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4가지 유형의 사람들
오늘 법문의 주제는 인도 사바티주의 왕 파세나디코살라 왕에게 부처님께서 설명한 ‘4가지 유형의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강론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설하셨습니다.
1) 어둠에서 어둠으로
2) 밝음에서 어둠으로
3 )어둠에서 밝음으로
4) 밝음에서 밝음으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더욱 상세히 설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낮은 계급에서 태어나고 외모가 추하고 건강이 좋지 않고 장님이거나 벙어리이거나 말이 서툴거나 불구이고 먹을 음식 입을 옷 거주할 집 건강을 위한 약품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고통스런 상태에서 태어났지만, 회개하지 않고 살인이나 도둑질 성적 비행 거짓말 음주와 같은 불건전한 행위에 탐닉합니다. 그는 도덕적 정화를 준수하지 못합니다. 회개 없이 그와 같은 불건전한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낮은 욕계의 세계에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으로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어떤 사람은 위에서처럼 육체적 결함을 가지고 가난하게 태어납니다. 고통스럽게 태어났지만 그는 회개심을 느끼고 전생에서의 불건전한 행위 때문에 그 결과로 이와 같은 고통스런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정신적 태도를 개선합니다. 도덕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의 능력껏 할 수 있는 모든 건전한 행위를 하고 공덕 있는 보시 등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게다가 그는 건전한 생각과 언행과 행위를 실천하고 살인 도적질 성적 비행 거짓말 음주를 삼갔습니다. 그의 지위가 점점 상승해서 어떤 이가 땅 위에서 의자 위에서 살다가 말 위를 달리는 것으로 장식된 코끼리를 모는 것으로 완전히 장식된 집에서 사는 위치로 점점 격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정신적 방식을 이해심 있게 개선하는 사람은 확실히 건강하고 부유한 환경을 가진 더 나은 삶을 획득하고 심지어 천신의 세계에 닿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세 번째 어떤 사람은 잘생긴 외모, 건강, 의식주와 의약품을 걱정할 필요 없는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사치스런 삶을 이끌어 갑니다. 운 좋게 태어났지만 도덕을 결여해서 건전한 생각 언행 행위의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인 도적질 성적 남용 거짓 음주와 같은 해악을 저지르기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타인을 하찮게 여기고 동정심을 전혀 계발하지 않습니다. 전생을 통해서 그와 같은 불건전한 행위를 저지름으로서 그의 지위를 마치 완전히 장식된 집에서 살다가 장식된 코끼리를 모는 것으로 말을 모는 것으로 의자에 앉다가 마지막에 땅의 수준으로 점차 떨어집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그는 사후에 낮은 세계, 욕계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네 번째 어떤 이는 위에서처럼 삶의 필요한 모든 필수품을 완전히 부여받은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높은 기준의 삶을 즐기지만 멀리 볼 줄 알고 지적이어서 그이 현생의 부유함과 쾌적함이 전생의 건정한 행우의 덕택임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는 건전한 생각과 언행, 행위를 실천하고 도덕을 준수하면서 필요한 이에게 자선하는 공덕의 방법을 계속 실행합니다. 5계를 준수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있고 동정심을 계발합니다. 그와 같은 금욕적인 삶의 방식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의 지위는 마치 땅에서 사는 이가 의자에 앉게 되고 말을 타고 장식된 코끼리를 타고 잘 장식된 집에 살게 되는 것처럼 더 높이 격상되고 그는 반드시 높은 천신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거나 인간 세계에서는 적어도 영향력 있는 위치에 태어납니다.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은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들의 현재 위치를 상기해 봅시다. 수행자들은 전생에서의 건전한 행위의 결과로서 현생에서 정상적인 건강, 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복합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 모두는 편안함을 부여받았고 대념처경의 통찰 명상 수행의 경험이 있는 스승의 지도 아래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수행할 수 있는 마하시 명상 센터에 올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삶의 밝음을 성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이 밝음 안에서 항상 존재하가 위해서 여러분 모두는 사는 기간 동안 건전한 행위를 엄격히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건전하고 불건전한 행위에 모두 탐닉하면 당신의 미래의 운명은 밝을지 어두울 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높은 나무 위에서 종이 한 장을 떨어트리면 그 종이는 땅 위에 또는 물의 표면에 가시밭 위에 또는 진흙에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도의 지혜를 획득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의 존재에 대해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도의 지혜를 획득한 성인만이 확실하게 밝음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대념처경 서론에서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 명상 또는 통찰 명상의 4부분을 최대한의 열정적인 열망을 가지고 수행하는 자만이 현생에서 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육체에 대한 관찰(명상)
2) 감정 또는 감각에 대한 관찰
3) 마음에 대한 관찰
3) 마음의 대상들 또는 조건들에 대한 관찰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은 신성한 도의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여 노력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들이 다행히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동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도지를 획득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는 것은 충고할 만 합니다. 도지를 획득한 뒤에 모든 불건전한 행위들은 그 자체로 극복되고 당신은 확실히 밝은 인간 세계나 천신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고 앞으로의 많은 생애에서 건전한 행위를 축적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의 소멸, 열반의 소중한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수행자들은 모든 불건전한 생각, 언행을 극복하고 정화의 단계를 통한 통찰의 지혜를 발전시켜 해탈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알아차림 명상 수행을 꾸준하고 계속적으로 수행해서 가장 빫고 빠른 방법으로 열반의 영원한 평화를 획득할 수 있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7. 분명한 이해에 관한 법문
오늘 법문의 주제는 분명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완전히 알아차림 또는 명백한 이해력을 가지고 육체적 현상에 관해 관찰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마음차림의 주요 특징은 사티(마음차림, 알아차림, 조심)입니다. 거기에는 4가지 구분과 4가지 특성, 그리고 제거하는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4가지 구분
1 육체에 대한 관찰
2 감정에 대한 관찰
3 마음에 대한 관찰
4 마음의 대상에 관한 관찰
다른 말로 하면
1 몸의 현상에 대한 조심스런 알아차림(이름붙임)
2 느낌에 대한 조심스런 알아차림
3 망상하는 마음에 대한 조심스런 알아차림
4 봄, 들음, 고통침과 같은 마음의 대상에 대한 조심스런 알아차림
4가지 특성에 대한 관찰
1 무상
2 고통(불만족)
3 무아(조절할 수 없는 특성)
4 혐오성
제거하는 4가지 방법
1 무상에 의해 유상을 제거하는 것
2 고통에 의해 행복을 제거하는 것
3 무아에 의해 유아를 제거하는 것
4 혐오성에의해 수바(쾌락)를 제거하는 것
부처님께서는 몸에 대한 관찰을 14가지 종류로 구분하셨습니다.
1 들숨과 날숨에 대한 관찰
2 몸의 자세-서 있음, 걸음, 앉음, 누움
3 의식의 명료성으로 모든 몸의 현상을 알아침
* 마하시 명상 방법은 이중 2,3에 근거함
4 몸의 32가지 부분에 대한 관찰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막, 비장, 폐, 창자, 장간 막, 목구멍, 배설물, 뇌, 담즙, 담, 고름, 피, 땀, 고체의 지방, 눈물, 액체의 지방, 타액, 점액, 유동적인 활액
5 지수화풍이라 불리는 4대 요소에 대한 관찰
6 불결함(혐오, 부정)이란 명상의 주제라 불리는 시체에 대한 관찰(시체에 대한 9가지 혐오)
따라서 몸에 대한관찰은 14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법문은 의식의 명확성, 분명한 이해라 불리는 세 번째 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몸의 4가지 자세(행주좌와)에 관한 관찰뿐만 아니라, 가고 옴에 있어서, 앞을 보고 뒤를 봄에 있어서, 몸을 구부리고 뻗을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 대소변을 볼 때 잠 잘 때나 깨어 있을 때, 말할 때나 침묵하거나 분명히 의식하고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몸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갈 때 수행자는 분명한 의식(알아차림, 조심)을 가지고 해야만 합니다. 즉 알아차림 없이 앞뒤로 가서는 안됩니다. 수행자는 앞으로 가건 뒤로 가건 분명히 의식하면서 그가 하는 동작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앞으로 움직이는 것만을 알아차림 하고 뒤로 움직이는 것은 무시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움직이는 것은 앞으로 움직임’이고 ‘뒤로 움직이는 것은 뒤로 움직임’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똑바로 볼 때나 옆을 볼 때도 ‘똑바로 봄, 똑바로 봄’, ‘옆을 봄, 옆을 봄’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몸을 숙이거나 펼 때 ‘폄, 숙임’이라고 알아차리고, 마시거나 식사할 때와 같은 일상 생활에서도 손을 뻗거나 구부리는 동작이 있는데 그것도 상세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사를 입을 때도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걸으면서 옷을 입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 가지 일이 같이 알아차림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선을 할 때, 가사를 다시 입거나 옷 매무새를 고칠 때는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단계적으로 바꿔 가되 각 단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스님들에게 있어 겉 가사를 걸치거나 발우의 위치를 바꿀 때도 걸음을 멈춘 뒤에 해야 합니다. 일반신도들도 옷 매무새를 고치거나 머리를 묶을 때 걸음을 멈춘 뒤 알아차림 하면서 해야 합니다.
