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벗이라기보다는 스승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초록빛 바람,
멀리 퍼지는 뻐꾸기 울음,
부드러움에 마음까지 흔들리는 오래된 솔잎길들......
그러나 제주의 오름들은
스승이라기보다는 벗이라는 생각이 짙었습니다.
성불오름도 처음에는 그러했습니다.
동부산업도로를 타고 대천동 사거리를 지나 성읍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행정구역상 송당리의 끝지점에
성불오름이 나타납니다.
해발 362미터의 낮은 오름입니다.
이 오름은
고려시대 사찰터로 추정되는 성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성불오름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보면
동쪽 봉우리와 서쪽 봉우리로 나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동, 서 봉우리 사이에
계곡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계곡 중턱에는 성불새미[成佛泉]라 불리는 샘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철조망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갑니다.
산책하기에는 이만한 길도 없습니다.
완만한 경사가 발목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이때문에도 저는 이 오름을
스승이라기보다는 벗이라 생각하게 되었던 것같습니다.
철조망에는
탈출을 꿈꾸던 망아지들이 부딪히면서
한 웅큼씩 뽑힌 털들이
지친듯 철길 따라 무심히 이어져 있고
억새들이 모두 사라진 들판에는
목초들만이 거친 바람에 헝클어져 있습니다.
철조망이 끝나는 곳에서 숲으로 접어들어
저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이 성불오름에는 저러한 오솔길이 군데군데 두 갈래 길을 만들고 있는데
성불새미를 만나려면 윗길을 버리고
반드시 아랫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아예 버리십시오.
어차피 그 길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보면 인생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오름에서도 뻐꾸기 울음은 피안의 소리처럼 계속 울려 퍼지고
이름모를 흰꽃들이 여기저기서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오는 길이 너무 편해서일까요.
자꾸 한눈 팔기 좋아하는 벗이
뒤따라 오다가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이곳의 오솔길은
이처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비탈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게 인연일까요.
일어나지 못한 벗과 함께
잠깐 저 꽃나무 아래 앉아있으려니
그제야 세찬 물소리가 마음에 들어옵니다.
바로 성불새미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사진 왼쪽 검은 숲 구멍이 보이시죠.
성불새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연결된 호수는
오름 아래 목장에서 이용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 같습니다.
예전, 이 성불새미는 성읍 주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으로서
5-6km나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물을 길러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돌을 쌓아 우물을 조성해 놓았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립니다.
오름 어디에서 이런 물이 샘솟는지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시원하고 맑은 옹달샘
두 손으로 떠 먹고
그런데 성불새미 위로 올라가니
양애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옛날 할머니댁 텃밭에서 자라고 있던 그 양애입니다.
분명 언제적일지 모를 사람의 흔적입니다.
야생의 양애들만 넓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디에 성불암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위로 더 올라가 보았습니다.
바로 위쪽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숲이 보였습니다.
꽃을 따라 간 길인데
저 꽃더미 뒤쪽으로
무덤이 숨어있었습니다.
이 무덤의 산담 주변에서 기와편들도 발견되어
혹 이 근처가 성불암이 있었던 자리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는데,
그 사실을 증명하듯 주변은 평평한 지형으로
계곡의 다른 곳과는 차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성불오름 정상에는
합장한 스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고 하여
큰 기대를 갖고 정상까지 훠이훠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웬 깃대가
성불오름 정상에 박혀 있었습니다.
정상 표지인가 했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습니다.
빨간 천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골프장의 기점이니 절대 만지지 마시오'
기가 막혀 오름 서쪽을 쳐다보니
골프장이 한창 조성 중인 것이 보였습니다.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동쪽에 있는 오름들은
아직 무사하신가.....
안부를 묻는데
거친 바람이 한차례 울고 갔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저 크고 작은 오름들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산에서 사는 바람도
간절히 바라고 있나 봅니다.
산 정상의 바위입니다.
이 바위 정수리 위에 골프장 기점 표지가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바위 옆쪽에는 작은 동굴도
잡목에 가려져 있습니다.
붉은 송이로 이루어진 이 바위는
오래 고독과 벗하였어도
오히려 당당한 것이
솔들도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누룩낭에도
이때를 놓치면 보기 어려운
귀한 꽃이 피었습니다.
한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성불오름.
그러나 이 오름 역시
벗이 아니라 저에게는 스승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 가 보시면 압니다.
무던하게 맞아 주었지만
보낼 때는
크게 보는 법도 가르쳐 줍니다.
오르는 길이 편하다고
한 눈 팔지 말고,
한나절 잘라내어 다녀 오시면
일주일은 넉넉히
맑은 마음 간직할 수 있는 곳.
아마 님이 찾았을 때에도
뻐꾸기 소리, 맑은 계곡 물 소리
여전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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