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깝다.
묵은 생각과 묵은 얼굴로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가
봄이 가까왔음을 알았다.
새 봄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2월의 하늘.
가벼이 훌훌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술술
도착한
함덕마을 서우봉.
산책로 안내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옛길은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새 생각과 새 얼굴로
새 봄을 맞으려 총총
떠나왔으니
옛 길을 버리고
새 길로 훠이훠이
걸어보는 것도
좋은 일.
산책로에서 만나는 함덕리 와요지.
서우봉 서쪽 기슭의 '와막밧'이라 불리는 곳에서 발견되는데
'와막밧'은 '기와를 빚던 밭'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제작된 고지도에도
와막이라는 표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함덕리 와요지는
전체길이 1100cm, 너비 280cm, 높이 166cm로
현무암과 진흙을 빚어서 가마를 축조하였으며
화구는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이곳이 지명과 관련하여
1900년대 경에
왜인들이 막집을 짓고 멸치잡이를 하던 곳이라 해서
왜막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진다.
함덕해수욕장.
물빛이 하늘빛이다.
마중나온 봄을 따라 오르는 길.
서우봉은
망오름과 서모봉 등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산책로는
망오름을 따라 오른 후
다시 서모봉을 돌아 내려오게 되어 있다.
물빛
하늘빛
꽃빛마저 푸른 곳.
푸르디 푸른
이곳 망오름 낭떠러지 기슭에는
안내도에 없는 또다른 이야기도 숨어 있다.
일본군들이
제주를 일본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파놓은
여러 개의 흉흉한
진지동굴.
여기에서 북촌의 해동마을까지 약 20여개가 줄지어 있는데
이곳 산책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산책로를 정비할 때
기슭의 진지동굴까지 연결할 수는 없었다 해도
찾아가는 길 정도는 안내해줬으면
더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망오름으로 오르는 길.
푸르름이
담뿍
담겨 넘친다.
구름이
흩어지고
달리고
모이고
떠나가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
구름떼가 가득히 몰려오고
바람마저 알맞게 불어주는데
그때 마침 노을이 지는
그 순간의 서우봉은
내가 제주의 비경으로 치는 곳이다.
아직 노을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아쉬워 않는다.
노을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절경을
이미 알기에
이미 보았기에 더는
아쉬움도 없다.
서모봉으로 가는 길.
앞서 가던 산비둘기가
내가 한 발 내딛으면
저도 한 발 깡총
뛰어가 기다린다.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이제 답을 알 것 같다.
비둘기가 놀랄까봐 조심스러웠던
나처럼
비둘기도
나의 길을 방해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것.
물빛이 하늘빛일 때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스쳐가는 인연들에게
미소로라도
서로를 위로하며 지나올 수 있었을 텐데
늦게야 알게 되는 진심이
못내 아쉽다.
둔지와 다랑쉬.
바메기오름과 거문오름
달여도.
<증보탐라지>에는
수달이 살던 섬이라서 달여도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홀로
걷다보니
어느새 서모봉 봉우리.
여전히 시선은 바다로 향한다.
저 바다에는
'무승개'라는 오름 북쪽의 바위언덕을 넘어
깊이 잠수하면
용궁으로 들어가는 바위굴도 나온다는데
아주 예전에는
해녀들이 이곳 용궁 입구에
희생돼지를 바치고 돌아오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모두 오래된 이야기다.
오래된 이야기.
사랑.
그것도 오래된 이야기.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의 일은 사랑.
바닷가 모래밭에 새긴 사랑.
돌아서면 지워져있다는 전설같은 오래된 이야기.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새기며 바닷가를 걷는 이들.
그들을 보며 심심한 상념에 빠진다.
오래된 이야기 중에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같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