마시고, 식사하고, 씹고, 맛볼 때도 반드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식사 시간에 식탁에 앉고, 음식을 바라보고, 수저를 들고, 음식을 모아 담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오고, 입을 벌리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반드시 모두 알아차림 되어야 합니다. 식사 시간에도 수행자는 손동작을 절제 있게 유지하고 눈을 아래로 깔고 식사해야 하며 ‘씹음, 씹음’, ‘삼킴, 삼킴’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을 이용할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림 되어야 하고, 따라서 알아차림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목욕할 때 각 단계의 동작들, 양치질하거나, 몸에 비누칠하거나, 물을 뿌리는 동작들을 모두 상세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침에도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 상세한 동작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깨어나고 앉고 서고 걷고 멈추고 하는 동작들도 상세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잠잘 때도 틀에 박힌 대로 들어가 잠자지 말고 방으로 돌아옴, 자물쇠를 염, 문을 염, 불을 켬, 모기장을 침, 슬리퍼를 벗음, 침대로 들어감, 드러누움, 눈을 감음, 그리고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 등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와 같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알아차림이 선명해지면 수행자는 잠에 빠지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명상을 오랫동안 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날카롭지 않으면 잠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한밤중에 깨어 있다면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몸의 누움, 닿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림이 선명해지면 잠에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걱정하지 말고 계속 알아차리십시오. 다음날 아침에 숙면을 취한 것처럼 상쾌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잠에 빠지면 알아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잠든 사람은 알아차림의 기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알아차리는 과정이 다시 필수적이 됩니다. 눈을 뜨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일어나려고 함, 담요를 접음, 침대를 정돈하는 것 등을 단계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장실로 갈 때, 수건과 칫솔과 비누를 가져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 등을 단계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깨어나는 시간부터 잠자는 시간까지 어떤 것도 빠트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 수행자는 매우 날카로운 알아차림을 가진 모범적인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방심 상태로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필요한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그만 두십시오. 조심스런 알아차림의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명백한 이해가 관찰됩니다.
4가지 종류의 분명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목적을 평가하는 것에 관한 의식의 명료성, 어떤 이야기나 목적에 관여하고 있을 때 그것이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개인적 이점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이익이 없으나 여러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현재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거나, 현재에 이익이 안 되도 미래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이나 일은 수용될 수 있고 행해져야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떤 일이 개인적인 이익도, 도는 다른 이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일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수행 초심자가 수행에 진보를 이루면 신념이 발전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공양을 올리고자 하거나 봉사 하고자 열망하나 그것은 현재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와 같은 생각은 멈춰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비록 어떤 일이 옳거나 이익이 되더라도 그 일이 적당한지가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일이 옳고 이익이 되면 목적의 적당함을 기다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와 같은 서두름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언행마저도 그것이 잘못된 시간이나 잘못된 청중에게 행해지면 유익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언행을 위한 범주를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열거하셨습니다.
1) 옳고, 유익하고 기쁨을 주는(듣는 이에게)
2) 옳고, 유익하나 기쁨을 주지 않는
3) 옳고, 유익하지 않으나 기쁨을 주는
4) 옳고, 유익하지 않고 기쁨을 주지 않는
5) 그릇되고, 유익하지 않으나 기쁨을 주는
6) 그릇되고, 유익하지 않고 기쁨을 주지 않는
6째 가운데 1)과 2)만이 말해져야 합니다. 2번째 발언은 오직 적절한 때에만 행해져야 합니다. 사용되는 단어들도 또한 중요합니다. 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무례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에서 일상적인 관습이 다른 국가에서는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장소, 시간을 고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고려함이 사파야 삼파쟈나, 적절함에 대한 분명한 이해입니다.
3. 세 번째는 고짜라 삼파쟈나, 영역에 대한 분명한 이해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 자신의 영역이라면 사람은 힘 있게 적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그 자신의 영역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수행자의 영역은 마음차림의 영역입니다. 마음차림을 항상 수행하는 것은 그 자신의 영역 내에 사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마음차림 없이 산다면 자칫하면 탐진치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네 번째는 동요함이 없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계된 행위에 대해 착각이 아닌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차림 수행을 하기 전에는 내가 걷는다, 내가 한 걸음을 딛는다, 내가 잔다, 내가 본다 등등의 착각 속에서 인식합니다. 수행자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조심스럽게 알아차림으로서 마음차림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물질과 마음을 알게 됩니다. 걷는 것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서 걷기 전에 걸으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걸음은 결과입니다. 수행자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 후에 수행자는 현상들의 해체와 소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나서 수행자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 등의 무상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행자의 진보에 따라 수행자들은 삼법인(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통찰의 지혜는 마음차림 명상을 통해서 획득되며, 이것을 아삼모아 삼파쟈라라 합니다. 수행자들이 4개의 명백한 이해를 수행하고 준수할 때 적절한 시기에 도과를 성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용하고 그에 따라 수행하여 4개의 삼파쟈나를 성취하고 적당한 시기에 모든 고통의 소멸, 평화롭고 지복의 열반을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경험하시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8. 명상의 유익함
오늘 법문은 명상 수행의 유익함입니다. 명상 수행을 통해서 생기는 이익의 상세함이 논문에 설명되었습니다. 한때 어떤 천신이 부처님께 공손히 다가와서 확증된 방식으로 그의 견해를 표시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저의 의견을 표한다면, 저는 모든 중생들이 그들의 가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장 많은 소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햇빛은 우주에서 가장 밝은 빛이며, 물이 담긴 것 중에서는 바다가 가장 크고 광대합니다.”
그는 4개의 진술로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전통적인 진리처럼 보입니다. 예,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은 팔이나 어깨나 머리에 이고 다닙니다. 심지어 그들이 자기 몸에다 똥이나 오줌을 싸더라도 화내거나 혐오감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자비심을 부어 줍니다.
따라서 이 천신은 관찰로부터 중생이 그의 자손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추론했습니다. 가장 많은 소떼를 소유한 이는 가장 부자라는 두 번째 관찰은 또한 실제적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인도인데, 그곳에서는 소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힌두교의 문화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단백질을 얻기 위한 자연적 자원은 우유였습니다. 버터, 요구르트, 치즈 등이 영양분을 얻기 위해 우유로부터 추출됩니다. 그러므로 힌두교 사람들은 소를 많이 키우고 소를 많이 소유한 사람을 부자로 간주합니다.
햇빛이 가장 밝다는 그의 진술도 사실인 듯 합니다. 왜냐하면 전기 빛이나 건전기 빛 또는 다른 빛 등은 밝기에 있어서 햇빛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호수 가운데 바다가 가장 크고 넓다는 말도 아주 그러듯 합니다. 그리고 그의 진술의 적절함은 마치 전통적 진리처럼 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의 상식적 지식과 전지한 부처님의 성스런 지혜 사이의 총명함의 차이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천신의 말이 모든 측면을 고려해 본 후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반대 진술로서 천신에게 응답하셨습니다.
1) 모든 중생은 그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2) 가장 부유한 이는 가장 많은 양의 곡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3)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4) 비와 샘물이 바닷물의 주요 원천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진술을 성명하셨습니다. 천신의 주장은 부처님의 그것과 비교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을 사랑하지만 시간이 오면 그들 사이에 차이점이 생기고 그들의 자손들은 자신의 길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들이 다양한 이유에서 그들의 자녀들을 소유할 수 없음을 봅니다. 너무도 애정이 깊은 부부도 차이점이 생기면 이혼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천신에게 중생이 그들의 자손을 가장 사랑한다라고 한 말은 옳지 않으며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두 번째 진술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식량 부족으로 필요와 기근의 시기에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물자는 곡식입니다. 만약 곡식을 구할 수 없으면 그것은 재앙같은 고통을 야기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심지어 짜파티(인도식의 빵) 또는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7종류의 곡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쌀, 보리, 오트, 옥수수, 기장, 밀 등입니다. 가장 많은 곡식을 소유한 사람이 가장 부유합니다.
또한 외견상으로는 햇빛이 가장 밝게 보이는 듯하지만 깊은 동굴 같은 곳은 비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탐진치에 물든 사람을 비출 수도 없습니다. 햇빛은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착하고 총명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지혜에 의해서 선하고 총명하고 세련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지혜의 빛보다 더 밝은 빛은 없다.’라는 속담은 사실입니다.
바다는 빗물과 샘물이 그곳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물로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샘물과 빗물은 많고 작고 큰 강을 따라서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 주장들은 중생은 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가장 중요한 요점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집안에 사는 사람은 그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모든 중생은 자신을 위해서 안전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고 행복하고 부유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부처님 말씀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면,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떻게 삶을 이끌어가야 하겠습니까?
쾌락적인 감각적 대상들을 즐기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을 적절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건전한 행위와 법에 참여하고 행하는데 게으르지 않는 이들은 옳은 방식으로 그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다고 지난 세대의 식자들은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슴과 영혼으로 건전한 행위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행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바른 견해와 올바른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건전한 행위는 순수한 것임에 틀림없고 좋은 업과를 가져옵니다. 사람은 건전한 행위를 하는데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시주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시주를 받는 자도 유익하지만 시주하는 목적은 관용적으로 그 자신의 재산을 제공함으로서 시주하는 사람의 탐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고, 시주를 받는 사람도 시주하는 이의 공덕 있는 자비심에 보답합니다.
계율을 준수하는 것도 건전한 행위입니다. 살생과 도둑질을 금하고 다른 사악한 언행을 저지르지 않음은 건전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탐진치를 제하고 결과적으로 건강하고 장수하는 이점을 가져옵니다.
지금 지혜를 위한 위빠사나 수행 명상 또한 건전한 행위입니다. 명상수행은 6가지 감각으로부터 일어나는 탐진치를 방지합니다. 따라서 탐욕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슬픔과 걱정을 여읜 마음의 순수함을 향유합니다.
명상 수행의 최종 목적은 도과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인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건전한 행위입니다. 공양, 계율과 명상을 진심으로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결국 그 자신을 옳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양, 계율, 선정 수행과 위빠사나 명상은 모두 건전한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공덕이 생기는 정도는 같지 않흡니다.
