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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해남 진불암

by 산드륵 201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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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5

 

 

해남 대흥사 진불암.

아주 오래전

남인도에서 불상과 16 나한상을 모시고

전라도 강진 땅 백도방에 도착한 영조스님 일행이

이곳을 점지하고 불상을 봉안하던 날 밤

장차 진불이 출현할 가람이다라는 현몽을 접하고는

사명을 진불암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곳.

이곳에 청화 스님께서 다녀가셨다.

 

2003년 열반한 청화스님께서

40대에 이곳에 들어와

직접 돌을 지고 날라 돌담을 쌓고

비와 바람을 막아 수행정진하던 곳.

혹독하디 혹독한 수행으로

스님의 몸은 가날픈 겨울나무 가지처럼 많이 여위었지만

맑은 향훈만은 겨울 숲에 홀로 핀 한란의 향기와 같았다.

 

청화스님께서 해설한 금타화상의 보리방편문을 떠올린다.

 

마음은 허공과 같을새

한 조각 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같은 마음 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 같은 마음 세계에

해와 달을 초월하는 금색광명을 띤

한없이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와 같은 성품 바다를 관찰하면서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며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 등의

모든 중생들을

금빛 성품 바다에 바람없이 금빛 파도가 스스로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천백억 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고

 

다시 저 한량없고 끝없이 맑은 마음 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성품 바다와

물거품 같은 같은 중생들을

공과 성품과 현상이 본래 다르지 않고 한결같다고 관찰하면서

법신, 보신, 화산의 삼신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항상 생각하면서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청화 큰스님께서 진불암에 막 오셨을 때 처음 친견했다는

한 신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큰스님은 잡수시는 것도 주무시는 것도 없이 공부만 하셨다.

밥을 하루에 한 끼씩 잡수더라도

한 달에 쌀 한 말은 들텐데

한 달 두 달이 가도 쌀이 줄지가 않았다.

많이 울고 왔다.

그나마 다행히 미숫가루는 드셔서 그것만 부지런히 해다 드렸다.

...

목숨을 모조리 바칠 각오로 참선을 하셨다.

...

 

한때 지리산 두지터 산정 옛 암자 자리에서

청화스님의 수행하는 모습을 바라본

스님의 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큰스님께서는

두지터에 대나무와 억새풀로 임시로 처소를 만들어 극도의 고행 정진을 하셨다.

한 겨울 지리산 높은 곳에서 더욱이 생식하시며 불을 때지 않은 바위에 앉아 계시니 상상이나 되는가.

큰 스님은 가부좌하고 계셨는데

온몸이 얼어서 얼굴은 검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큰 스님께서는 정작 맑고 온화한 모습으로 그렇게 편안히 대하셨다.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큰스님께서는 나를 보고 일어서시는데 다리가 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주물러 드리니까 '괜찮네. 괜찮네' 하시며 손수 몸을 쓰다듬으시며 일어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성자의 길을 간다는 것,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청화스님께서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그동안 쇠락한 진불암에 머물던 숯 굽는 사람들도 떠나고 

법당과 요사채마저 허물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밝아오면 질통을 메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손보고

햇살이 희미해져가면 마을로 내려가 탁발 수행하고

햇살이 사라지면 미숫가루 한 모금 마시고 장좌불와에 들었다.

법당 뜨락의 연못은 스님께서 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직접 만드신 것이다.

 

스스로는 극한의 고행길을 걸었지만

세상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자애스러웠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의 시선이 머물다 간 곳에  가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려나.

 

스님의 말씀을 기록하며 스님과의 만남을 대신하려 한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삭 깨듯이, 견도할 때도 문득 활연대오해서 훤히 깨달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부러뜨리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부러진다.

끈끈하니 실이 나온다.

그와 똑같이, 수도할 때도 쉽지가 않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 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 닦아나갈 때 공덕이 성취 되어,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

성인의 자리는 자타, 시비의 구분이 다 없는 자리다.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이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이다.

사량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장양성태라 한다.

 

이렇게 닦아나갈 때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인 성인의 지위가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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