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의 바다 빛깔을 참 좋아했다.
한참을 앓고난 다음의 마음처럼 그 바다 빛깔은 온화했다.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하고, 사랑하는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그런 사람의 눈빛을 그리게 된다면
세화의 바다 빛깔 크레파스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행원의 검은 바닷돌 위를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작은 숨구멍이 송송난 그 바닷가의 편평한 바위들은
숨구멍마다 숨겨두었던 햇살로 발바닥을 부드럽게 덥혀 주었고 지친 걸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스스로에게 남은 햇살이 이제는 한가닥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한 사람의 아픈 발바닥을 잠시나마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이제 더 무엇을 아끼리.
우리는 서로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행원 연대봉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마을 풍경을 참 좋아했다.
모래밭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짜고 햇살은 따가웠으나
그것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상의 짜고 따가운 것들에 대해 면역이 생겨버린 그 마음을 읽고
쿵쿵 심장이 홀로 뛰다가 이내 잦아들었을 뿐이다.
월정의 그 바닷가, 그곳으로 밀려오는 해무를 참 좋아했다.
멀리 수평선을 지우고 풍차의 날개를 지우며 스멀스멀 다가온 해무는
지나간 기억속의 나의 세계를 지우고, 나를 지워갔다.
다시 그 바다를 거닌다.
걸림없이 다가오는 해무에 한참을 젖어있다가
평생을 공부해도 진척이 나가지 않았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풀지는 못했던 일.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유는 없다. 평화는 없다.
진정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기꺼이 '나'라는 족쇄를 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대해 응답할 것.
세화, 행원, 월정의 그 바닷가에서
먼지같은 생각 하나 주웠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