공양과 계율은 선한 행위이며 결과적 이익은 인간과 천신의 세계에서의 부와 행복일 것입니다. 선정 명상 수행을 통해서는 범신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범신이 지복한 선정의 상태에 머무를 때는 음식도, 물도, 영양분도 필요치 않습니다. 범신의 생명 기간은 매우 깁니다. 그러나 범신의 세계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지복한 삶 뒤에 사람은 인간 세계나 욕계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그것이 적절하게 수행되고 사카디티(인성의 믿음)가 모두 제거되는 단계를 얻으면 그는 도과를 통해 열반의 소중한 목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4가지 선한 행위 가운데 위빠사나 명상이 가장 좋습니다.
요약하면 공양과 계율 같은 선한 행위는 인간과 천신의 세계에서 이익이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선정 수행의 선한 행위는 범신의 세계에 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명상의 선한 행위는 열반의 지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열반이란 소중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서 열반이 현생에 획득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함으로서 현재에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에 고행자 수바다에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반에 든 후에라도 마약 모든 신봉자들이 스님이나 재가불자든 간에 나의 강론에 포함된 가르침에 따라서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 적절한 견지에서 언제든지 아라한이 되지 않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적절한 견지’란, 어떤 사람이 우다야바야 지혜(새로운 현상이 급속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앎-인식)를 얻은 후에 다른 수행자나 친구들에게 자기처럼 수행하라고 장려하여 그들이 같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이 ‘적절한 견지’에서 수행한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적절한 수행을 한 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 상태를 획득하고 차례로 다른 수행자들에게 그와 같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면 그것은 적절한 견지에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하시 센터에서는 원로 수행자들이 명상 수행에서 자신이 획득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젊은 수행자들을 도와주려고 애씁니다. 이것 또한 좋은 불교적 삶과 적절한 견지에서의 수행을 이끕니다.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준수하고 부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위빠사나 명상을 하며 서로 돕는다면 아라한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아라한과가 현재에 성취될 수 있다면, 자연적으로 아나가미 사카다가미 소타파티는 현재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적절한 견지에서 수행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현생에서 아리야 푸가라(성인)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프거나 수행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용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라훌로와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명상수행에서 경험을 얻은 사람은 현생에서의 한 번의 좌선에서 아리야 프가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명상 기술 조건이 도움이 되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친숙해 있기 때문에 진지한 명상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갖게 되는지, 또한 한 순간에 도과를 획득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분명히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자들이 그들의 소중한 목적을 충족한 첫 번째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죽는 순간에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중생은 누구나 위안과 도움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를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 부류의 존재가 있습니다.
우선 한 부류는 초영웅, 코끼리 영웅, 황소 영웅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캬디티 또한 강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우선 침묵의 또는 내밀한 부처님, 아나가미 사람들 아라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캬디티를 제거했고 분노를 낳은 공포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란 공포스런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후에 어떻게 될지 어디에서 다시 태어날지에 대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들의 자녀들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가까이 있는 의사들을 바라봅니다. 실제로 죽는 순간에는 어떤 약도 효과가 없고 자녀로부터의 어떤 도움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필요한 진정한 지지는 법입니다. 법이나 명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법을 관조해야 하는 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도와주려는 애도일 뿐입니다.
날개를 다친 새는 날 수가 없고 개나 고양이의 먹이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죽는 순간에 법을 관조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자칫 욕계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명상 수행의 경험이 있고 위빠사나 명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죽기 전에 도과를 획득하고 아리야 프가라가 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임종시에 법을 관조할 기회가 없다 해도 그것이 나중을 위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록 그가 아리야 프가라가 되지는 못했더라도 법을 관조하며 죽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가 욕계에 떨어질 것을 방지하고 천신의 세계에서 천상의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도와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타마 부처님 시절에 명상 수행한 천상의 존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며, 신심 있는 천상의 존재와의 만남에 의해 아리야 프가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천신의 세계는 인간 세계와 그 조건들이 유사합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천신이 있는 것처럼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법을 찾는 천신도 있습니다. 따라서 임종시에 법을 관조함으로서 천신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은 다른 신앙심 깊은 천신보다 더 지적인 천신을 만날 것이고 크게 힘든 어려움 없이 고귀한 천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명상 수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해탈할 세 번째 기회입니다.
네 번째는 만약 그가 천신의 세계에서 해탈할 기회를 놓치고 재생의 윤회를 거치면 부처님과 그 가르침이 없는 세계의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데 그는 여러 생 동안 명상 수행했다는 사실 때문에 결과적으로 파세카 부처님(독각)이 됩니다. 그는 독립적으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노력으로 4성제를 이해하나 보편적 부처님(완전한 부처님)처럼 다른 이에게 효과적으로 법을 펼 능력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각으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여성들 또한 그때 남성을 성취하거나 파세카 부처님이 되기를 고취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그가 네 번째 기회로서 파세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면 전생에 했던 명상 수행의 덕택으로 그는 다음 가르침의 시기에 쉽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고타마 부처님 시절에 전례가 있습니다. 카사파 부처님 시절에 7일 동안 명상 수행을 했으나 아리야 푸가라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바히야 다루짜리야가 고타마 부처님 때에는 한 번의 좋은 좌선으로 4성제를 단번에 인식하면서 아주 쉽게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결론으로 명상 수행은 매우 큰 공덕이 되며 모든 수행자는 바로 이 순간에 위빠사나 명상에 참여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합니다.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함으로서 첫 번째 기회로서 도과를 성취합니다. 첫 번째 기회로 아리야 푸가라를 성취하지 못하면 두 번째 기회로 임종시 그것을 성취하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회에 실패하면 세 번째 기회로서 천신의 세계에서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기회를 놓치면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있지만 파세카 부처를 성취합니다. 만일 네 번째 기회마저 놓치면 다가올 부처님의 가르침에 4성제를 깨닫고 쉽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명상의 이익은 너무도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수행자는 현재에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제 가장 쉬운 방식으로 소중한 목적인 열반을 빨리 실현하기를 바라면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9. 명상에 있어 균형을 이룬 기능의 중요성
오늘 법문의 주제는 명상에 있어 균형을 이룬 기능의 중요성입니다.
다섯 가지 주요한 기능은 알아차림(사티), 집중력, 노력(힘), 신념, 그리고 지혜입니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집중력, 노력, 신념, 지혜는 골고루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집중과 신념과 노력에 관한 지나친 강조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에 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조하면 할수록 명상 수행에 좋습니다.
명상 수행에는 4가지 형태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입선, 행선, 좌선, 와선입니다. 4가지 가운데 입선, 행선 수행은 노력과 힘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데 좋습니다. 물론 집중력 또한 포함되지만 노력의 발전이 더 강조됩니다. 서 있는 동안 요기는 넘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걸을 대는 곧바로 서서 한 발 한 발 걷는데 특히 애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입선과 행선은 이 노력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반면 좌선과 와선은 집중력 계발에 도움이 됩니다. 좌선의 자세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는 것은 집중력의 계발에 힘이 됩니다. 노력도 필요하지만 작은 역할만 할 뿐입니다. 와선할 때는 눕는 자세를 고요히 유지하고 눈을 감는 것이 좋습니다. 좌선과 와선은 집중력을 계발하기 위해 특히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신념과 지혜뿐만 아니라 집중과 노력에서도 잘 조절된 요기들을 칭찬했다는 것이 특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칭찬의 말을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의 발전은 오직 집중력, 노력, 신념, 지혜가 골고루 계발될 때 속히 성취됩니다.
자전거는 두 바퀴에 공기가 골고루 채워졌을 때 잘 달릴 수 있습니다. 만약 타이어 하나에 공기가 없다면 잘 달릴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두 귀와 눈이 적절히 기능한다면 그는 정상입니다. 만약 한쪽 귀와 눈이 손상되었다면 그는 볼 수는 있지만 정상인만 못합니다. 팔과 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중 한쪽이 손상되면 정상인이 할 수 있는 만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 집중력, 노력, 신념, 지혜가 적절히 균형 잡혀 있으면 통찰의 발전 또한 당연합니다. 만약 그것이 균형을 잃었을 때 신념은 있으나 그만큼 지혜를 갖추지 못한 이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경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다’는 신념이며 한 가지를 믿는 것 또한 신념입니다. 신념을 갖는 것은 좋지만 맹목적인 신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견해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성스럽게 받듭니다. 부처님 시대에 조차 옷을 걸치지 않음으로서 그들의 탐욕과 분노를 벗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체주의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는 개와 황소의 습관을 모방하는 이들을 숭배하고, 어떤 이는 그의 의복이 인간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사람, 또는 특이한 장식을 갖춘 옷을 입은 사람을 숭배했습니다. 그러한 행위의 원인은 그들이 신념을 갖고 있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체주의자들이 겸손함을 결여하고 있고, 그들이 얼마나 가치있고 존경받고 지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간한 지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누가 바른 법을 가르칠 수 있는지, 누가 가짜인지를 알지 못해 잘못된 길을 따른 나머지 결국 갖가지 고통을 겪고 심지어 어떤 이는 가짜 신을 추종하다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렬한 신념을 갖고 있으나 지혜를 갖추지 못해 옳고 그른 길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사이비 부처님의 법, 승가의 추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념은 열렬하나 지혜롭지 못한 이는 삿된 길에 도달한다.’는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날카롭고 지적이나 신념과 정직함이 없는 이는 교활하고 사악하게 됩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어떤 사람이 많은 지식에 통달했지만, 사다(신념)가 부족해서 공양을 제공할 관용도 없고 순수한 계율을 실천할 의도, 위빠사나 수행에 관한 관심도 없음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공양, 계, 명상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공양과 계를 준수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방해해서, “공양을 올리지 마라, 그것이 윤회의 고통을 지속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잘못된 말을 합니다. 그들은 공양이 쉽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그릇을 씻고, 남은 것을 버리길 원한다면 벌레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데 그것도 또한 낮은 공덕을 낳는 낮은 단계의 공양입니다.
