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

DHAMMA DISCOURSES...5

by 산드륵 2009. 4. 20.
728x90

5. 너의 몸이 법구처이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너의 몸이 법을 찾는 장소이다.”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에 의해서 로히따사 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에서 사람은 그의 몸에서 사성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1.고제(괴로움의 진리 Dukkha-sacca):첫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통입니다. 태어남은 고통이고, 슬픔, 비탄, 통증, 절망은 고통입니다. 늙음은 고통이고, 죽음도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헤어짐, 싫은 이와 함께 하는 것,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 등도 고통입니다.


2.집제(괴로움의 원리의 진리 Samudaya-sacca):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갈애입니다. 갈애는 새로운 재생을 낳고 탐욕으로 묶여집니다. 갈애란 감각적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 또는 절멸에 대한 갈애 등을 말합니다.

 그 중 '존재에 대한 갈애'는 실재의 생명을 구성하고 영원하며 심지어 사후에도 계속된다고 믿어지는 지속적 자아가 육체적 정신적 과정과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자아, 즉 '실재, 영혼, 인성 등 존재에 대한 믿음'이 존재에 대한 갈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두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인 고통의 기원입니다.

 비존재 또는 자기 적멸(사라짐)을 향한 갈망은 우째다-디티에 의해서 야기됩니다. 이것은 죽을 때 모든 것이 해체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단멸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과 사후에 어떤 좋거나 나쁜 공덕의 결과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불건전한 행위를 즐기도록 유발합니다.

 이러한 감각적 갈애, 존재의 갈애, 비존재(적멸-사라짐)의 갈애가 고통을 야기하는 이른바 고통의 기원(원인)입니다.


3.멸제(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Nirodha-sacca):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통의 소멸입니다. 그것은 고제와 집제의 소멸이며, 곧 열반의 깨달음(각성 realisation)입니다. 모든 이는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분투해야만 합니다.


4.도제(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Magga-sacca):네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고제와 집제의 소멸과 멸제의 실현으로 이끄는 성스러운 8개의 길, 8정도를 뜻합니다.

 도제란, 정견(正見, 올바른 이해), 정사(正思, 올바른 생각), 정언(正言, 올바른 언행), 정업(正業, 올바른 행위), 정명(正命, 올바른 삶),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정념(正念, 올바른 알아차림), 정정(正定, 올바른 집중력)입니다. 마가(도)의 이러한 8개의 요소들은 반드시 계발되어야 합니다. 여기 우리 수행자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8정도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행선에서 왼걸음을 놓을 때 왼걸음을 놓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아차림이 정견이고, 걷는 행위를 알아차리는 마음은 정사이고, 모든 걷는 행위를 위한 노력은 정려, 모든 행위에 대한 순수한 앎은 정념(알아차림), 반복적인 걸음과 알아차리는 마음의 계속적인 일련의 의식은 정집중입니다. 이것들은 8개의 푸파방가 정도인데 수행자가 8개를 받을 때, 정언과 정행은 이미 준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선을 할 때, 수행자는 모든 걸음을 알아차리면서도 8정도를 계발합니다. 또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매순간마다 8정도를 계발합니다. 그와 같은 명상을 매순간마다 반복해서 수행하면 수행자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의 소멸을 성취하고 열반의 실현 즉 멸제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법문의 주제 “너의 몸이 법구처이다.”라는 말씀에서 4성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법을 찾는 것은 그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강도 깊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법을 찾는데 있어 올바른 방법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파리야티(교학 연구), 파티파티(수행 실천), 파티웨다에 대한 장이 있습니다. 파리야티 없이 파티파티가 자랄 수 없고, 파티파티가 성장할 수 없고, 파티웨다도 성취될 수 없습니다. 파리야티는 연못을 만들 때 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파티파티는 물과 같고, 파티웨다는 연못입니다. 제방을 쌓지 않으면 물이 저장될 수 없어 연꽃이 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파리야티(교학연구)는 약을 만드는 처방법입니다. 파티파티(수행 실천)는 치료이고 파티웨다는 치유(회복)입니다. 처방이 없으면 치료를 할 수 없고 치유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방법의 정도를 가는 기준이 됩니다. 올바른 길을 발견한 후 두 번째 기준은 그것을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이란 성취될 수 없습니다. 법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길에 의거해서 꾸준함을 가지고 강도 높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이란 무엇인가?  지각을 포함한 몸과 마음의 집성체 5온이 그것입니다. 몸의 특질은 약 6피트 길이에 10인티 넓이를 갖습니다. 법을 발견한다는 것은 관찰하는 동안에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몸이 법구처”란 의미는 그 자신의 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강도 높게 관찰함으로서 4성제를 깨닫는 것입니다.

 

 앙구타라 경전에 나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처님 시절에 부처님께서 사바티 주의 제타바나(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로히타사란 범신이 한 밤에 빛나는 몸으로 나타나서 부처님께 존경을 표한 뒤에 적당한 자리에 앉은 후 다음과 같이 질문을 올렸습니다.

