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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설악산 봉정암

by 산드륵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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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의 새벽은 어느새 밝았다. 오늘은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황의 정상에 맺힌 봉정암 진신사리탑까지 왕복 21.2km, 12시간여를 걸을 예정이다. 산행 전날 백담사에 오후 5시 전에 입실하면 5시 50분경에 저녁 공양이 가능하고, 다음날 봉정암 산행 당일에는 새벽 5시 50분 공양을 간단히 하고 길을 나설 수 있다. 개인 참배객들은 백담사 종무소에 전화해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백담탐방지원센터까지 편안히 걷는다. 만일 봉정암에서 당일 내려온다면 12시간여를 온종일 걸어야 하고, 봉정암에서 1박을 한다면 쉬엄쉬엄 다리를 풀며 걸을 수 있다. 봉정암 예약은 미리 해두어야 안전하다. 겨울철 산행금지 기간이나 단풍철에는 지친 몸을 눕힐 네모난 칸 하나도 없다.

 

 

내설악 백담지구 안내도를 꼼꼼하게 본다. 시작고도 500m 백담사에서 영시암,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1244m 봉정암까지 간다.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

 

 

대청봉에서 백담사까지 백 개의 담이 연이어 푸른 하늘을 담고 있다.

 

 

백담사에서 우연히 만난 화암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맛을 알어?"

어제는 대답을 못했지만 오늘은 대답할 수 있다.

그 맛을 안다. 걷는 맛.

 

 

햇살 돋아나고 산 그림자가 물러서는 아침을 바라보며 걷는 맛

 

 

그렇게 간결한 호흡을 따라 걸으면 영시암

 

 

영시암 부처님께서 길손을 부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산행길 공양을 올리고 나와 잠시 쉬어간다. 백담사에서 1박하던지 아니면 이곳 영시암에서 1박하고 봉정암으로 오를 수도 있으니 인연 따라 움직일 일이다.

 

 

이곳 영시암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미호집』에 실린 「삼연 김창흡 영시암 유허비 三淵先生永矢菴遺墟碑」 에 잘 나와 있다.

 

아, 이곳은 삼연(三淵) 김 선생 휘 창흡(昌翕)이 은거했던 옛터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뜻을 지니고 이름 있는 산수(山水)를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 안에 두루 발길이 미쳤는데, 유독 설악(雪嶽)에 봉우리와 절벽, 담(潭)과 폭포의 승경이 많은데도 그 특출함을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은자(隱者)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내심 가장 좋아하였다 한다.

선생은 기사년의 큰 화란(禍亂)을 만난 뒤로 더욱 속세에 미련이 없어졌다. 그러다 급기야 을유년(1705)에 모친상의 상기를 마치자 마침내 책을 짊어지고 설악산 골짜기 백담(柏潭)에 들어가 3년 만에 비로소 벽운사(碧雲寺) 옆쪽에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얼마 후 소실(燒失)되었다. 기축년(1709)에 벽운사 동쪽으로 몇 리쯤 더 들어가 조원봉(朝元峰)을 직면한 남쪽에 기둥이 아홉인 판잣집을 짓고서 늘 거기서 생활하셨였니, 이른바 영시암(永矢菴)이 바로 이것이다.

암자 북쪽을 틔워 누(樓)로 만들어 고명봉(高明峰)을 마주하게 하였으니 완심루(玩心樓)이다. 그 동쪽으로 백 보쯤에 깎아지르듯이 높은 대(臺)가 있어 옆으로 봉정(鳳頂)을 떠받들고 있는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농환정(弄丸亭)이다. 서남쪽으로 2백 보 지점에 또 무청정(茂淸亭)을 두었고, 또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이 수렴동(水簾洞)인데, 이 또한 설악산에서 최고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어서 조그마한 암자를 얽어두고 멸경암(滅景庵)이라 하였다. 이에 오가며 유식(遊息)하는 곳이 비로소 갖추어져 선생이 바야흐로 즐거워하며 여생을 마치도록 나오지 않으려 하였다.

6년을 지내다 공역(工役)에 이바지했던 유마승(維摩僧)이 갑자기 범에게 물려 죽자, 선생이 마침내 춘천(春川)의 곡운(谷雲)으로 옮겼다. 아마도 이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던 듯한데, 그 후 20여 년이 흘러 암자도 허물어졌다.