잘못된 언급은 경건하고 관용적인 사람들의 옳은 방식에 반대하는 교활하고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또한 훈련되고 소박한 주지 스님의 지도 아래 계를 준수하기 위해 절에 가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계를 지키기 위해 절에 갈 필요는 없고 집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경건함을 조롱합니다. 때로 계를 엄숙히 준수함이 깨지고 의미가 꺾이면 주저 없이 살생하거나 오후 식(食)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스승 앞에서 계를 지키는 것은 매우 엄숙하고 경건한 이익을 낳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지식인들은 위빠사나 명상에 대해 빈정대듯 말합니다.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왜 사람들이 명상 센터에 가야만 하는가?’ 부처님은 사람의 몸에 대한 명상이 법이라고 설법하지도 않았으며, 법은 그 자신의 집에서도 스스로 될 수 있다는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작업은 체계적인 접근과 방법과 기술을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선생이 필요합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정확한 준비와 지도가 필요한 엄숙한 작업입니다. 이외에도 서로를 고양시키고 고무시킬 수 있는 도반과 그 장소가 필요합니다.
환경도 매우 중요합니다. 명상 센터에서는 고요한 환경과 좌선과 행선의 반복을 위한 시간표가 특징과 규칙이 됩니다. 명상 센터의 환경, 분위기, 영감과 고독한 특색은 자신의 집에서는 발견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는 세속적 행위를 피할 수 없으며 일생 생활의 틀 속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스스로 명상 수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수행을 헐뜯는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수행자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부처님의 설법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미얀마 속담에 ‘너무 많이 배웠으나 확신과 신념이 없으면 교활하고 사악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회피하고 체계적인 발전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에 있어 지혜와 신념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것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맹목적 신뢰로 교리를 추종해선 안 됩니다. 모든 해석은 그 전에 고찰되어야 합니다.
지성적이고 진지한 신념을 가진 이들은 민중에게 하나의 자산이 됩니다. 그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과 사회의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와 신념의 균형에서 오는 결과적 유익함입니다. 집중력과 노력 또한 조절되어야 합니다. 집중력은 한 점에 모인 마음이며 노력은 힘과 생명력입니다.
이 법문의 시작에서 설명한 것처럼 좌선과 와선은 집중력의 발전을 고양시킵니다. 그리고 입선과 행선은 노력을 고양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스케줄은 1시간은 걷고 1시간은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만일 좌선만이 명상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선생은 그렇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좌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집중력만이 지나치게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집중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좌선과 와선에서 게으름과 졸음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징후가 일어나면 수행자는 그것이 지나친 집중력 때문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지혜의 감각이 발전하는 단계의 끝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졸음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때 수행자는 반드시 더 많은 노력을 증가시켜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4가지 접촉점에서 10가지 접촉점으로 그리고 더 많은 행선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때 노력과 집중이 균형 잡히고 졸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필요보다 더 많은 행선을 하고 좌선을 적게 하면, 지나친 노력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과잉 노력의 징후는 망상이 많아지고 좌선할 때 꿈을 꾸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것을 즉시 알아차림 하지 못하고 한참 후에나 깨닫게 됩니다. 행선할 때 또한 처음 시작할 때 걸음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처방은 집중력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식에 의해서 집중력과 노력에 의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 시대에 소나라는 백만장자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발바닥은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위빠사나 수행을 진심으로 원하고 계를 받았습니다. 계를 받은 후 사미 스님 소나는 ‘나는 백만장자의 아들로서 편안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 열의와 인내를 가지고 수행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행선 이후 울퉁불퉁한 땅을 걸어 그의 발에는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집중력은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선을 할 수 없게 되자 무릎과 손으로 기었습니다. 너무도 열심히 해서 땅이 피로 젖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한 그는 매우 실망해서 법을 깨닫지 못하니 수행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 길에 오셔서 왜 길이 푸줏간처럼 피범벅이 되었는지 물으셨습니다. 비구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자 부처님께서는 소나에게 가서 젊었을 때 그가 하프를 친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소나는 하프를 아주 잘 연주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나는 줄은 너무 느슨해서도 또는 너무 팽팽해서도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소나에게 마치 하프를 연주하는 것처럼 수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느슨한 줄은 감겨 버릴 것이고, 너무 팽팽하게 하면 뚝하고 끊어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상수행에서 중도는 결과를 얻기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부처님은 소나에게 좌선과 행선을 균등히 하고, 힘과 정의 균형을 갖고, 적당히 먹고, 필요한 경우에는 약을 쓰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사미 소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준수해서 그의 부드러운 발을 약으로 치료하고, 적당히 먹고, 힘과 정을 균등한 방식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때가 이르자 소나는 도과를 획득하고, Ariya-puggala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수행자들 또한 집중력과 노력, 그리고 지혜와 신념을 균등히 수행하서 가장 손쉽고 짧은 방식으로 모든 고통의 종식, 열반의 소중한 목표를 실현합시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0. 불교도를 위한 근본 원리
오늘 법문의 주제는 불교도를 위한 근본 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인 사성제를 인식한 분입니다. 부처님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자격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그 자신의 개인적 노력과 지성에 의해 사성제를 인식하는 것, 다음은 다른 사람에게 사성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성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성제-고통
2) 집성제-고통의 원인(기원)
3) 멸성제-고통의 소멸
4) 도성제-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
그 자신의 지혜에 의해서 사성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는 방법을 아는 이를 붓다라 합니다. 불교도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슴과 영혼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불교도라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불교도들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흔들리지 않는 신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진정한 교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나 친척에 의해 수행되는 일반적인 종교적 행사를 따를 뿐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불교의 깊은 종교적 이해와 신념을 소유할 수 없고, 환경이 허락하면 타종교로 개종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전통적 불교도는 깊은 신념을 갖지 않기에 4욕계 세계와 영원히 분리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깊은 신념과 기초적 지식을 가진 신도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깊은 신심을 가진 교인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의 주요한 특징을 준수함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불건전한 행위의 금지
2) 항상 건전한 행위의 시도
3) 마음 번뇌로부터 순수하고 자유롭게 유지
다음의 시구는 간략하게 그 가르침을 말해 줍니다.
모든 악함을 금하는 것
선한 것을 행하는 것
마음을 정화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도의 첫 번째 특징은 불건전한 행위를 금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건전한 행위인가?
불건전한 행위는 죄를 범해서 나쁜 결과를 맺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을 들 수 있습니다. 살해 그 자체는 유죄입니다. 인간을 살해하면 그 죄는 더욱 중대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미래의 삶에서 짧은 수명과 빈곤함, 천한 탄생을 가져옵니다. 도둑질 또한 불건전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현생에 있어 유죄이며, 그 결과로 내생에 가난과 고통의 삶을 가져옵니다. 거짓말, 속임수, 어리석은 말 또한 불건전한 언행입니다. 나쁜 사고, 언행, 행위 모두는 불건한 행위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도 유죄이며, 그 결과 업과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그와 같은 행위를 금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애들이 날카로운 대나무 조작이나 동전을 입에 넣으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그의 입에서 즉시 빼내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코에 콩알이나 씨앗을 넣으려고 한다면 그 어머니는 그것을 뺏으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얘들을 위험에서 지키려는 선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는 울고 화를 낼 것입니다. 어머니의 행위는 사랑에서 오는 것이며 아이를 위험에서 보호하려고 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살해, 도둑질, 잘못된 성행위, 거짓말, 그리고 중상모략, 무례한 언행, 어리석은 말 등과 같은 정신적 언어적 육체적 불건전한 행위를 금한 것은 나쁜 업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불교도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건전한 행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행위는 관대하게 공양하고 순수한 계율을 준수하고 명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행위는 무죄이며 좋은 업과를 갖습니다. 공양은 무죄이며 현생에 자비를 가진 공양 받는 이에게도 무죄입니다. 그것은 또한 업을 축적해서 내세에 더 성숙되고 그 결과 더 번영하게 됩니다. 계를 준수하는 것 또한 훌륭합니다. 순수한 계를 준수하는 것으로서 사람은 탐욕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현세나 내세에서 장수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수행하는 것 도한 공덕을 낳으며 순수합니다. 자비 수행의 이점은 열 한 가지가 있습니다.
