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0일 아침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고
신라 원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만 전해진다.
아주 오래전 그때도
이곳은 복원불사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절로 절로 원만히 불사를 이루시길 바란다.
강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아침.
강바람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아침이라는 것이 맞겠다.
구룡루.
이곳은 강가에 위치한 사찰인만큼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고려 우왕 때에
여주에서 신륵사 사이에 있는 마암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굴레로 그 용마를 제압하였다는 이야기.
고려 고종 때 인당선사가 신력으로 용을 제압하였다고 해서
신륵사라 한다는 이야기.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이 극락보전 대들보에는
나옹화상의 필적으로 구전되어 오는
'천추만세'라는 현판이 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좌복을 깔고 앉은 참배객이 있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심검당
신륵사 다층석탑.
흰 대리석을 사용한 희귀한 양식의 다층석탑이다.
조성당시부터
현재의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 다층석탑은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수종사 팔각 5층석탑과 재질과 세부 양식면에서 공통점이 많아
신륵사가 영릉의 원찰로 지정된
성종 3년 1472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과 석종비, 석등.
나옹화상의 사리탑이다.
공민왕이 국사였던 나옹화상이
고려 우왕 2년 1376년
경기도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에
이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되자
그후 3년 후인 우왕 5년
이곳에 사리탑을 조성하고 비를 세웠다.
고려말기 석종형 부도양식을 잘 간직한 부도로
조선조 석종형 부도의 전형이 되었으며
보물 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
나옹화상의 사리탑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비천상과 반룡문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 석등은
조선조 장명등의 선구적 예라고 한다.
보물 제231호이다.
석종비.
나옹화상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목은 이색이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썼으며 이인중이 각을 했다.
용이나 거북이가 비신을 받치고 있는 것과 달리
나무집을 짓고 기와를 올리듯 표현하였다.
도량은 조용하다.
관음전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도량의 은행나무에도 관세음보살이 있다.
나무의 가지가
관세음의 형상으로 자라나고 있다.
원하는 이에게는 모두 감응하는 관세음.
신륵사 대장각기비.
고려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자신의 부모님을 천도하고자
대장경을 인쇄하고 대장각을 지은 내용을 기록한 비문이다.
현재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명부전 근처에
대장경을 보관하던 2층의 대장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그 기록만 남아 있다.
강가로 향했다.
신륵사 다층전탑이 보인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이다.
벽돌을 구워 쌓은 이 탑이 있어
예로부터 신륵사는 벽절로 불려졌다.
이 탑은
강을 오가는 이들의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다.
아까부터 졸졸 따라오던 다람쥐가
전탑에 올라앉았다.
어둠과 두려움을 밝히는 탑 위에서
저도 그만 쉬고 싶은 것일까.
신륵사 경내 강변의 삼층석탑.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에 세워진 탑이라고 한다.
누구나 한번은 떠날 세상.
남은 자는 떠난자를 그리워하다
그 역시 떠난다.
그리워할 것이 점점 많아져가니
우리에게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살아서 서로 등대가 되어주면
훗날에 이르러
아마 그리움은 있어도 큰 회한은 없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