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갈 곳이 없다.
겨울 한라산, 그곳밖에는 갈 곳이 없다.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걷기로 했다.
적막한
아주 적막한 눈길을 걷고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세상은 그게 아니다.
환하다.
차디찬 적막에 갇혀 바라보는 환한 세상.
푸른 태양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실기암의 풍경
빛나던 지난 가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살아 움직이는 것은 까마귀떼뿐.
붙들 수 없는 것을 붙들지 않는
겨울 산의 모습 앞에서
나는 까마귀떼보다 작아진다.
불래오름, 어스렁, 이스렁오름
모든 것을 버려도 결코 초라해지지 않는
너의 기백이 참으로 좋구나!
1600고지를 넘는다.
바람조차 얼어붙었다.
까마귀와 붉은 깃발
이것이 겨울 한라.
붉은 깃발 하나에 의지해
뚜벅뚜벅 걷는
순백의 길
그 길은 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걸을만하다.
걸을만하다.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끝을 알고 가는 길.
끝이 시작이 되는 길
모든 것이 식어버린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쉬지 않고 걷는 길.
그러나
멈추고 쉬어
스스로 높은 봉우리가 되지 않는한
연달아 나타나는 세상의 어떤 봉우리에서도
평안에 다달을 수 없음을
이 길 위에서 다시한번 깨닫는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재촉하며 도착한 윗세오름
그러나 모든 상념은
윗세오름 대피소의 사발면 하나와 커피 한 잔에
단박에 녹아 사라진다.
겨울산에서 마주한 인생의 무게는
사발면 하나의 무게와 다르지 않다.
존재의 무게는 그렇게 가볍다.
사발면 때문에
웃세누운오름 앞까지 이어진 줄에 끼어
사람들은 잠깐 쉰다.
오래 기다려 받아든 사발면을
금방 먹어치우고
누구는 어리목으로
누구는 다시 영실로 하산한다.
그리고 마냥 행복해 한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 멈춰서서
쉬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2013년
저 고목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디찬 눈을 뒤짚어쓰고 견뎌낸 2013년
그러나 안다.
죽은 듯이 보이는 저 나무에도
파릇한 새싹이
다시금 돋아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안다.
푸른 태양이 녹으면
저들은 다시금 따뜻한 미소로 마주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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