1) 평화로운 잠
2) 상쾌한 깸
3) 좋은 꿈
4) 사람들에게 사랑 받음
5) 사람뿐만 아니라 천신에게서 사랑 받음
6) 천신에 의해 도움 받음
7) 불과 독약과 무기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남
8) 정신적 안정
9) 상냥하고 고요한 얼굴
10) 평안한 죽음
11) 죽은 뒤 더 낳은 재생의 성취
위에 언급된 모든 건전한 행위는 사람이 윤회를 거듭할 때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를 거듭하는 과정, 즉 윤회의 여행자인 것입니다. 이런 연속적 과정은 사람이 아라한의 단계를 획득할 때 종식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획득하기 전에 윤회의 긴 여정을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국가에서 국가로 장소에서 장소로의 여행을 위해서 우리는 돈과, 비행기 표, 기차 표 등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윤회의 긴 반복적 여행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장려할 만한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생으로부터 돈과 비행기표, 기차표를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준비물은 공양, 계의 준수, 명상 수행을 통해 공덕을 쌓는 것이며, 그것은 윤회의 긴 여정에서 위안을 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건전한 행위를 금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세 번째 특징은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우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육체적 청결함에 집착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에 사람들은 얼굴을 씻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그것은 육체의 청결과 단정을 위한 것입니다.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마음을 번뇌로부터 정화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육체적 더러움으로 인해 사람이 4욕계의 세계로 인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4개의 4욕계의 세계로 보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수행자들은 동물의 세계, 소, 말, 돼지, 닭, 오리 등의 고통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육체적 정화를 유지하는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전생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행위와 불건전한 행위를 저질러서 그 결과 현재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정화가 간과되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청결을 유지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의 정화를 위해 애써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스님들이여, 마음의 정화를 획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타파타나 담마(Satipatthana dhamma)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체에 대한 관찰
2) 감정에 대한 관찰
3) 마음에 대한 관찰
4) 마음의 대상에 대한 관찰
알아차림의 4가지 구분을 수행하는 것이 마음을 정화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네프킨이 새 것이면 그것은 깨끗하고 하얗습니다. 사람들이 입과 손을 닦으면 그것은 더러워지고 오물을 지우기 위해서는 물과 비누로 씻어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탐욕과 분노로 물들었을 때 마음은 알아차림이란 비누와 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기능적인 특징은 생각하고 감각과 정신적인 인상(감각적 반응에 의한 인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그들의 의식에서 오고가는 모든 행위를인식합니다. 미음은 매우 이상하고 특이합니다. 수행자들은 요즘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TV, 위성 로켓, 핵폭탄, 우주 비행선 등과 같은 것들이 발명되고 그림들도 매우 특이하고 이상하다고 논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발명품이나 그림들보다 더 특이한 것이라고 단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명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먼저 마음으로 생각하여 새로운 필수품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더 특이한 것입니다.
마음은 또한 물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물을 담기 위해서는 컵이나 팬 또는 농장에 담겨져야 하는데 들판의 둑이나 흙무더기 등에서만이 저장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알아차림 명상의 점검에 의해서 간직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건전한 법에 의해 자제되지 않으면, 마음은 5관의 쾌락에 따라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5관의 쾌락은 좋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입니다.
본래 물은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만약 석회가루가 떨어지면 물은 곧 탁해질 것입니다. 푸른색이 떨어지면 푸른색이 되고, 검은색이 떨어지면 검은색으로 될 것입니다. 마음 또한 본래 순수하나 탐욕과 분노에 영향 받으면 곧 오염이 됩니다.
마음은 또한 조각용 나무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조각가는 그 나무 재료로부터 공룡이나 악마를 조각할 수도 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극에서 추하고 잔인한 인물은 악마나 공룡으로 표현되고 사랑과 동정적 행위를 묘사하는 문화적 춤은 왕자나 공주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존경받는 배우는 다양한 양식의 조각물의 성격에 조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조각가가 탐욕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의 상태에서 인물을 조각하면 조각품은 동물이나 악마 또는 빈곤한 탄생의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조각가가 건전함과 불건전함이 혼합되어 인물을 조작하면 인간 존재의 이미지는 낮은 단계의 천신이나 불구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건전함과 불건전함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그러한 조각품, 즉 인간의 이미지 또는 낮은 단계의 천신들은 빈곤한 환경 속에서 팔다리가 온전치 못한 불구로 표현됩니다.
조각가가 건전한 법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인물을 만들면, 인물은 예쁘고 멋이 있으나 조각 그 자체는 높은 단계의 인간 또는 악마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형태에서 그것들은 높은 단계의 부유한, 편안한 삶의 조건인 계의 단상에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마음은 또한 숲 속의 야생 코끼리와도 비견될 수 있습니다. 야생 코끼리는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고 오히려 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야생 코끼리는 길들여져 해가 없고 유익해질 때까지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암컷의 훈련된 코끼리에 의해 큰 도량으로 유인되어서 물과 음식 없이 격리됩니다. 그들이 약해지고 갈증이 나면 쇠사슬로 묶여 점차 한 번에 작은 양의 음식물을 주면서 길들여진 후에야 그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코끼리가 됩니다. 숲 속의 야생 코끼리처럼 방만한 마음은 감각적 쾌락(5관의 좋은 인상)에 탐닉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이 번뇌의 영역에 둔다면, 그것은 4욕의 세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거친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 신념과 열망이 미끼로서 이용되어져 마음을 계율, 명상의 도량으로 유인합니다. 불살생, 불투도 등의 계를 준수함으로서 거친 마음은 훈련 과정을 위해 도량으로 이끌려옵니다.
감각적 쾌락은 억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강도 높은 명상 기간 동안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건, 춤이나, TV를 보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음식을 자주 먹거나 지나치게 먹는 것은 야생 코끼리 길들이기 과정에서처럼 제한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야생 코끼리가 도량에서 사슬에 묶인 것처럼 명상 수행의 마음차림 훈련으로 묶여져야 합니다. 훈련된 코끼리가 인간에게 가치 있는 자신이 되는 것처럼, 훈련된 마음은 우리를 더 나은 인간과 신의 세계로 데려다 줄 운송 수단이 됩니다. 야생 코끼리와 같은 마음은 순화되어야 합니다. 손과 발이 먼지와 진흙으로 더러워지면 물로 씻어야 합니다.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면 부지런히 알아차림하여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알아차림 명상을 통해 수행자들은 정신과 물질의 구분,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지혜를 통해 점차적으로 마음과 견해의 정화를 획득하고 결국 수다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마음의 정화가 성취됩니다. 그때 3가지 주요한 특징,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완성되며, 그 사람은 진정한 불교도가 될 것입니다. 그는 4욕계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는 신도가 됩니다. 그는 삶의 윤회에서 안락해지고 나서 고통의 소멸, 즉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모든 수행자들이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하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분의 소중한 염원인 열반을 가장 쉽고 빠른 방법과 시간 안에서 이룩하시길 바라며, 오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1. 3가지 종류의 사람들
오늘 법문의 주제는 3가지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사람들이 더 영리하고 지적일 수 있도록 돕는데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사람들은 현상에서의 물질적 풍요와 부유함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영리하고 좋은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리하고 좋은 사람이란 현생에 부유하고 성공하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영리하고 좋은 사람이란 한 생애에 부와 복지를 위해 노력할 만큼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다가올 윤회의 재탄생의 복지를 위해서도 투자하고 계발할 만큼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3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1) 두 눈이 다 먼 사람들
2) 한 눈은 좋으나 한 눈이 먼 사람들
3) 두 눈이 다 좋은 사람
여기서 ‘눈’이란 말은 은유로 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시각 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눈이란 인간의 영특함과 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오, 비구여! 누가 두 눈이 다 멀었는지 아십니까?”
부처님은 그의 답변에 대해 청중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위해 일차적인 질문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부처님의 질문은 5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1) 답변을 유인하기 위한 질문
2) 다른 이의 관점을 묻기 위한 질문
3) 다른 이의 희망을 확고히 하기 위한 질문
4) 다른 이의 관점을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
5) 그 스스로 답하기 위한 질문
부처님의 위의 질문은 이 중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즉, 자신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신성한 눈을 통한 무한한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순간에 획득되는 6가지 신통력 중의 하나입니다. 마술적인 힘, 신통한 귀, 다른이의 마음을 궤뚫어 보는 힘, 전생을 알아보는 힘, 모든 번뇌의 소멸 등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자신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두 눈이 다 먼 사람이란 현생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경제적 충동이 없고, 이윤을 내는 사업을 운영하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다루는 기술도 없습니다. 그는 힘도, 사업적 예리함도 없고, 따라서 빈곤하며 현생에서는 실패할 뿐입니다. 그는 총명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아서 윤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공덕적 행위와 순수한 행위 또는 불건전한 것과 불순한 행위를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선업과 악업도 이해하지 못해 현생, 또는 내생에서도 실패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두 눈이 다 먼 사람으로 불립니다. 언젠가 인도 바나라시라는 곳에 한 부자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부모는 부자였기 때문에 아들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했습니다. 그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는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교육받지는 않았으나 편안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서 삶의 복잡함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죽자 그는 부모의 사업을 경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혜도 없고 미래를 위해 투자할 지식도 없어 결국 유산 모두를 낭비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두 눈이 다 먼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한 눈이 멀고 한 눈은 좋은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한 눈만 멀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질문 후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답하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어떤 이는 돈 문제를 다루는데 능숙하고 부를 증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업적 예리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공양과 계와 명상수행(탁발, 도덕저그 정신적) 계발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치 있는 행위와 가치 없는 행위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행위가 유익하고 순수한지, 어떤 행위가 불순하고 불건전한지를 모릅니다. 그들이 현생에서 사업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공덕을 낳은 행위를 결여하였기 때문에 내생은 빈곤하게 될 것이며 지위가 낮아지고 욕계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한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현생에 성공적이고 부유한 범주에 들지만 공양과 계와 수행을 준수함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3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어떤 사람들이 둘 다 좋은 눈을 가진 이들인가?”
그리고 다시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어떤 이는 사업 경영에 있어서 영리하고 지적입니다. 그들은 부를 증진하는 기술을 압니다. 그들은 현생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지만, 멀리 볼 줄 알만큼 이성적입니다. 이제 나는 부자이고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영원하진 않다. 그것은 불이나 홍수나, 강도나, 어리석은 상속자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다.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진 부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라고 올바로 생각할 줄 알기에 공양이나 계율 같은 공덕을 행합니다. 그들은 불건전한 육체적 행위나 언행을 삼갑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한 명상에 참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현생에서 공양 계 명상을 축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부나 육체 그 자체는 그 자신의 재산으로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부란 언젠가는 고갈되는 것이며, 육체란 죽음과 쇠퇴의 법에 굴복되고야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즉 총명함과 지혜를 소유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서도 공양, 계, 명상과 같은 가치 있는 행위에 투자할 만큼 현명하므로 두 가지 측면을 가진 두 눈이 다 좋은 사람으로 불립니다.
