의 존재들

 

 

유등이 곧 스스로임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지어다

 

 

아아, 세존께서 오시니 만물이 노래하고 춤추네!

 

 

우리도 붓다처럼 스스로를 귀히 여기고 날마다 새 날임을 안다면 날마다 달마다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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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십경의 하나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서귀포의 명승지 정방폭포

 

 

그러나

가슴저린 아름다움만큼이나 더 아픈

고통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이곳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정방폭포는 조선조에는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제주도 유람이 특별한 관광상품으로 널리 홍보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곳이다. 7~8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국내 유일의 해안폭포로 선전되며 학생들의 정기적인 수학여행지로도 각광받았다. 높이 23m, 너비 10m의 주상절리 위에서 폭포수가 떨어지고 그 위로 무지개가 반짝이면 저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넙적바위 위에서 사이다에 김밥을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삭제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제주 4.3 당시 서귀포 최대의 학살터였다. 정방폭포가 위치한 서귀포시 송산동 지역은 제주 4.3 당시 군부대가 주둔했던 지역이었다. 2연대 1대대 본부가 현재의 송산동주민센터인 서귀포면사무소에 주둔했고, 1대대 6중대 병력은 서귀포초등학교에 주둔했으며, 6중대 인근에는 헌병대와 서귀포경찰서가 있어서 민간인에 대한 체포 구금 구타 고문을 자행했고, 인근의 단추공장과 전분공장 창고는 수용소로 접수되었다. 당시에 전분공장이 있던 곳은 현재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해면 이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자는 247명에 이른다. 물론 이곳만이 아니다. 정방폭포, 소남머리, 소정방폭포, 자구리해안, 거문여 등 이 지역 일대가 모두 이승만 정권 군경에 의해 제주도민들이 학살된 곳이다.

 

 

그 정방연 건너에 정방굴이 있다.

 

 

주상절리가 끝나가는 곳에서 바닷길이 안으로 휘어들어간 곳으로 걸어들어간다. 

 

 

자르륵자르륵 먹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돌아앉은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제주도민들은 저 바위처럼 오래도록 숨죽여 살았다. 가족들의 시신을 파도가 바다로 끌어가는 것을 숨죽여 바라보았듯 그저 물결치는 파도만 망연히 바라보며 숨죽여 살았다. 두려워서 쉬쉬하던 4.3 이야기를 꺼내고 그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4.3 이야기는 그만하라 하고,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면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정방굴

 

 

그날의 영혼들이 쉬기 좋은 곳

 

 

이곳에 석가여래가 모셔져 있다

 

 

정방굴 석가여래는 1971년에서 1973년까지 남제주군수로 재직했던 김서연에 의해 조성되었다. 정방굴의 석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덮혀 석가여래의 법의가 되었다

 

 

파도소리같은 세상, 바람소리같은 세상

 

 

언제면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고요히

 

 

여럿 가운데서도 묵연히

 

 

그렇게 당당하게

 

 

정방폭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하고, 4.3의 아픔도 함께 껴안는다. 4.3에 대한 왜곡 속에서도 제주도민은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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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제주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천 깊숙한 곳에 추사의 ‘영천靈泉’이 있다. 추사의 글씨체로 알려진 마애각 ‘영천靈泉’은 한북교에서 진입하면 600여 미터, 방선문교(온난화 대응 농업연구소) 옆으로 진입하면 100여 미터 지점 하천 암벽에 새겨져 있다. 한북교에서 방선문까지는 대략 1.7km 정도된다.

 

 

거북바위

 

 

한천 하구 용연에서 방선문으로 올라가는 거북이라고 한다. 한라산신들은 산천단으로 내려왔다가 방선문을 거쳐 한천 하구 한두기 선반물에 가서 좌정하여, 난리통에 죽고 전염병에 죽고죽어 제사를 지내줄 이도 없이 쓸쓸히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 때마다 제사도 지내주었는데, 거북이는 산신들이 내려온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알고보니 거북이는 방선문 영구춘화 시절에 유람왔다가 물길이 말라 돌아갈 길을 잃고 굳어졌다는데, 그 제대로 된 모습은 한천에 물이 불었을 때 확실히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방선문에 대한 문헌기록은 1695년(숙종 21) 8월 19일 한라산을 두 번째로 오르다가 일기 불순으로 중간에 하산한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에 처음 보인다.

