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연주봉.
서울대 공학관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따라 걷고 있다.
신라 문무왕 17년 677년
의상대사가 연주암을 세우고
그 아래 관악사를 창건했다.
이후 사명에 변화가 생기면서
연주암은 연주대로 불리고
관악사는 연주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연주대.
연주암.
대한불교 조계종 제2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연주암의 12지신 탑
갈림길이 복잡하다.
연주대로 먼저 오를지
연주암을 먼저 찾을지 저마다 의견들을 내놓는다.
연주봉 정상의 기상대 레이더 돔.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다.
<참선경어>의 말씀이다.
파초산 혜청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앞에는 만길 낭떠러지이고
뒤에서는 산불이 타 들어오며
앙옆은 가시덤불인 상황을 만났다고 하자.
앞으로 나아가자니 낭떠러지로 떨어지겠고
되돌아가자니 타 죽겠고
옆으로 몸을 돌리자니 가시덤불에 찔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헤쳐나갈 수가 있을까.
만약 빠져나갈 수가 있다면 살 길이 열리게 되지만
빠져나가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는 상황이다.
갈림길에서
연주암을 먼저 찾기로 했다.
연주암 대웅전과 삼층석탑.
연주암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연주암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관악사가
조선조에 들어와
연주암으로 사명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끊기 위한 수행을 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전각은
닫혀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천수관음전.
천수관세음보살과 오백 아라한을 함께 모시고 있다.
부산한 등반객들과는 상관없이
좌선에 들어있는 이들이 관음전을 지키고 있었다.
연주암에 참배하고
연주대로 향한다.
고려왕조가 망하자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 고려의 신하들이
이곳에 들어와
멀리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
조선 태종의 두 아들 양녕과 효령이 셋째인 충녕, 즉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모든 미련을 접고자 들어와 수행했다는 이야기 등이
이곳 연주암과 연주대에 전하고 있다.
각기 다른 그리움을 그들은 모두 씻어냈을까.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집착은
토끼뿔이라는 것을
알고 갔을까.
해발 629m
관악산 정상이다.
산기슭 연주암마저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거쳐온 모든 것은 그리움이 된다.
그러나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좁은 바위틈으로 걸어내려가면
연주대
그리고 곧장
약사여래불이
먼저 맞아주신다.
응진전
석가여래와 나한들이 모셔져 있다.
<참선경어>의 말씀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다만 위태롭다느니 죽는다느니 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비로소
살 길이
하나 트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을 짜냈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
혜청스님의 말씀은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그런데 납자들이 흔히 지식을 찾다가
심오한 이론 속에 도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어서
이와 같은 철저한 참구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고 하겠다.
집 걱정, 그속에서 밥 걱정, 옷 걱정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걱정까지
한 생애를 걱정으로 보낸다.
산에 오른다.
한 생애를 지고 살았던 걱정조차
어느 순간 가볍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산이 그리웁겠지만 산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우나 걱정하지 않으며
그렇게 초연한듯 초연하지 않은듯 살으라고
그 대답을 스스로 듣고 가라고
연주대는 그렇게 높이 매달려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