부처님 시대 바라나시에 마하다나란 이름의 빈틈없는 상인 있었습니다. 그는 사바티 주의 전통 축제에 거대한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양의 실크 옷감과 핑크빛 옷을 적당한 가격에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500 마리의 황소 수레를 부리는 인부를 고용하고 사바티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그날 저녁 사바티 근처의 강둑에 도착했을 때 여행을 멈추고 내일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한 밤 중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7일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상인과 인부들은 강을 건널 수 없어 강둑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하다나와 그의 동료들이 마침내 강을 건넜을 때는 축제는 이미 끝나고, 그의 핑크빛 옷감은 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곰곰이 생각한 후 다가올 겨울까지 그의 상품들을 팔기 위해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라시까지 돌아가는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겨울에 상품을 다 못 판다 하더라도 여름과 우기까지 기다릴 수 있으며, 그때 가서 상품을 다 팔고 상당한 이윤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 따른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의 충실한 아난 존자와 함께 탁발을 나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강둑에 야영하고 있는 마하다나 대상들을 보시고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을 때 번쩍이는 광채가 치아로부터 비쳤는데 아난 존자는 그 광채가 온 주위를 밝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부처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상품이 다 팔릴 때까지 겨울, 여름, 심지어 우기 때까지 여기에서 머물 계획을 하고 있는 마하다나 대상들을 가리키시며 말씀 하셨습니다.
“저 사람은 오직 살 날이 7일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업상의 이윤을 만들때까지 오랫동안 사고, 팔고, 머물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그러나 그들이 병들고, 늙고, 죽어간다는 불가항력적인 법칙을 깨닫지 못해 결국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그 법칙에 압도 당하게 된다고 거듭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자연 법칙을 고려하지도 않았고, 무상이란 불가피한 법칙을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아난 존자는 무역상 마하다나가 어떤 공덕 없이 죽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동정하고 그의 절박한 비극을 알려주기 위해 부처님께 허락을 의뢰했습니다.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는 마하다나의 캠프로 갔습니다.
대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아난 존자는 그들이 누구이며, 무슨 계획을 갖고 있고, 왜 강둑에 야영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대상 마하다나는 핑크빛 비단 옷감을 팔기 위해 바라나시에서 사바티까지 어떻게 왔으며, 7일간의 폭우 때문에 멈춰야 했고, 축제에서 판매할 계획을 놓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축제를 놓쳤기 때문에 상품을 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겨울, 여름, 우기 때까지 머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난 존자는 마하다나가 7일밖에는 더 살지 못하며, 장기간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는 부처님의 예언을 전하며, 부처님의 예언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실제 상황을 깨달은 마하다나는 이 모든 재산과 부란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공양을 제공하고 계를 준수하고 명상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과 제자들을 캠프로 초대하고 다음날 아난 존자를 통해 공양을 올렸습니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과 승가를 데리고 다음 날 캠프에 왔을 때 마하다나와 측근들은 7일 동안 공양을 올리고, 계를 준수하고, 명상 수행을 했습니다. 7일이 끝났을 때 부처님께 공손히 공양을 올린 마하다나는 부처님과 동반해 수도원까지 갔습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며, 7일 간의 공덕으로 인해 천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현생에서 부유해질 수 있는 총명함과 지혜를 소유하고, 동시에 공양과 계, 명상을 수행할 만큼 지혜로운 자는 두 눈이 다 좋은 사람 또는 두 측면의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범주화됩니다.
여기 우리 수행자들은 현생에서 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총명과 지혜를 소유한 좋은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범주에 속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결제에 참여함으로서 윤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 계와 명상이란 선업을 행하려고 하는 지혜의 눈을 가진 안목인 것입니다.
분명 우리 수행자들은 두 둔을 가진 3번째 범주에 속합니다. 3개의 범주 가운데 두 눈이 다 먼 사람, 한 눈은 멀고 한 눈은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고, 두 측면의 비전을 가진 두 눈이 다 좋은 사람을 벗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수행자들이 현생뿐만 아니라 내세를 위해 총명과 지혜를 소유하고, 사티파타나(대념처) 명상을 부지런히 수행해서 가능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영원한 평화의 열반을 획득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수행자를 축원하며 오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모두 행복하시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2. 수행자의 다섯 가지 소질
오늘 법문은 수행자의 소질 또는 노력의 요소들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에게는 다섯 가지 소질이 필요한데 그것은 신념, 건강, 정직한 마음 또는 견지(진지함) 그리고 노력(힘)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지혜입니다.
1) 신념: 통찰 명상 수행에서 확신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수행할 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지 않는다면 의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경전의 시작 부분에서 부처님은 명상 수행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제의하셨습니다.
○ 정신적 번뇌의 순화
○ 슬픔의 극복
○ 비탄의 극복
○ 육체적 고통의 해소
○ 정신적 고통의 해소
○ 도과의 획득
○ 열반의 실현
경전의 중간 부분에서 부처님은 수행의 상세한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수행자가 명상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모든 움직임의 성격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왼발, 오른발, 듦, 나아감, 놓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동작을 성격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멈출 때는 멈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 앉아 있음의 특성을 알기 위해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워 있을 때는 누움의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남, 사라짐, 닿음은 육체적 현상입니다. 구부림, 폄, 또한 육체적 현상입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개인적으로 경험할 때 상세히 알아차려야 하며, 경전에는 어떤 것도 놓침 없이 모든 것을 실제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결론 부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좀 더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그리고 좀 더 보장된 결과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언하시기를 어떤 수행자도 경전에 따라 7년간 수행하면 아라한의 경지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아라한에 이른 수행자에게는 아직 4가지 집착이 남아 있습니다. 감각적 집착, 견해의 집착, 단순한 규칙과 예식에 대한 집착, 인성의 집착(믿음)이 그것입니다.
어떤 이는 7년이 너무 길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7년 간이나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예외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7년이 너무 길면 6년 5년, 4년, 3년 적어도 1년 간 수행을 지속하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의 글자와 정신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에게 아라한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다른 예외를 두셨습니다. 1년이 길다는 느끼는 사람에게는 7개월,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1개월을, 그리고 완벽함을 구비한 사람에게는 7일, 15일이 아라한이 되는데 충분한 것입니다. 물론 15일, 7일만에 얻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완벽함을 전생에 축적해 온 사람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주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성공적 성취를 위해서는 2,3개월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의존할 만하고 긍정적 결과를 보증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오직 당신의 경험에 의해서 입증된 것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대념처경의 서두에서는 명상의 이점이 설명되었고 중간 부분에서는 실제적 방법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장된 결과가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법의 수행에서 절대적 신념을 가져야만 합니다. 부처님 자신은 철학적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성취를 얻은 뒤에 방법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 대념처 명상의 스승들이 단지 이론뿐만 아닌, 그들 스스로 도를 통과한 실제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그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현생에서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고 겸손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견해에서는 수행이란 성취를 위한 완벽함을 갖추기 위해 시도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고는 패배주의적 사고입니다. 인간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귀중한 특권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여러분이 전생에 형성된 바라밀을 소유하고 있으며, 미얀마의 명상 센터까지 와서 수행하고 있고, 이 센터에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전통에 따라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능력에 관해서도 어떠한 의심도 갖지 마십시오. 스승들이 수행을 정말 알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도의 성취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하시 센터의 선생들은 이론뿐만 아니라 대념처 명상의 실제적인 측면까지 마스터했습니다.
이곳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마하시 명상 방법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왕 미돈의 기간 동안 티론 사야도란 이름의 명상의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후에 민군 수도원으로부터 나온 제자, 민주타 사야도 그리고 타톤 민군 제타원 사야도는 계속해서 그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마하시 센터의 창립자 마하시 사야도는 타톤 사야도의 제자였습니다. 이 센터의 스승들은 마하시 사야도의 세밀한 감독 아래 훈련되었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가장 뛰어난 명상의 대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은 스승의 능력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의심은 명상과 도의 발전에 부정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명상의 진보를 위해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부처님과 법과 스승에 대한 신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 자질 또는 요구 사항은 수행자들의 건강입니다. 어떤 이는 강도 높은 명상 기간도안 자신의 건강을 유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좌선에 지나치게 탐닉하고 어떤 이는 적게 먹는 것이 명상에 좋다는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행위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되고 명상에 도움도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들은 영양식을 섭취하고 적당히 운동함으로서 건강에 유의해야 합니다.
3) 세 번째 요구사항은 정직한 마음과 견해입니다. 솔직함은 좋은 수행자가 되기 위한 품성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나쁜 경험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좋은 경험만을 말하여 합니다. 진정한 사태를 보고하지 않음으로서 수행자들의 발전적 단계를 결정하는데 손해를 봅니다. 어떤 단계에서 수행자는 염세적인 견해를 경험하고 공포감의 인식, 고통, 따분함, 구역감을 경험합니다. 그와 같은 경험도 정직하게 보고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스승은 수행자들이 어떤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알고 만약 어떤 실수가 있다면 교정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스승이 적절한 지도를 제공할 수 없다면 발전이란 매우 더딜 것입니다. 잘된 좌선을 과장하지도 못된 것을 숨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단지 솔직해야 합니다.