 

"두 갈래 계곡이 모여 합쳐져 북쪽으로 흐르는데 경치가 말끔하였다. 하나의 커다란 암석이 언덕에서 이어져 옆으로 누웠는데 골 입구의 가운데가 통하여 큰 구멍이 마치 문과 같았다. 진달래와 단풍 등 꽃나무들이 좌우 푸른 벼랑에 번갈아 줄을 지었는데, 봄가을에 놀러와 구경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이익태 이후에는 방선문을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만나는 명승지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한우는 영주10경의 제3경으로 품제하였다.

 

 

방선문으로 가는 오라올레길

 

 

오라올레길은 고지교ㅡ제주문학관ㅡ한라도서관ㅡ제주 아트센터ㅡ한북교ㅡ방선문까지 편도 약 4.7km이다.

 

 

선래왓 나마루빠 벗들의 추억도 이 길에서 밟힌다. 반갑다.

 

 

가카원이. 가카원이는 안내문에 의하면각하천覺夏川이라 하는데. ‘더위에 지친 몸을 차가운 샘에 담그니 문득 깨달음이 있구나.’ 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泉’도 아니고 ‘川’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좀더 정확한 고증을 통해 다시 설치할 필요가 있다.

 

오라동 사람들은 백중에 물맞이하던 ‘창꼼소’를 ‘가카우니’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오라동의 유명인사였던 이응호가 ‘가카우니’를 음차하여 ‘覺夏泉’이라 지어 새겼다.

 

 

가카원이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면 날카로눈 눈초리로 지켜보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기준으로 삼고 ‘영천靈泉’을 찾아 조심스레 발길을 내딛는다.

 

 

남쪽 계곡

 

 

말벌집. 빈집이다.

 

 

북쪽 계곡

 

 

이곳의 암벽 중간에 ‘靈泉’이 새겨져 있다. 이응호는 『용담실기』에서 “영천은 정실마을 각하원의 우측 바위에 있는데, 옛 참판 김추사의 유묵이다. 이에 그것을 인하여 새겼을 뿐이다. [靈泉 右在井室村覺夏源之西巖而故參判金秋史之遺墨也 仍刻焉耳]”라고 하였다.

 

 

靈泉. 김정희는 1840년(헌종 6)부터 1848년(헌종 14년)까지 약 9년 동안 제주에 유배와서 위리안치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이기조를 제자로 맞았다. 이 시기에 이기조는 추사의 ‘靈泉’이라는 글씨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조는 24세에 요절했고 그 동생인 이기온이 그 글씨를 간직하고 있다가 ‘가카우니’ 근처의 절벽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훗날 이기온의 아들인 이응호는 ‘靈泉’ 마애각 옆 ‘가카우니’ 바위에 '각하천'이라는 마애각을 남기고 칠언절구도 지어 남겼다.

 

영천靈泉/이응호

 

壁間承筧石頭眠

尋蹟重來意黯然

小子服膺何敢慢

久藏秋筆亦奇緣

 

절벽 사이 물길이 이어진 바위 밑은 잠잠하기만한데

흔적 찾아 다시 오니 마음은 아련하구나

소자가 가슴에 대고 기억함에 어찌 감히 소홀함이 있겠는가

추사의 필적을 오래 소장한 것 또한 기이한 인연이로다

 

 

영천이라 새겨진 바위절벽 아래에는 ‘소’가 형성되어 있는데, 반대쪽 암벽 밑에서 솟는 샘물이 이곳 절벽 아래 ‘소’로 흘러들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한천의 용천수, 영천靈泉의 근원. 지금도 조금씩 물이 솟고 있다.

 

 

천마도인가

 

 

노린재나무인가

 

 

찔레꽃 좋은 계절이라 걷는 걸음걸음에 꽃내음이 묻어난다

 

 

이응호가 ‘각하천覺夏泉’이라 하여 새긴 뜻은 어디에 있을까. 그가 비틀거리며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찾아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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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五賢壇은 제주시 오현길 61 제주성지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오현단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이후에, 제주 유림 김희정 등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五賢이라 함은 1520년(중종 15)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에 유배된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을 이른다.

