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이 도래하니
흐린 하늘도 길을 막지 못한다.
성판악에서 첫 숨을 고르고 사라오름으로 향하는 길.
아직 하산하지 못한 산사람을 찾아 길을 나서듯
가을 단풍을 찾아
부지런한 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목표는 표고 1325m의 사라오름
한라산 정상을 목표로 삼지 않았기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걷고 있다.
길섶에서 노는 노루도
무엇에 쫓기지는 않는 듯하다.
좋은 풀을 발견하고 서로를 부르며 다정히 노닐 때
두 눈동자에는 서로만 있을 뿐.
해발 700m에서 볼 수 없던 단풍이
해발 1100m를 지나면서 서서히 환해지고
세상사에 시들었던 내 마음도 함께 밝아온다.
가을이구나
홀로 걷고 싶은 가을이구나
아련한 가을이구나.
오래 마주보고 있으면
내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멈춘다.
한라의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라오름 가는 길.
단풍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
사라로 스며든다.
계단을 오르니
사라오름의 굼부리에 안긴
둘레 약 250m의 하늘 호수
빛나는 물결이 잔잔해지도록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호수에 잠긴 제 얼굴을 저마다 만날 수 있다.
이곳에 물이 차고 넘칠 때는
발목을 적시며 이 다리를 건넌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게 행복한 일이다.
호수 저편에는 뚜렷히 보이는 한라의 정상.
호수를 건너 사라오름 정상에 오르니
한라의 정상이 바로 지척이다.
가을 안개 속의 논고오름, 동수악
멀리 서귀포 시내도 가깝게 보인다.
정상에서 뒤돌아보면 흙붉은 오름
눈이 시리다.
남들은 2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올라온다는데
게으른 탓에 세시간은 족히 걸려 올라온 이 길을
여러가지 이유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등 뒤에서
어서가라 손짓하는 가을과 작별하고 내려오는 마음이
여러가지로 얽혀 복잡하다.
찰나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