4) 네 번째 요구사항은 부지런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의 성취가 쉬운 문제는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명상의 목적은 윤회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수행자는 기상부터 잠들 때까지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마음차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와 같이 부지런히 마음차림 함으로서 수행자는 부지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알아차림 함으로서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질 때 마음과 물질의 본성을 알게 됩니다. 행선할 때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고 걸음은 물질입니다. 소리는 물질이고 듣는 것은 마음입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일어나고 사라짐은 물질이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발생하고 사라지는 순간에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5) 현재 순간을 알아차림 함으로서 진실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며, 수행자는 사라짐의 현상 가운데서 무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바라던 것처럼,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조건이란 조절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짐,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 실재도 없음, 즉 이것은 단지 법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관찰하므로서 수행자는 알아차림 되는 대상과 알아차리는 주관, 그 모두가 해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며 사마사나 지혜를 성취합니다. 그 후 수행자는 통찰의 지혜를 얻을 만큼 성숙하여 Udayabbaya 지혜가 나타납니다. 이 지혜가 나타나면 알아차림이 쉬워지고 웨다나(불쾌한 느낌) 없이 편해집니다. 수행자는 비범한 빛, 환희의 모습을 경험하는듯하며, 황홀함 또는 온 몸이 가벼워지는 경험과 함께 발전합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공중에 뜨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 모두는 들어올림, 봄, 흔들림, 좋아함 등과 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환희와 같은 것에 집착하면 불필요하게 지체될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행자는 온몸이 곤두서고 돌같이 차갑고 평화스런 느낌을 온몸에 갖습니다. 그와 같은 느낌이 발생하면 이런 느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고요함의 감각일 뿐이니, 평소처럼 알아차림 되어야 할 뿐입니다. 거기에 집착하면 어떤 발전도 없습니다.
그후에 서약으로 번역되는 아디모카가 계발됩니다. 이제 정법을 얻었고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추측하게 됩니다. 때때로 열망으로 인해 승가에 공양을 하게 되고, 친구에게 설법하거나 불법을 전법하려 합니다. 만약 그러한 열정에 굴복하면 발전이 더디어 집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우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숙고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나 자신의 발전과 해방의 순간이다라고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 법을 전하려는 열정을 연기하고,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열광에 압도되어서 자신의 정력적 열정에 만족합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만족, 만족’이라고 알아차려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고통, 분주함, 웨다나의 긴 투쟁 뒤에 고요함, 몸의 가벼움, 마음의 평온함을 만끽하게 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릅니다. 이것은 선정의 환희 또는 전념의 5가지 요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어떤 때는 지혜와 알아차림의 선명함이 계발되지만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집중력의 성숙입니다. 또 하나의 전도된 발전은 ‘Nikanti'인데 그것은 법을 얻었다고 속는 것입니다.
때로는 알아차림의 선명해져 어떤 일을 예견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예견이 실현될 때 수행자는 그의 업적에 대해 매우 기뻐해서 길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또한 잘못된 길은 있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Piti 환희’, ‘Passadhi', 알아차림의 선명함, 몸의 가벼움, 빛을 봄, 고요함, 마음의 평온함을 경험할 때 이것이 수행자의 정신을 고양시켜서 수행자들은 자신이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수행을 멈추게 됩니다.
만약 수행자들이 그러한 육체적 정신적 상쾌함에 집착하게 되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스승의 충고를 주의 깊게 받아들인 후 수행자들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부지런히 알아차려, ‘Udayabbaya 지혜’를 획득하게 될 것이고, 모든 즐거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단계를 지난 후에 수행자는 점차 발전이 확실해지며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수행자는 스승의 지도를 받은 후에 비로소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인식하는 5가지 특성 또는 요건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자들의 5가지 특성 또는 요건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바라면서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신념, 건강, 솔직성, 부지런함, 통찰의 지혜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짐의 인식을 이룩하고, ‘Amagga dhamma, 부도법(不道法)’를 극복하고 ‘Magga dhamma’ 도법(道法)’를 획득해서 소중한 열반, 고통의 종식, 모든 갈망의 소멸을 가장 짧은 시간과 방법으로 획득하시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3. 시간이 무루 익었을 때 완전한 결과가 나타난다.
오늘 법문은 시간이 무루 익었을 때 완전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중생들은 시간이 무루 익었을Eo 그들의 건전한 또는 불건전한 행위의 결과를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 철학은 업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며, 업이란 자신의 행위입니다. 업에 의해 중생은 윤회의 순환에 따라 다른 생애로 형성됩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모든 중생들의 유일한 소유물은 자신의 업이라는 것입니다. 현생의 모든 사건의 원인은 자신의 업입니다. 업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친척이고 모든 중생의 피난처입니다. 업의 결과는 모든 존재에게 다른 운명의 원인이 됩니다. 그와 같은 좋거나 나쁜 결과는 시간이 되면 일어납니다.
악행과 선행을 야기하는 기본 요소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음은 선도하는 요소이고, 모든 행위는 마음이 명령하는대로 따라갑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의도로 얘기하고 행동하면 그는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자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항상 사람을 동반해서 가는 것처럼, 건전한 행위는 윤회 속에서 행위자와 동반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쁜 의도로 이야기 하거나 행위하면 마치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 뒤를 따라가는 것처럼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한때 미린다 왕이 학식 있는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선행이 좋은 업적을 가져온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실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볼 수 있을 대만 믿고 싶습니다. 이 좋은 업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3피트, 6피트 떨어져 있습니까?”
나가세나는 친절히 질문함으로서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위대한 왕이시여, 나 또한 당신께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는 성숙했고 물이 충분하고 땅은 썩 기름져 보입니다. 이 나무가 열매가 열릴 것 같습니까?”
왕이 응답했습니다.
“이 나무는 다 컸고 물도 충분하고 땅도 좋으므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가세나는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만약 확실히 이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면 나에게 그 열매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뿌리에 줄기에 잎사귀에 또는 가지에 있습니까? 저 또한 실제적인 수행자로서 저는 본 것만을 믿습니다.”
왕이 응답했습니다.
“어떻게 열매가 나오기 전에 그것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무르익고 환경이 적당해지면 열매를 맺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자 나가세나가 응답했습니다.
“선행과 악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결과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무르익고 조건이 맞으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의 결과도 시간이 성숙되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나가세나의 답변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경우에 의심이 생깁니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논쟁합니다.
“우리 가족은 공양, 계, 명상과 같은 가치 있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슬픔이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다른 가족은 불건전한 행위를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좋은 건강과 번성, 행복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건전한 행위가 좋은 결과를 낳고 우리들의 건전한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불건전한 행위를 위한 시간이 덜 무르익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좋은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건전한 행위가 성숙하고 시간이 되면 결과가 더 나쁜 쪽으로 갑자기 바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건전한 행위를 한 사람들은 결과를 위한 대가 무르익기 전에 삶을 즐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으면 그들은 불건전한 행위의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좋고 건전한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시간이 되기 전에 반대된 삶을 살게 될 지 모르나 때가 되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며, 그 모순을 극복하고 결과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받아들여질만한 진실한 격언은, 완전한 결과는 때가 무르익었을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불건전한 행위는 나쁜 결과를 건전한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불건전한 행위는 살인, 도둑질, 잘못된 성행위 등이고, 건전한 행위는 공양, 계율, 명상 등입니다. 속인들은 좋은 동기를 갖고 건전한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결국 업이 되고 말지만, 부처님과 아라한 및 파세카 부처님(독각)께서는 동기 없이 선행을 해도 좋은 전례를 낳습니다. 그들은 행위의 대가로 좋은 삶, 결과를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좋은 전례를 남기기 위해 부처님은 사리불 존자에게 가사를 공양 올린 것이고, 아난 존자도 사리불에게 같은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행이 그들을 위한 선업이 되지 않습니다.
속인들이 선행을 하는 주요 목적은 더 나은 삶의 즐거움을 얻거나 더 나은 내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건전한 행위는 비록 선행으로 불리지만 어느 정도 욕망의 요소(번뇌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좋거나 나쁜 결과를 맺습니다. 두 측면 가운데서 그것이 악업으로 판명되면 나쁜 결과가 즉 슬픔이나 번민이 나타납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 때문에 사람은 욕계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쁜 결과를 회피하는 구제약은 수다원도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획득한 이는 나쁜 결과를 제거하여 4욕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악행을 제거한 이는 선행을 즐길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행은 인간계,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속인들의 눈에 이런 업적은 좋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인들에게는 이런 존재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재생의 순환 때문에 생로병사의 과정을 계속하는 타락한 순환인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러한 윤회적 삶을 인간 존재의 배설물로 간주합니다. 배설물은 그 모양이 많건 적건 구역질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 또한 성인들에게는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생의 순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아라한을 획득하면 모든 종류의 업은 사라지고, 더 이상의 생로병사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업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사람은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선행에 대한 좋은 결과와 악행에 대한 나쁜 결과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생의 공포스런 순환과 관련해서 봅시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기 전에 고난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한때 아난 존자는 금세공의 가족으로 태어났었습니다. 잘 생기고 부유한 그는 바람둥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부인들과 놀아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다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악행의 결과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그는 부자의 아들로서 보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삶에서 그는 공양, 계율, 명상과 같은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죽었을 때 시간은 성숙되어서 그가 저지른 악행이 수확되었고 고통받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Yoruva' 지옥 다음에 그는 동물의 세계에 떨어져 염소가 되었습니다. 염소는 크고 강했으나 거세되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라 도살장으로 보내져 고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다시 원숭이로 태어났는데 원숭이의 우두머리는 그가 세고 튼튼해서 자기의 라이벌이 된다고 판단해 고환을 짓이겨 살해했습니다. 그는 다시 황소로 태어났습니다. 황소가 세고 튼튼하니 주인은 거세한 후 수레용으로 만들었습니다. 황소가 늙고 약해지자 다시 도살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후 그는 중성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고통스런 죽음을 겪고난 후 천사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의 딸 ’루짜‘로 태어납니다. 그가 저지른 불건전한 행위 때문에 악업을 받았고 고통을 받다가 마침내 왕의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왕의 딸 루짜의 삶 이후에 선행에 대한 시간이 성숙되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악행에 대한 나쁜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미래의 고타마 부처님이 되신 싯다르타 왕자의 사촌으로 인간 세계에 태어났습니다.