 

오현의 시초는 충암 김정이다.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후 1576년(선조 9)에 제주판관 조인후 등이 충암이 사사당한 금강사 터에 충암묘冲菴廟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오현단에서 동쪽 가락천 너머 100여미터 되는 지점이다. 1666년에는 판관 최남진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제사지냈다. 이를 시초로 하여 1683년 정온, 김상헌, 이약동, 1678년 송인수를 추가배향하였고, 1682년(숙종 8)에 ‘귤림’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5년 송시열, 이회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철폐되었고, 1892년에 지방유림이 오현단과 단비를 쌓아 매년 향사를 지내오다가, 1910년부터 중단되었다.

 

 

충암 김정은 1520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521년에 사사되었다.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된 인물인데 임명된 이후에도 제주도에 입도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청음 김상헌은 안무어사로 제주도에 왔다갔으며 『남사록』을 남겼다. 동계 정온은 약 10여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그의 유허비가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다.

 

 

우암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3개월여를 지내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안내문에 오타가 많다. 제주시에서 오현단 일대에 대한 재정비에 나서야 할 때라고 보인다.

 

 

충암과 면암의 적려유적비. 충암의 적려유허비는 두동강이 나서 버려져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모셔왔는데, 사진 속의 충암적려비는 충암 선생의 16대 종손 김원식, 13대손 김병모, 김기봉 등 후손들에 의해 1979년에 복원된 것이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는 제주시 칠성로에 있던 그의 적거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가락천 동쪽 충암 김정이 사사당한 그 자리, 즉 금강사 뜰 안에 버려져 있던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

충암 김정은 오현단의 모태가 되는 인물이다. 1521년 사사된 이후에 1578년(선조 11)에 이르러 제주목사 임진과 제주 판관 조인후가 충암을 기리기 위해 가락쿳물 동쪽에 충암묘를 세워 봉향하였다. 그리고 다시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제주목사 백희수가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를 세워 봉향하였다. 그러나 두 동강이 나서 버려져 있다가 훗날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된 것이다.

 

 

오현 조두석. 오현을 기리고 제향을 올리기 위한 돌이다. 조인후가 충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인 금강사에 충암묘를 짓고 제사를 지낸데에서 유래되었으며, 1665년 최진남이 충암사를 이곳으로 옮겨 사詞로 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932년 오현단 조두석앞에서 제를 지낸다음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풍대.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뒤의 달이라는 뜻의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유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처럼 서있다는 뜻이다. 그 뒤로는 남아있는 제주성지가 보인다.

 

 

귤림서원묘정비. 귤림서원 묘정비廟庭碑는 1850년(철종 1)에 제주목사 장인식이 비문을 지었다. 이 묘정비로 보아 철폐된 귤림서원은 현재의 오현단 기슭 아래쪽인 호남새마을금고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현사유허비

 

 

노봉김선생흥학비

 

 

유천석. 처마의 낙숫물이 구멍을 뚫은 돌이다. 귤림서원 외삼문 처마 밑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

 

 

장수당은 1660년(현종 1) 제주목사 이회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집터에 세웠던 강당이다. 1667년(현종 8) 충암사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충암사라는 사묘와 장수당이라는 강학을 모두 갖춘 귤림서원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서원철폐 당시 폐쇄되었다가 1875년 제주목사 이희충이 경신재를 지었고, 이후 1910년 제주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헐렸다. 현재 장수당은 2003년 복원된 것이다.

