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그곳 1244m 봉정암.
백담사에서 왕복 12시간.
먼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이 멀어 숨이 차는 일은 없다.
쉬어가면 그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에서는 자주 쉬게 된다.
멀어서가 아니다.
길섶의 모든 풍경이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서이다.
3.5km 정도는
가볍게 걸어줘야 하는 이 길.
영시암
이 길로 들어선 이들이라면
영시암 법당에 삼배를 올릴 기력 역시
충분해야 한다.
영시암을 건너면
비로소 드러나는
설악의 깊은 품
수렴동 계곡
이래서 걷는구나.
이래서 가을을 기다리는구나.
쌍용 폭포
이래서 가을을 걷는구나.
멈추어본다.
뒤돌아본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덧 깔딱고개
이제 봉정암까지 0.5km
숨이 몇번 깔딱 넘어가야
해탈하려나.
그렇게 바위 위에서 오체투지하며
고통스럽게 고개를 넘어서면
내설악 기암괴석군에 둘러쌓인
봉정암을 볼 수 있다.
이곳이
햇살과 바람마저 고요히 머무는
봉정암.
자장율사가 올라올 때까지
며칠내내
허공을 맴돌았다는
봉황은 어디로 갔나.
산령각
석가사리탑 가는 길
봉황이 일러준대로
걸어간다.
가을이 봉황의 깃털처럼 붉다.
내설악 고운 단풍으로 단청한
가을의 봉정암 석가사리탑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구하여와서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중에서도 이 봉정암 진신사리탑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진신사리를 모시고 신라로 돌아온 자장율사가
사리를 모실만한 자리를 찾고 있을 때였다.
자장율사가 설악에 이르렀을 때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설악의 봉우리에서 선회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자장율사가 마침내 이곳까지 찾아왔으나
봉황은 곧 바위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자장율사가 그 바위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는 부처님의 형상을 닮아있었고
봉황이 선회하다 사라진 자리는 부처님의 이마 부분에 해당함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이곳의 인연임을 깨달은 자장율사는
그 바위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봉정암을 세워 살피게 하였다는 것이다.
봉황이 점지한 이곳은
어떤 곳인가.
용아장성, 만경대, 공룡능선
설악에서 가장 험하고 가장 아름답다는 공룡능선
가장 험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곳에서는
바람도 쉬고 햇살도 쉬어간다.
마땅히 공양받을만한 이를 위해
곱게 물드는 가을.
법륜스님 말씀처럼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곱구나.
합장한 바위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 봉정암에서
해야할 일은 하나.
푸르디 푸른 밤하늘 아래
홀로 우뚝한 사리탑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일.
설악에서
푸른밤을 깨어 있는 일.
그것이
지상에서 맞이하는
몇 안 되는 행복.
사라진 줄 알았던 봉황이
그대 등 뒤에서
언제나 선회하며
그대를 지켜주고 있음을
그대가 떠나기 전에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