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 오후
기온이 영하로 점점 내려갈수록
하늘은 극한의 푸른빛을 띤다.
와룡산 운흥사 길목에서 만난 서포 김만중
유배지에서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마음이 애처롭다.
살아계실 때
잘 섬겨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와룡산 기슭의 운흥사.
오른쪽 두번째 전각이 대웅전이다.
다른 곳과 달리 대웅전에 앞쪽으로 탑이나 누각 등이 없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지휘를 받는 승병 6천여명이 머물렀고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세번이나 찾았던 이곳이
임란의 전화로 소실되면서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한 까닭으로 보고 있다.
효종 2년(1651) 복원을 시작하여 영조 7년(1731)에는 대웅전 복원을 이뤄낸 것으로 기록된다.
대웅전 안의 삼존불
법단 뒤쪽의 불화.
이 탱화는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된 길이 15.5m 폭 9m의 운흥사 영산회괘불탱을 축소 모사한 것이다.
운흥사 영산회괘불탱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영조 6년(1730) 이연 선사와 진천 선사 등이 주관하고
의겸과 그의 제자들이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석가여래께서 영취산에 법화경을 설할 당시의 모습을 그린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문수와 보현 보살을 협시했다.
탱화의 뒷면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그리고 영조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탱화를 찍은 사진들이 유난히 이렇다.
일설에는 왜적들이 이 괘불을 반출하려고
삼천포항에서 세 번이나 배에 실었으나
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결국 다시 운흥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운흥사 영산전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지휘하던 승병들이 거점 사찰이었던 이곳에서는
매년 들녁에서 산화해간 승병과 의병들의 명복을 비는 영산재를 올린다.
영조 7년 중건되어 경남 문화재자료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과 산신각
운흥사 원형 장독대.
돌과 황토를 켜켜이 쌓아 올리고 기와로 덮은 이 원형 장독대는
운흥사가 창건된 신라 문무왕 16년(373)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판단 여부를 떠나 그 다정다감함에 마음이 쏠린다.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운흥사 샘물
그러나 운흥사는 아직 불사 중이다.
어엿한 일주문도 만나지 못했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승병과 의병들처럼
오직 큰 스승 하나만을 일주로 삼고 들어섰던 곳이기 때문일까.
창건 당시의 정겨움은 물론
시대의 아픔 앞에 맞닥뜨린 옛 사람들의 고뇌가 함께 한 이곳이
그 뜻을 곱게 이어
원만히 회향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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