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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찰

명진스님 오신 날

by 산드륵 202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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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남선사. 불기 2569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의귀리 남선사에서 명진 큰스님 법문이 있다고 하여 다른 때보다 일찍 남선사를 찾았다. 남선사는 명진 큰스님의 상좌이신 도정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신 사찰이다. 도정스님은 평화의 길 제주지부, 연경문화예술원 등을 이끌고 계시다.

 

 

붓다의 선언.

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즉, '깨달은 존재'만이 존귀하다. 요컨대 '깨달은 이'는 '왜곡된 나'라는 것의 뭉텅이인 '중생'들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해결할 것이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

 

 

남선사 향적전

 

 

초파일을 맞아 고운 가사를 입으셨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에 드시는 석가모니 부처님. 고요로 충만한 세계에서 '생명의 인연'을 만나 반짝거리다가 다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대자유의 고요 속으로 돌아간다.

 

 

붓다의 미소

 

 

언젠가 부처님을 만나는 행운이 다가온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꿈을 꾸며 이곳에서 명진 큰스님을 만난다.

 

 

오전 10시. 법요식이 시작된다. 명진 큰스님을 모신 자리이지만 야단법석은 참으로 소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참으로 기쁘고 감격스럽다는 명진스님. 두 손이 저절로 모아진다.

 

 

법상에 오르신 명진스님은 끝없는 성찰을 통해 올바른 판단을 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일갈하셨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큰 틀”이므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정치에 무관심한 업보는 저질스러운 놈들에게 지배당하는 과보를 받는다”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셨다.

 

명진스님 말씀처럼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정직한 사람, 올바르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명진스님 법문을 기억나는대로 정리해본다.

 

 

여기 오실 때 혹시 오기 싫은데 오신 분 있으신가요?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여기에 오겠다고 결정한 것은 누구인가요?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스스로가 선택합니다.

 

모든 것은 ‘내’ 가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결정은 여러분 자신이 합니다. 그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불교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불교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부처님도 이곳에 오는 여러분을 막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나’라는 것이 ‘갑’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정은 자신이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것은 불교 공부를 하는 이유의 출발점이 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름은 실재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얼굴도 모양도 실재적 존재를 나타내주지 않습니다. 본래 진실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 무엇이 ‘나’일까. 가치 기준은 늘 변합니다. 동시대에 살아도 다릅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른 기준이고 가치일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프리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리즘은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정치 상황이 절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저의 프리즘입니다. 그러나 다른 프리즘을 가진 분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30%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프리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을까요? 자신의 프리즘을 버리기 전에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주관적 경험 위에서 형성된 프리즘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입니다. 지옥도 자신이 선택하고 천국도 자신이 선택합니다. 자신의 발걸음으로 지옥도 가고 천당도 갑니다.

 

운문문언선사가 이런 법문을 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날, 내가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방에 때려죽여서 개가 씹어 먹게 던져주었을 것이다.” 무서운 법문을 했습니다. 초파일에 수많은 신도들 앞에서 이런 법문을 했습니다. 운문종 종파를 개설한 운문종의 조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중국 온천지가 운문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운문은 “운문 이전에도 부처님을 이렇게까지 찬탄한 사람이 없었고 운문 이후에도 부처님을 이렇게까지 찬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찬탄받게 됩니다. 모두가, 스스로가 부처님을 깨달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단하선사가 어느날 어느 절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방이 추웠어요. 법당에 들어가보니 목불이 있어서 그 목불을 가져다가 아궁이 앞에서 잘 뽀개어 군불을 때고 잘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지스님이 보니 법당 부처님이 없어진 거예요. 급히 찾아보니 한 객승이 목불로 아궁에 군불을 때고 잘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지스님이 호령하자 단하선사께서 가로되, “아, 그렇다면 내가 부처님을 화장한 것이니, 이제 그 부처님 사리를 찾아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주지스님이 대노하여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느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단하스님께서 말씀하셧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 부처냐!”

 

형상의 부처가 아닌 참부처.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주관적 에고가 빠져나가고 ‘참부처가 오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부처가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견해, 프리즘을 빼내어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견해, 각자의 부딪치는 견해를 버리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나의 견해’는 불교적 용어로 ‘업장’이라 합니다. 즉 업장을 소멸하고, 진리 앞에서 나의 잘못된 견해를 버리는 것. 그것이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아인쉬타인은 큰 질문이 있어야 큰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허공은 어디에서 끝날까.” 등등의 큰 물음 앞에서 우리들의 갈등은 부질없습니다. 나를 비우는 일, 내가 갖고 있는 주관적 견해를 비우고 불성이 깃들여진 자리를 바라보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시대적 견해를 잘 고찰하고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 자리에 부처의 씨앗을 심게 되니 오늘이 바로 부처가 되는 날입니다. 왜 우리가 남을 흉내내며 살아야 합니까. “장부에게는 충천한 기운이 있으니 여래가 간 곳을 따라가지 않겠다.” “나는 내 길을 가겠다.” 라는 큰 포부를 가지고 그 길을 끝없이 질문하여 걸어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말은 뗏목과 같으니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

“사막에서도 뗏목을 지고 가야겠느냐.”라고 하면서 끝없는 성찰을 강조하신 부처님. 스스로마저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께 빌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길을 떳떳이 걸어가기 위한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 길 위에서 여러분을 만나 참으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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