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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풍이 분다.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 마을 안세미오름으로 간다. 이 길에서는 안세미의 둘레길을 걷거나 등산로를 올라도 좋고, 안세미오름과 형제 사이라고 하는 밧세미오름까지 걸어도 좋다. 명도암 주민들은 인근의 안국사에서 이곳까지 천천히 걸어와 안세미로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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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에서 안세미까지의 둘레길은 총길이 425m, 왕복 30분, 안세미 등산로의 총길이는 1.2km, 왕복 1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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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세미오름은 표고 396.4m, 비고 91m, 둘레 1,718m의 야트막한 오름으로 해송, 상수리나무, 삼나무 등이 우거져 사철 푸른 그늘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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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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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삼의악과 어승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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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돋은 산정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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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우는 꿩마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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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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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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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갈 수 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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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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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오리, 물장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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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농, 지그리, 민오름, 절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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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사라봉과 별도봉, 그리고 삼화지구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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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를 기다려
산지기들은 어디로 갔나
다들 떠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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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안세미오름이 있는 명도암 마을은 옛사람 김진용 선생과 관련이 깊다 보니까 이 지역의 모든 곳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안내문에는 김진용 선생이 이곳을 즐겨 산행했다고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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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료에 의하면 광산 김씨 김진용 선생은 조선 중기 제주 출신의 문인으로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다. 원래 구좌읍 한동리 출신이나 처가인 봉개동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제주에 유배 온 실학자 이익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이후 진사시에 합격하여 숙녕전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제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제주목사 이괴가 제주의 학문 진작에 힘쓰고자 했을 때에는 장수당 건립을 건의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오현단의 시초가 된다. 김진용은 장수당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고 제주 유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이 지역의 지명은 김진용의 호를 빌어 '명도암' 마을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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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길을 걸을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새길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생각할까. 어질고, 의롭고, 예절바르고, 지혜로운 성품을 갖추기 위해 무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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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길을 걸을까. 맹자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4단이라는 걸 강조했다는데,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맹자의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4단을 생각하며 걸었을까. 4단이 나아가 인의예지로 향한다는데 김진용 선생도 그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착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람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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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이 피었다. 아름다운 개량동백이 피었다. 화사하고 찬란하다. 각 시대마다의 개량학문도 언제나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떠나고 난 뒤 가장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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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연默然히 아름답구나! 동백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곧 어진 마음이 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곧 의로움이 되며, 사양하는 마음이 곧 예절이 되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곧 지혜로움이 된다는데, 2025년 서울 의왕의 멧돼지를 보면 인의예지가 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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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미오름 기슭 명도암선생 유허비
