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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동해 두타산 삼화사

by 산드륵 201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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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겨울 속으로 들어간다.  

  

동해 두타산 삼화사 초입 무릉반석에는

조선시대 3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훗날 그 글씨를 고증하여 다시 새겨넣었다. 

  

무릉반석 앞의 금란정 

 

대한제국 광무 7년(1903년)

삼척지방 유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현학을 강마해 왔으나

일제강점기에 향교가 폐강되자

이에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뜻을 기리고자 정각을 건립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중단된다.

이에 1947년 북평동 단봉 석경등에 금란정을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금란정은 1958년 이곳 무릉반석으로 이전한 것이다.

 

금란계에 가입한 사람들

  

 금란정 뒤쪽으로 무릉반석이 이어진다.

 

석장 또는 석장암으로 불려지던 이곳 무릉반석은

약 5천평이나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곳.

 

반석 곳곳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 등이

함께 찾은 벗들의 이름을 낱낱이 새겨놓았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초서체로 쓰인 양사언의 멋드러진 글씨 

가히 당대의 명필이라 할 만큼 위풍당당하다.

 

이곳에서 또다시 돌파기에 전념한 금란계원들

이쯤되면 한국인의 돌파기 의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명필 양사언이 아니었더라면

역사의 한 켠에 서 있는 금란계가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몇 천 평 바위 위에 새겨진 '낙서'로도 보일만한 이 진기한 광경을

명필의 칭호를 얻지 못한 당대 서민들의 기록이라 해 볼까.

  

무릉반석을 지나면 두타산 삼화사 

 

원래 삼화사는 무릉계곡 옆 평지에 있었으나

중대사 터인 이곳으로 옮겨왔다.

 

옛사람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은

그의  ‘두타산기’ <미수기언>에 삼화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에 두타산에 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덩굴 속에 무너진 옛날 탑과 철불만이 남아 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 한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는데, 바위너덜로 된 골짜기가 몹시 험하게 가파르고,

그 아래는 바위가 평탄하여 차츰 내려갈수록 험한 바위는 없어져 올라가 놀 만하며,

계곡에는 물도 흐르고 있다.

바위너덜 위로 1백 보쯤 가서 중대사를 지나가면 바위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鶴巢臺)에 와서 쉬었는데, 이곳에 이르니 산세가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指祖山)에서 구경하였다.

이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석굴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으로는 옛 성이 보인다.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上院庵)의 황폐한 터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의 산장이었다고 한다.

  

천왕문

 

삼화사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적광전 앞으로 함께 모셔온 삼층석탑

 

삼화사는 범일국사(810-899)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이 삼층석탑도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화사 적광전의 철조 노사나불 좌상

잃어버린 양쪽 손을 다시 복원하였다. 

 

적광전

 

고요의 빛 

적멸의 빛

 

차디찬 얼음물 속에 몸을 담그면 그 빛이 보일까.

...

교만을 버려야겠다.

 

적광전 옆의 지장보살님

세상을 차갑게 떠돌다가도 님을 만나면 안심이 된다. 

 

약사전

 

극락전 

 

삼화사 사적비와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 거사의 유적비

 

고려 최씨 무신 정권 하에서

50세가 넘어서 왕의 부름을 받고

이후 16년간 격동의 정치 현장에 발을 디딘 이승휴는

1280년 국왕의 실정과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의 간언을 올렸다가 파직당한 후,

삼척현의 구동에 용안당(容安堂)이라 이름한 은거지를 지어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이승휴는10여 년 동안 삼화사의 불경을 빌려 공부하였으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綠)을 저술한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64세 되던 해에

두타산의 사찰, 현재의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이다.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으로 삼은

이 제왕운기는 상하 2권 중,

상권은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칠언시로 읊었으며,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제왕운기에서 이승휴는
시례(尸禮)·고례(古禮)·남북옥저·동부여·예맥은 물론 삼한·신라까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였지만,

이승휴는 박달나무의 신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

  

삼화사 선원 뒤로 보이는 두타산

두타산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있었는데 각자가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것과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  

 

두타산의 감싸안은 삼화사 전경

 

두타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물러야 한다. 
항상 걸식해야 한다. 
걸식할 때는 빈부를 거리지 말고 순서에 따라 해야 한다. 
하루에 한 번 먹어야 한다. 
과식하지 말아야 한다. 
정오 이후에는 과실즙, 꿀 등도 먹지 말아야 한다. 
헤지고 헐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어야 한다.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무덤 곁에 머물며 무상관(無常觀)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없애기 위해 나무 밑에 기거해야 한다. 
지붕이 없는 한데에 앉아야 한다. 
항상 단정하게 앉아 있고 눕지 말아야 한다. 
....._()_

 

 

겨울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마음 간소한 세상 속으로 누구는 적멸의 빛을 보았을까...  

 

 

 

 

 

 

 

 

 


31  Dust In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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