 

 

이회목사의 '장수당기'

 

지난 무술년(1658) 봄 제주목이 비자 효종대왕께서는 해외의 창생이 조정의 은택을 입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대신들에게 문관 중에서 택하여 천거하라고 명하시자 대신들은 신臣 회에게 명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같은 해 4월에 고을에 도착하여 성화를 선양하려면 흥학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선 3읍의 교생을 모아 고강考講하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를 틈타 사서와 소학을 배워서 음독과 훈석에 통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명랑하여 기질이 밝고 뛰어난 자 20명을 뽑아 관에서 책과 양식을 지급하고, 향교 곁에 초가 6칸을 지어서 이들이 머물도록 하였다. 또 일찍이 경서를 읽은 자를 선발하여 훈장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다. 나 또한 매월 삭망에 직접 그들과 강론하고 그 능부能否를 상벌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분기하여 위태로운 흉년에도 대단한 병고가 없으면 감히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2년이 되자 20명 가운데 혹자는 사서일경을 읽고, 혹자는 사서이경을 읽는가 하면, 혹자는 사서삼경을 익히 암송하니, 비록 양남의 선비로서 평소 문학에 종사한 자라 하더라도 이들보다 더 잘할 것이 없었다.

 

토민인 진사 김진용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식년시에 경전을 강론하여 연획連劃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기꺼이 벼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스스로 세상을 물리치며 산야에 숨어사는 자이다. 그는 옛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으므로 임명하여 좌수로 삼았다.

 

내 임기가 만료되어갈 때 김진용이 내게 일러주기를 “사또께서는 부임한 이래로 재생齋生을 불러모아 공부를 권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으며 여러 유생들 또한 좇아 교화되어 힘써 배워서 문학이 크게 변했으니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이 해 놓기만 하고 떠나 버리신다면 여러 유생들은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 모두가 배움을 포기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진용이 말하기를 “성 남쪽에 폐허가 된 집터 하나가 있는데 곧 옛 판윤 고득종이 살던 터입니다. 고판윤의 두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헌달하였기에 평소 명당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고 얼마간의 책과 양식을 마련해 주면 영세불후의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고 일러 주었다.

 

마침내 진용과 함께 가서 살펴보니, 한라산의 정맥이 넘고 빗기며 북으로 달리다가 엉기어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앞에는 대해大海를 맞아 좌우로 품고 있어 명당이라 일컫는 것도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인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학사 11칸을 짓고 장수지당藏修之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동몽 15인을 더 뽑아서 앞서의 20명에 더하니 35명이 되었다.

 

또 본주에는 적곡 3분모가 있는 외에 또 300곡의 모곡을 모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갖추어 감해 줄 것을 계문啓)하여 거학巨學하는 양식으로 삼았다. 또 부족할 것이 염려되어 콩 150곡, 밭벼 50곡, 보리 50곡, 목면 2동을 변통하여 지급하고, 배 1척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여 육지에 나아가 계속하여 양식을 사 옮기게 하되 유사 2명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창시의 본말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경자년(1660) 4월 목사 이회가 기록하다.

 

 

복원된 귤림서원

 

 

1667년 제주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이건하면서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갖춘 서원으로 발전했고, 1682년 숙종은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로 보내 사액서원으로 지정하고 ‘귤림’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귤림서원의 원래 위치는 묘정비 아래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호라고 하면서 복원 문제에는 영 관심없는 제주시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향현사

 

 

1843년(헌종 9) 제주목사 이원조가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에는 김진용도 향현사에 병향되었다.

 

 

충암 김정에서 오현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몇 세대에 걸친 추억이 남아있는 곳

 

 

귤림서원 저편의 가락쿳물도 매립되어 사라졌고, 100미터 저 편이라는 충암의 적거지, 금강사도 기억 속에서 매립되었다.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붙들고 있을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다만 소요逍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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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존자암

 

 

한 사람이 길을 걸었다.

그 길은 구비진 산과 들과 강을 너머 시타림에서 멈췄다.

그곳은 장작 살 돈이 없어서 화장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시체를 버리기 위해 찾는 곳이었으나 그가 들어서자 시체를 버리던 숲은 수행자의 숲이 되었다.

 

그 숲에서 그는 생로병사의 고해에서 벗어나는 진리의 길을 찾고자 극단을 넘나드는 고행에 접어들었다.

숲에서의 고행이 6년도 지난 어느 날, 그 사람은 마을 여인이 건넨 유미죽 공양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행으로 무너진 몸의 기력을 회복한 후에 그늘이 좋은 핍팔라나무 아래로 갔다.

길상초를 깔고 앉았다.

달빛이 밝았다.

