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한림읍 동명리 극락사. 사세가 많이 기운 가난한 사찰이지만 그 의미마저 가난한 곳은 아니다.
창건화주와 중창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공덕이 새겨진 비석
극락사는 1934년 제주도 동명리 백양사포교당으로 출발하면서 한림 지역의 근대제주불교 발흥지가 되었고, 그 이후 근대시기에 제주불교 선구자들이 머물던 선불장이었다. 창건화주는 자선화 장무생, 박계길 좌수 등이며, 1940년경에는 장연종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0년에 사찰명을 극락사로 바꾸고 불법홍포에 힘써온 곳이다.
법당의 삼존불
지장탱과 여래좌상
1936년 간행된 『불교시보』 제7호 「蔡洙三女史의 美學」이라는 기사에는 동명리 극락사의 창건 모습이 전해진다.
제주도 한림면 東明里 대본산백양사포교당은 소화 9년 4월부터 同面 금악리 朴桂吉씨와 張戊生여사 양인이 오백원을 출자하야 창립된바 당교당 신도 蔡洙三여사는 현금 오백원을 출자하야 寮舍棟 五間 이십오평을 신설하엿으며 그밧게 도량 修築과 교당내 사용품 금종과 불기며 각물품을 不小하게 헌납하고 전답과 자산까지 불전에 헌납하엿슴으로 교당 일반신도는 칭송이 자자하다더라.
최초의 동명리 극락사는 와가瓦家 형태의 대웅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 해탈문, 초가 형태의 객실 등을 갖추었으며, 석가존상을 주세불로 봉안하고, 후불탱, 신중탱, 지장탱, 칠성탱, 산신탱 등도 모셨었다.
그러다가 이 극락사의 중창주이신 철수스님께서 중창불사를 단행하면서 탱화도 새롭게 조성되었다.
옛모습 그대로인 요사채. 이곳에서 그들은 일제강점기 어둠을 떨치고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후 새로운 정법 사회 건설을 위해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았다. 장무생 화주는 극락사 대표로 불교혁신대회 화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그 시절 선지식들은 떠났다. 범종은 소리를 기다린다.
90세 동명리 극락사 인생이 그토록 찬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기억하는 이마저 드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길이 지워지기야 하겠는가.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걷다보면 둥글둥글 또다시 눈밝은 선지식이 찾아와 범종을 울리고 세상을 깨쳐주지 않겠는가. 힘내라, 동명리 극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