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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메밀꽃

by 산드륵 201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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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부랑허네.


 

9월의 제주.


 

새하얀 물결.


 

찰랑거린다.


 

아래로는 열안지오름의 기슭까지


 

위로는 한라의 기슭까지


 

엄부랑한 모밀밭.

 

 

제주어른들이

여전히 고집스레 모밀이라 부르는

이 메밀에는

제주 농사의 신, 자청비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자청비가

하늘에서 곡식 종자를 받아올 때

메밀씨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했다가

뒤에 다시 올라가 받아오니

이로 인하여

메밀이 다른 곡식보다 늦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청비가 뒤늦게 가져다 주었다는 모밀.


 

설에는

왜정놈들 모르게 해먹던 모밀국시.

이제는 왜정놈들도 없는데

설의 새벽마다 자식들에게 해 먹이고

어쩌다 큰일에는

멧돌에 간 모밀고루로

빙떡도 붙여냈었지.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식들이 시름시름 아플 때면

모밀쏠로 죽을 쑤어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다 옛 이야기다.


 

그런

옛 이야기 간직한

어머니를 닮은 꽃.


 

어디 내 어머니만 그러 했으랴.

이 거친 땅의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신열을 견디며

이 땅에서

저 곡식과 함께 살아왔겠지.

 

 

관음사를 지나

열안지를 지나

한울누리공원 맞은편의 소로를 따라 이어진

9월의 꽃밭.

 

 

엄부랑허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다시 떠오른 말은

엄부랑허다.

 

비행접시다.

제주시 방향으로 찍은 사진에 웬 비행접시.

 

 

앗!

또 비행접시다.

한라산 방향으로 찍은 사진에도 비행접시다.

현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사진 속 비행벌레의 출현에

잠깐 웃고

요즘도 '비행접시'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궁금해 한다.


 

저 기슭 아래아래아래

제주시 연동의 검은오름까지 이어진 길로

걷다걷다걷다

그만 돌아선 길.


 

아쉬움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


 

모든 것이 거짓말.


 

그러나

너라는 멋진 인간은

오로지 이 순간

오로지 이 풍경 따위에도

온 생애를 던져버릴 수 있는

엄부랑한 멋진 영혼을 지녔기에

아쉬움 따위는

다시 접어두기로 한다.

 

 

거짓말같은 인생.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면

더 자주

행복을 위해

떠나야겠지.

이왕 이런 인생.

못 가보고 죽는 곳은 없게끔

더 자주

떠나고 떠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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