아, 선생은 맑고 독특하고 세속에 빼어난 운치로 마음을 살피는 고명(高明)한 학문을 하고 또 천하의 명산을 얻어 귀의(歸依)했으니, 비록 불행히도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10년 동안 산새나 물고기와 어울려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홍쟁소슬(泓崢蕭瑟)이 그득한 곳에서 발명한 것 가운데 필시 몹시 즐겁지만 남에게 고할 수 없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유허(遺墟)마저 깊은 숲속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에 매몰되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선생이 작고한 지 27년에 인제(麟蹄) 수령 이광구(李廣矩)가 둘러보고 장탄식하며 비석을 세워 기록하려고 하였는데, 봉조(鳳祚)가 마침 방백이 되어 그 일에 내심 감동하여 기꺼이 조력하였다.

아, 선생의 고상한 풍치(風致)야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 몇 자의 비석은 때가 되면 결국 갈라질 것이니, 어떻게 계승하여야 뒷날 이곳을 지나는 자가 배회하며 가리키고 탄식하면서 차마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시암의 맥심 커피. 산행에서 만나는 노란 커피맛에 추억이 묻었다. 영원한 화살, '영시永矢'는 허공을 가르고 있는데, 어리석은 이는 허공의 새발자국 찾듯이 옛 생각에만 잠긴다.

 

 

봉정암과 오세암 갈림길. 봉정암 가는 길은 만수폭포 관음폭포 쌍용폭포를 지나 오른다.

 

 

물빛

 

 

산빛

 

 

모두 거두어 수렴동대피소

 

 

왕복 12시간 당일 산행 후에 백담사에서 마을 버스를 타려면 저녁 6시전까지 정류장에 도착해야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는 7시까지 운행하기도 한다. 미리 시간을 확인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졌다. 창건 당시 사명은 한계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계사는 창건 이후에 잦은 화재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날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대청봉에서 한계사까지 이어지는 담의 숫자를 사명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이에 그 담의 숫자를 세어보니 모두 백 개였기에 백담사라 칭하였고 그 이후에 화재가 없었다고 한다.

 

 

거침없는 백담

 

 

연화담

 

 

산빛이 바뀌었다. 걸을만큼 걸었다.

 

 

쌍룡폭포.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닮아 쌍룡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왼쪽은 높이 약 22m로서 봉정암 방향의 구곡담 계곡 상류에서 흘러 내리며, 오른쪽 폭포는 높이 약 46m로서 쌍폭골에서 흘러내린다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3단 폭포로 보인다고 하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

 

 

해탈고개

 

 

깔딱고개로 더 알려졌다. 목숨이 깔딱깔딱한다.

 

 

깔딱을 넘어야 해탈의 세계

 

 

드디어 피안을 넘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 적멸보궁 봉정암. 부처님 친견 전에 미역국부터 먹고 움직이는 사람들.

 

 

봉정암은 내설악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 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구해온 부처님 정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 그 이후 신라 원효대사, 고려 보조국사, 조선 환적 선사, 설정 스님 등이 중창불사를 진행했다.

 

 

설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봉정암. 해발 1244m로 5월 하순에도 설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담사에서 대청봉을 향하는 내설악에 최고의 절경을 이룬 용아장성 기암괴석군에 속한다.

 

 

산령각

 

 

옛 법당 옆으로 올라가야 석가모니 정골 진신사리탑을 만날 수 있다.

 

 

봉정암 불뇌사리탑

 

 

설악의 바위를 기단석으로 삼아 연꽃잎을 열어 5층 탑신을 올리고 석가모니 정골 사리를 모셨다. 날이 좋아 가부좌를 틀기에 좋다. 마음의 결이 고우니 설악의 바람도 곱다.

 

 

용아장성

 

 

공룡능선

 

 

울산바위 넘어 동해안

 

 

내설악

 

 

죽기 전에 한 번은 와봐야 한다는 이곳. 그래도 몇 번은 왔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삼칠일 기도를 올리던 마지막 날, 문수보살이 현신하시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하였는바, 이를 모시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모실 길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순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나타났으니 자장율사는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몇 날 며칠을 쫓아갔다.

 

마침내 봉황은 어느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가 어떤 바위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자장율사가 그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부처님 모습을 닮은 그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둘러있었으니 가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한 길지 중의 길지였다. 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부처님 뇌사리를 봉안한 뒤 오층 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으니, 이곳이 봉정암이다.

 

 

자연암반에 조각한 연꽃잎이 곱다.

 

 

설악 1244m에 더하여 1248m의 가장 높은 곳에 피어난 연꽃

 

 

봉정암 풍경

 

 

바위도 보살, 나무도 보살, 하늘도 보살, 일체가 보살

 

 

적멸보궁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진신사리탑을 받들고 있는 적멸보궁의 연화대

 

 

사리탑 앞으로는 차 공양을 올리는 보현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봉정암에 다녀간 이들, 모두 보살이 되기는 하였나. 하산 후 소식이 궁금한지 바위 틈 다람쥐보살이 오래오래 길손을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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