 “오, 세존이시여! 어떤 이가 생로병사가 없는 우주의 끝까지 걸어서 갈 수 있습니까? ”

 부처님께서 로히티사 범신에게 답하셨습니다.

 “생로병사가 없는 우주의 끝이란 열반을 의미하며, 거기까지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범신의 질문한 '우주의 끝'은 오카사로카(환경적 세계)의 끝이고 부처님의 답변은 상카라(행, 마음의 형성)의 끝을 말합니다. 상카라로카(실제의 세계)의 끝과 오카사로카(환경적 세계)의 끝을 잘 음미하여야 합니다.

 로히타사 범신은 계속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존경스런 답변은 매우 놀라우며 비범합니다. 우주의 끝이 열반을 의미하며 도보 여행으로는 닿을 수 없다는 말씀은 아주 훌륭합니다. 내가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옛날에 로히타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냥꾼의 아들이 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운둔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숲 가운데에서 운둔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초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초능력으로 곧바로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나의 능력을 묘사해도 된다면 어떤 활을 잘 쏘는 사림이 쏜 화살이 팜나무의 그늘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시간 동안 우주 전체를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또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걸음은 너무 커서 한 걸음으로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주 끝까지 여행코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끝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식사와 화장실을 위한 시간만 남겨두고 모든 힘과 재빠름으로 100년 동안 마음대로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오카사로카의 끝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우주의 끝에서 죽었습니다.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 여행과 죽음 뒤에 나는 범신의 세계에 태어났고 로히타사 범신으로 알려졌습니다."


 로히타사가 범신의 세계에 태어났을 때 로히타사는 그의 과거를 기억하고 부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생로병사가 없는 오카사로카의 끝까지 여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생로병사와 재생이 없는 상카라로카는 그의 경험으로 확인컨대 걸어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이 실현되지 않는 한 생로병사가 없는 곳은 없고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고통의 종식은 열반의 실현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법을 찾는 것입니다. 몸 안에서만이 4성제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고제는 5온입니다. 여기 우리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것은 고제입니다. 왼걸음, 오른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고제입니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도 고제이고, 보고, 듣는 것 또한 고제입니다. 수행자가 수행하기 전에는 이것을 고제로 알지 못하고 갈애에 의해 잘못 인도된 감각적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보고, 듣는 것 등을 즐거움으로 간주합니다. 보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 5관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감각들도 좋고,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이러한 감각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은 갈애라는 집착입니다. 고제와 집제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 수행자는 도제를 계발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명상의 수행은 도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알아차림은 도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수행자는 도제를 계발하는데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해서 종국적으로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기능을 멈추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열반의 실현이며 그와 같은 실현은 그 자신의 몸 안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관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너의 몸이 법구처’라고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비평에 의한 잘못된 추론에 대해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4성제는 자신의 몸 안에서 발견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4성제가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노력도 수행도 필요 없습니다. 이 전제는 옳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들은 깊고 어렵습니다. 어떤 가르침들은 법에 능통한 사람들에 의한 올바른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면, 티크나무 숲은 티크 숲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숲에서는 오직 티크 나무만이 자라고 다른 지역에서는 티크 나무가 자랄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종의 나무도 티크 숲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예는 어떤 나라의 대통령의 등장했다는 보고가 있었을 때, 그것이 대통령 혼자만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보좌관, 경호원, 수행원도 함께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람은 대통령이며 그의 지명이 발표되고 그것은 그를 추종하는 모든 수행원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파다마 방법입니다.

 또한 팔라누마나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를 앎으로서 원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개울물이 많은 물로 홍수가 날 때 개울 상류 방향에 큰비가 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홍수는 결과이고 상류에 비가 내린 것은 원인입니다.

 세 번째 예는 아타빠냐 방법입니다. 그것은 문장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데와다타는 낮에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르다.’란 문장을 조사해 보면 ‘그가 밤에 먹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성제가 몸에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4성제가 몸 안에 고체의 형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제, 집제는 몸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나 도제가 계발되어야만 합니다. 그 원인, 즉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관찰을 계발함으로서 그 결과 즉 소멸, 열반의 실현이 이루어집니다.


 결론으로서 만약 수행자가 4성제를 인식하기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몸의 물질과 마음을 관조해야만 합니다. 그 자신의 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종국에는 고통의 소멸, 열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들이 ‘너의 몸이 법구처’란 법에서 부처님에 의해 설명된 것처럼 그 자신의 몸을 관찰해서 4성제를 발견하고 가능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고통의 소멸을 실현하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장보살본원경  (1) 2024.08.12
DHAMMA DISCOURSES 6...끝  (0) 2010.03.05
DHAMMA DISCOURSES...4  (0) 2009.04.14
DHAMMA DISCOURSES...3  (0) 2009.04.07
DHAMMA DISCOURSES...2  (0) 2009.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