남명(南溟)의 영봉(靈峰)인 한라산의 저정(儲精)이 뻗어 그 동북 기슭 육십여리(六十餘里)에 명도암오름[明道菴兀音]을 이루었으니 수석(水石)이 유수(幽邃)하고 수기(秀氣) 감도는데 열천(冽泉)을 사이에 둔 이곳 안태전(安胎田)은 바로 선생(先生)이 거처(居處)를 복(卜)하여 양덕상지(養德尙志)하신 유허(遺墟)이니라.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진용(晉鎔)이요, 자(字)는 진숙(晉叔)이며, 선생(先生)이 명도암(明道菴)에 은거 수도(隱居脩道)하시매 세인(世人)이 경모(敬慕)하여 명도암 선생(明道菴先生)이라 일커렀다. 선생(先生)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서 여조(麗朝)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태현(台鉉)을 중시조(中始祖)로 도염령동정(都染領同正) 휘(諱) 일(逸)을 입해시조(入海始祖)로 모시니 이로써 탐라(耽羅)의 문물교화(文物敎化) 자못 쇄신(刷新)된 바 있더니, 선생(先生)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유가(儒家)로서 일찌기 뜻을 성현(聖賢)의 학(學)을 두고 연학상지(硏學尙志)로 능(能)히 황무(荒蕪)를 기제(旣除)하니 남방(南方)의 교화(敎化) 울연(蔚然)히 이룩되어 드디어 만인숭앙(崇仰)의 유종(儒宗)이 되시니라. 선생(先生)은 이씨조선(李氏朝鮮) 선조(宣祖) 을사(乙巳)에 강생(降生)하시니 천성(天性)이 고명(高明)하고 재질(才質)이 특출(特出)하여 유시(幼時)에 적거중(謫居中)인 간옹(艮翁) 이익 선생(李瀷先生)에게 수학(受學)하시다 인조(仁祖) 을해(乙亥)에 사마(司馬)에 오르셔 반궁(泮宮)에 출유(出遊)하시고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서(敍)함을 입자 사(辭)하고 귀향(歸鄕)하니 본지(本志) 사환(仕宦)에 있음이 아니러라. 이래(爾來) 준재(俊才)를 모아 성현(聖賢)의 길을 강(講)하며 육영(育英)에 힘써 오시더니 효종(孝宗) 무술(戊戌)에 만오(晩悟) 이공(李公) 괴(襘) 목사로 도임(到任)하자 우선(于先) 흥학(興學)을 첫 사업(事業)으로 삼고저 선생(先生)께 조규방략(條規方略)을 자방(諮訪)하매 선생(先生)이 더불어 경륜(經綸)하여 학사창건(學舍創建)에 이르니 이것이 장수당(藏修堂)으로 오늘의 오현단(五賢壇)이 바로 그 유서지(由緖地)요 탐라상교(耽羅庠校)의 효시(嚆矢)라. 이로 말미암아 교학(敎學)이 흥륭(興隆)하고 인재배출(人才輩出)이 이루 헤아릴 바 아니니 선생(先生)의 공(功)은 청사(靑史)에 길이 전(傳)할지어다. 계묘(癸卯)에 서거(逝去)하시니 향년오십구(享年五十九)라. 순조(純祖) 임진(壬辰)에 목사(牧使) 이공(李公) 예연(禮延)이 선생(先生)의 유덕(遺德)을 흠앙(欽仰)하고 사림(士林)의 요망(要望)도 있어 영혜사(永惠祠)에 종향(從享)하고 헌종(憲宗) 계묘(癸卯)에 지주(知州) 이공(李公) 원조(源祚)가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고영곡득종(高靈谷得宗)과 병향(幷享)하여 왔으나 고종(高宗)의 신미(辛未)에 대동철향(大同撤享)되더니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이 모여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를 건립(建立)하였도다. 이제 또 선생(先生)의 후손(後孫)들이 모여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을 현양(顯揚)코자 하니 참으로 감격(感激)할지어다 희(噫)라. 선생(先生)은 일찍기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면서 연학(硏學)과 육영(育英)으로 생애(生涯)를 마치신 분으로 탐라(耽羅)의 해황(海荒)을 깨치시고 향토(鄕土)에 헌신(獻身)하여 그 교화(敎化)는 부유(婦孺)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참으로 거룩하시도다. 길이 그 유지(遺志)를 계승(繼承)하여 선생(先生)의 위업(偉業)을 보람 있게 할지니라. 문학박사(文學博士) 연안(延安) 이숭녕(李崇寧) 찬(譔) 안동(安東) 김충현(金忠顯) 서(書) 선생악강지육주(先生嶽降之六周) 을사시월일립[乙巳十月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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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용의 건의로 장수당을 건립했다는 당시의 제주목사에 대하여 유허비 앞의 안내문에는 '목사로 재임중인 '이괴'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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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에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괴襘'자로 보고 있다. 현재 '이회', '이괴' 등이 혼용되어 쓰이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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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암 조리새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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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은 조래물, 조래천, 명도암물, 명도천, 안새미물통 등등으로 불린다. 수도시설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명도암 마을의 식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통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외에도 길가에는 또하나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샘물을 둘러싼 돌담은 2000년대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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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은 여전히 맑다. 햇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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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미오름 입구의 습지. 가까이서 보면 무척 혼탁하지만 멀리 떨어져보니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가까운 것에 너무 집착하면 모든 것이 혼탁하다. '괴'와 '회'가 그러하다. 잠시 떨어져 스스로의 맑음을 회복하는 지혜가 필요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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