달을 가리던 어둠의 그림자는 없었다.

 

불이不二였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 동시同時인 진리의 달이 우주를 환하게 비추었다.

달빛 아래 그 사람은 고타마 붓다라고 했다.

 

 

'있다'와 '없다'에 매달리는 '결정적' 사고가 아닌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진리

 

 

중도와 연기緣起

그것이

붓다에게로 가는 길

 

 

부처님 말씀이 잡아함경에 있다.

 

‘나’라는 존재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이 세상과 우주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바른 견해로 본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있다’거나, ‘없다’고 할 수 없다.

‘있다’고 하면 있음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된다.

‘없다’고 하면 없음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된다.

 

 

중도적으로 본다는 것은 ‘있다’거나, ‘없다’라고 결정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인해 있다는 것이다.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에 의해 존재한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는 연기緣起에 의해 소멸된다.

그러니 인연 따라 모인 인연가합因緣假合이라고 한다.

 

 

문에 이르렀다

 

 

인연 따라 모인 것은 실체가 아니다.

나와 세상은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으니 세상이 있고, 세상이 있으니 내가 있을 뿐, 나도 세상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것이다.

인연가합이다.

 

나와 세상은 다만 무아無我이며 비실체로써 인연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않아, 중도로써 설할 뿐이다.

 

연기緣起는 곧 중도다.

 

 

존자암에 이르렀다

 

 

라즈기르의 영축산 여래향실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던 고타마 붓다의 정법이 아라한들을 통해 탐라에 이르렀다.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 의하면, 발타라존자가 900명의 아라한과 함께 탐몰라주耽沒羅洲에 거주하면서 정법을 펼치고 중생을 수호한다고 하였는데, 그 아라한의 여래향실이 바로 한라의 영실이다. 이 『법주기』는 AD 344년에 스리랑카의 대아라한인 난제밀다라가 정법을 수호하는 16명의 아라한들에 대해서 설법한 것인데, 난제밀다라가 생존했던 이 시기는 탐라 개국 시기로 추정되는 AD 300∼400년과 일치한다. 발타라존자와 아라한들은 영실존자암으로 들어와 머물렀고, 그 영실 존자암이 무너지면서 이곳 불래오름 존자암으로 이건하였다.

 

 

조선조 홍유손은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을 통해 영실존자암은 탐라의 시조인 고량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날 때에 창건되어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이 정립된 후에까지 오랫동안 전해져왔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비보소裨補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기록하였다.

 

 

1500년경까지는 국가에서 하사받은 논에서 나는 경비로 제주목사가 국성재를 행하던 존자암

 

 

대웅보전

 

 

석가모니불

 

 

존자암 목탑지

 

 

1651년 조선 효종 2년에 이경억(1620~1673)은 제주도에 안핵어사로 왔다가 시 몇 편을 남겼는데, 『탐라지』에 존자암을 묘사한 시가 있다.

 

존자암은 이름난 사찰이라더니

황량하게도 절반은 오래전에 무너졌구나

천년 세월 외로운 탑만 그대로 서 있고

방 한 칸에 서까래만 몇 개 남아있을 뿐

해객海客이 지나는 일조차 적고

만승蠻僧의 예법도 드물어져 가는데

가을 밤하늘 남극성을 바라보니

속세의 온갖 시름은 이미 사라져 없었네

 

尊者知名寺

荒凉半舊墟

千年孤塔在

一室數椽餘

海客經過少

蠻僧禮法踈

秋霄望南極

塵慮已全除

 

 

존자암 세존사리탑

 

『증보탐라지(일본천리대소장본, 영조 년간)』는 제주목 불우佛宇 조에서, “불상 1구와 함께 섬돌과 기와조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옆에 석옹石瓮이 있는데 뚜껑을 흔들고 움직여 열어보고자 해도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옆에서 시끄럽게 하면 조각구름이 항아리 틈에서 일어나 잠깐 사이에 무수한 산봉우리를 모두 뒤덮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는데 현縣 사람들이 유람객에 의한 폐해가 고통스러워 연못 속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아라한들의 길에서 만나는 한라산 존자암

이 길에서 만난 한라는 늘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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