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면 선흘리 선래왓
고전을 번역하고 차밭을 가꾸며 사는 인현스님의 제비둥지
참된 자들과 교제해야 하고
참된 자들과 어울려야 하리
참된 자들의 정법을 원만하게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리라
스님의 말씀을 새겨보자.
우리는 보이는 만큼 믿습니다. 이해한 만큼 믿습니다. 정법이라는 것도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이것이 “정법이구나.”라고 이해한 만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지평을 넓히고 정법에 대해 또렷해지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행해 나가면서 통찰지를 얻어야 업의 윤회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의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향사과四向四果가 그것입니다. 그 길을 향向해 가는 것입니다. 예류과, 일례과, 불환과, 무학과가 그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라고도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통찰지를 얻으려면 첫 번째 ‘有身見'을 끊어야 합니다. ‘이 몸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은 달리 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는 생각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견해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견해를 먼저 끊어야 되는거예요. '나'라고 하는 견해. 이 '나'라고 하는 견해를 먼저 끊어야 되는데, 이 '나'라고 하는 것들은 잘 안끊어져요. 물론 잠깐 끊어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 이렇게 하면 끊어지고, 고통에서 벗어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심해心解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생긴 이해'라는 뚯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닌거죠. 옅은 지혜가 생겨서 '나'라고 하는 것이 끊어졌다고 여기나 그러나 그것도 곧 사라집니다.
통찰지를 얻기 위해서는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갈등들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거기에는 10가지 족쇄, 혹은 5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끊어나가면 '혜해慧解'를 얻습니다. 그러나 잠깐 일어난 심해心解로는 안됩니다. 훈련이 안되었기 때문에 '혜해慧解'가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형성된 것입니다. 남으로부터 잠깐 얻어들어서 이해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탈을 가져다 주진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조급해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 아니라 이 길로 가면 나에게 유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완전한 해탈을 얻을수 있구나 라고 하는 방향성이 중요한 겁니다. 방향성이 올바르면 속도감이 없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때가 무르익었을 때 불현듯 진전이 있고 내 확신으로 딱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 심해心解를 통해서 자꾸 '알았구나'라고 집착한다거나, 머물러있다거나, 내지는 그것에 대해서 자꾸 맛볼려고 한다거나, 속도감을 느낄려고 한다면 수행에 장애가 될 뿐입니다.
노력과 정진은 '의도'된 것이고 '형성'된 것이지만, 충분하게 익어지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단계가 옵니다. 그 단계를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수다원까지는 칠왕래七往來'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7번 윤회한다는 것은 그만큼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기 때문에 계속 갈 수 있습니다.
수다원 다음으로 사다함과는 일환과一還果라고 합니다.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한번' 부딪치면 해결되는 겁니다. 혜해慧解가 생겨나는 겁니다. 확실한 혜해慧解가 생겨나서 아나함과가 되면 확실하게 해결이 되서 다시는 번뇌의 길로 들어서지 않아서 불환과不還果를 얻습니다. 윤회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절로 저절로 될 정도가 되어야 불환과不還果에서 저절로 저절로 아라한과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삼법인三法印입니다. 無常•苦•無我를 확실하게 체험하고 그것을 통한 지혜가 분명하게 자리 잡는 것. 그것입니다.
왜 괴롭습니까? 無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상에 대한 견해가 苦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괴로울 것도 없습니다.
고苦의 '이해'를 통해서 니르바나nirvana에 도달합니다. 완전한 락樂은 혜해에서 옵니다.
무아無我를 이해하려면 '我'라고 하는 것이 '현상의 흐름에 대한 형성력일 뿐이구나.'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고정되어' 실체하는 我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떤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의 흐름'이 있을 뿐인 거죠. 자꾸 공부를 해서 체험적으로 알아차리릴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