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서늘한 아름다움은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면
고달픈 인생도
그리 안타까워 할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효돈천의 숨겨두고 싶었던 비경
예기소(藝妓沼)로 가는 길에서
저는 그런 맑고 서늘한 아름다움과 만났습니다.
예기소는 효돈천 영천사지에서 하류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계곡을 통해 영천사지에서 예기소까지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기소로 가려면 길을 잘 찾는 벗이 꼭 필요합니다.
길동무와 함께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하례2리 방향으로 가다가 제2효례교를 지나면
우측에 남제주군 농업기술센터가 보입니다.
여기에서 100m 정도를 더 가면
하례2리(학림동)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는데,
이 버스 정류장 왼쪽으로 난 길을 50m 정도 가서
다시 왼쪽 과수원 사이로 난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면
사진과 같은 강아지 형태의 바위가 나타납니다.
고인돌일 수도 있는 이 바위 밑으로 내려가야
비로소 숨어있던 계곡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효돈천은 영천오름과 칡오름을 만나면서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오른쪽으로 이어진 계곡의 모습입니다.
왼쪽 계곡의 모습입니다.
계곡 가운데에는
흔들바위처럼 생긴 큰 바위가 이정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이 큰 바위 위로는
작지 않은 키의 저도 올라가기 힘들었는데
누군가는 기어이 바위에 올라가 이름들을 새겨놓았습니다.
저보다 먼저 찾아왔던 그 누군가의 흔적이겠지요.
물살도 저렇게 굽이돌며
바위에 세월을 새기고 있습니다.
계곡에는 이런저런 모양의 큰 바위들이
나그네 발길을 붙드는데
그중 이 바위는
마치 어린아이의 두 발을
꼭 붙들어 놓은 듯한 형상입니다.
계곡의 풍경에 붙들렸던 발목을
다소곳이 붉은 얼굴을 내민
연산홍과 시선이 마주쳐서야 빼냈습니다.
예기소의 슬픈 사연을
저 붉은 연산홍도 알고 있나 봅니다.
예기소(藝妓沼)입니다.
이곳이 예기소라 불리는 데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옵니다.
원래 이곳은
조정의 관리들이
해마다 목장의 말 사육 상태를 점검하러 내려왔을 때
정의현감이 그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의현감이 베푼 주연에서
절벽과 절벽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타고
검무를 추며 건너오던 기생이
발을 헛디뎌 그만 이 소(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그후 이곳에서의 향연은 금지되었고,
사람들은 예기(藝妓)가 빠져 죽은 소(沼)라 하여
이곳을 예기소(藝妓沼)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이 모두 빠져 버렸을 때의 예기소 모습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직접 찾아가 보시면
그 깊이에 공포심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산책님들께 보여 드리고 싶어
비가 와서 물이 찼을 때의 모습과
물이 빠진 후의 모습을 모두 찍어봤는데
사진에서는 그 깊이가 잘 표현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V자 계곡 오른편 바위를 잘 보십시오.
마치 사람이 바위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시나요?
바위 얼굴을 자세히 보여 드리려고
사진을 찍어왔는데
사람의 얼굴 형상은 간데 없고
붉은 눈동자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
예기소 뒷쪽
V자 계곡 입구입니다.
이 V자 계곡 뒤편에도
맑고 시린 효돈천의 풍경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절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고
넘나들다가는
예기(藝妓)의 운명을 그대로 따를 수 있으니
절대 시도해선 안됩니다.
예기소 우측 계곡 옆으로 올라가든지,
아니면 처음에 과수원으로 들어왔던 입구로 돌아가서
반대편 골목길로 계속 들어가시면
예기소 뒤편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소(沼)들이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는 이곳엔
햇빛도 한줌씩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오래도록 홀로 앉아 있으면
마음 속에 한 줄기 평화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이곳에서 아예 바위가 되어 버린 사람도 만날 수 있습니다.
햇빛도 조심스러워 깨우지 못한
이곳 효돈천의 신비로움 속에서
산책님들
너무 오래 홀로 있지는 마십시오.
저 바위처럼 끝내 저 곳에 머무르고 싶어지실 테니까 말입니다.
예기소가 아니더라도
효돈천의 곳곳에는
아직도 자연의 신비로움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더욱이 비 온 뒤에 길을 떠나신다면
그 신비로움을 제대로 만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
맑고 서늘한 풍경이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곳.
이곳 예기소를 찾으실 때는
가볍게 걸칠 수 있는 외투 하나와
혼자 걸을 마음도 준비하시길
먼저 다녀온 나그네가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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