왕자 싯다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이 되었을 때, 아난 존자는 전지한 부처님의 가까운 시자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시자로서 특별한 지성과 놀라운 기억력을 겸비한 그는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한 8만4천 법문에 모두 정통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기 위한 첫 결집을 위해 남아있던 499 아라한과 아난 존자가 선별되었습니다. 아난 존자는 단지 수다원이었으나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에 정통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라한들이 500명 중의 한사람은 아직도 번뇌에 빠져있다고 하며 아난 존자를 지칭하자, 그는 결집 전까지 아라한을 이루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좌선과 행선을 선택하여 온종일 대념처 명상을 부지런히 수행했습니다. 밤에 이르자 그는 지쳤고 잠과 지루함이 그를 압도했습니다. 심야까지 행선을 했지만 아라한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난 존자는 바라밀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강도 깊게 부지런히 수행하면 아라한과를 이룰 수 있다는 부처님의 예견에도 불구하고 명상에서 진보를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의아해 했습니다. 심야 이후 아난 존자는 매우 지쳐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알아차림 하면서 그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침실에 도착해서 섬, 신발 벗음을 알아차리며 침대에 내려앉고, 몸을 눕히고 베개에 머리를 눕히는 동작을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그의 머리가 베개에 닿기 전에 그의 발이 마루로부터 떨어져 허공에 있을 때 아난 존자는 3가지 연속적인 사카다가미, 아나가미,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4가지 명상, 행주좌와와 별개로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아라한입니다. 아난 존자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 모든 업을 벗어내고 더 이상의 ‘존재의 과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를 받은 이래로 수다원이었고, 이미 악행을 거부해 왔습니다. 아라한이 되면서 모든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윤회로부터 존재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수행자들은 건전하거나 불건전한 행위의 완전한 결과가 시간이 무루 익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에 힘쓰기를 바라고 모든 수행자들이 수행을 부지런히 하여 아라한 도를 성취해 윤회에서 벗어나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고통의 소멸, 열반을 실현하시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4. 실라 완따 수타
오늘 법문의 주제는 Khandha Vagga Samyutta에 언급된 Sila Vanta Sutta(경)입니다. 이 경전에는 위빠사나 명상의 상세한 방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경전은 명상 수행의 절차를 명료화하고 있어서 수행자들에게 적당합니다. 마하코티카 존자가 질문하면 사리불 존자가 그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경전입니다. 결집 시에 이 경전은 서두와 함께 시작하는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옛날 사리불 존자와 코티카 존자가 바라나시 숲 속 사원에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코티카 존자가 팔라삼마 파티를 수행한후 사리불 존자를 방문했습니다. 둘 사이에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고간 후 코티카 존자가 사리불 존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하테라로 잘 알려진 이들의 자격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지혜가 제일이었고, 유식하고 부처님의 주요한 제자였습니다. 코티카 존자는 분석적 지식에 가장 뛰어났습니다.
분석적 지식은 다음 4가지와 같습니다.
1) 아타 분석적 지식: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참된 의미, 목적, 결과, 기능적 의식을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2) 다마 분석적 지식: 결과를 낳은 모든 원인, 성도, 법에 반영된 말들, 법에 관심을 갖는 범주 안에 들어온 지식을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3) 니루터 분석적 지식: 실재에 상응하는 언어의 지식, 그리고 언어에 관심을 갖는 양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4) 파티바나 분석적 지식: 준비된 기지의 분석적 지식을 이해함으로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미에서 법을 전수해서 모든 사람들이 의미를 쉽게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분석적 지식을 소유한 모든 아라한들 중에서 코티카 존자가 부처님 다음으로 위대했습니다. 둘 다 성인이었고 성스러움의 8단계를 실현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 기록된 질문과 답변은 모든 축면에서 명상의 명료화를 위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 기록된 답변은 다음 세대를 위한 전래와 참고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티카 존자는 ‘성스러운 계를 준수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명상을 수행해야 하는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를 완벽히 준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단순히 명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코티카 존자의 질문은 명상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계를 완전히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또한 Sila Vanta 경전에 언급된 것처럼 명상 수행을 진지하게 착수하기 전에 법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명상 수행을 최소한도의 법에 대한 지식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몸과 마음이 모두 무상하고, 고통이고, 무아라는 것에 친숙하다면, 그는 명상 수행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리불 존자의 응답은 계를 완전히 준수하는 이는 5온에 대해 명상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5온이란 색(물질), 수(느낌), 상(지각), 행(의지), 식(의식)을 말합니다.
대념처 경전에 포함된 가르침에 따라서 여기 수행자들은 5온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왼발, 오른발의 움직임에 대해 알아차림 할 때, 왼발의 움직임은 색온이며, 좋고 나쁨의 감정은 수온이며, 걸음의 알아차림은 상온이며, 걸음을 놓으려는 노력은 행온입니다. 그리고 걸음을 띠는 것을 아는 것은 식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5온의 몸과 마음의 과정을 모두 요약하면, 걸음은 물질이고, 알아차림은 마음이며, 여기에는 오직 마음과 물질만이 존재합니다. 상세히 말하면 그것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5온입니다.
만약에 수행자가 몸과 마음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차림 하지 않는다면 수행자는 ‘나는 가고 있다, 어떤 가람이 가고 있다. 또는 어떤 여자가 가고 있다.’고 가정할 지 모릅니다. 이런 믿음은 자만이라는 실재의 잘못된 관념입니다. 이른바 이것이 집착입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일어남, 사라짐은 색온이며, 좋고 나쁨의 감정은 수온입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알아차림은 상온이며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은 행온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식온입니다.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과 대상은 색온이고, 감정은 수온이고, 알아차림은 상온, 노력은 행온, 알아차림은 식온입니다. 모든 알아차림은 5온의 집착이지만 간단히 5온(Khandha)이며 물질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행자가 5온의 참 본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나, 남자, 여자와 같은 에고적 실재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관념은 집착이라 불립니다. 4가지 집착은 감각적 집착, 견해의 집착, 규칙과 예식의 집착, 인성과 믿음의 집착 등입니다.
사리불에 의해 주어진 답은 5온에 대해 명상하라는 것입니다. 5온을 명상함으로서 발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답의 폭은 넓지만 요약하면 명상은 무상, 고통, 무아를 깨달을 때까지 행해져야만 합니다. 명상을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 지에 대한 질문은 다음 문제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답했습니다.
“나의 도반 코티카여, 계를 준수하고 5온을 명상하는 이는 점차적으로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식,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지식, 그리고 급속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영원한 현상을 인식하며, 결국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을 깨달아 수다원 도과를 성취하여 소타파나 아리야의 성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침내 수다원 도과 지혜를 획득했을 때는 아디파나(엄숙한 서원과 결정)를 줌으로서 검증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엄숙한 결심을 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 상태를 오랫동안 도달하도록 하십시오. 오랫동안이란 말은 30-45분 또는 두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와 같은 서원이 성공적으로 성취다면 두 번째 시험에 들어갑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모든 현상의 소멸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서원이 성공하면 수행자는 오랫동안 알아차림 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짧은 시간 동안 모든 현상의 소멸이 쉽게 성취됩니다. 다음 세 번째 서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현상의 소멸에 자주 도달하게 하십시오.”
어떤 수행자는 성공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적멸에 자주 이릅니다. 4번째 서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적멸의 상태를 이번 좌선에 이르게 하라. 그리고 다음번에 이르지 못하게 하라.”
다섯 번째 서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적멸을 성취한 후 오전 10시에 의식을 다시 얻게 해 달라. 또는 30분 안에 의식을 다시 보게 해 달라.”
어떤 수행자는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실망하지 말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도해야 합니다. 검증 과정이 성공적이고 성취가 확실하면 다음 단계는 상위 등급을 향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코티카 존자는 다시 사리불 존자에게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수다원 도과를 획득한 후에 사카다가미를 획득하기 위해 무엇을 명상해야 하는가?”
사리불은 다음가 같이 답했습니다.
“그런 이는 같은 5온에 대하여 명상해야 합니다.”
한 단계 올라선 수행자는 확고한 서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이전에 획득한 모든 법을 버리고 경험해 보지 못한 더 높은 법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같은 방법과 수행이 반복됩니다.
한 단계 올라선 수행자는 초기 단계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대개 그들은 급속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항상 새로운 현상의 인식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다야바야 지혜입니다. 거기에서 수행자는 방가 지혜, 바야 지혜, 아디나바 지혜, 니비다 지혜, 문시투 카마야타 지혜, 상카루페카 지혜, 아누르마 지혜 등을 통과하여 마지막으로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에 이르며, 사카다가미-마가와 팔라 지혜를 얻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얻은 후에 똑같은 입증의 과정이 필요하고, 오랫동안의 소멸을 위해서 확고한 서약과 결심이 필요합니다. 검증이 필요할 때까지 소멸이 짧은 순간에 또는 자주 또는 필요한 시간에 의식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코티카 존자는 사리불 존자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길을 얻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답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같은 5온에 대해 명상해야만 합니다.”
사카다가미의 사람은 우다야바야 지혜로부터 시작해서 지혜의 진보적인 단계를 통과하여 적당한 시기에 아나가미 도과를 획득합니다. 아나가미 도과를 획득한 사람은 더 이상의 감각적 갈망, 나쁜 의지, 분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나가미를 이룬 이는 세속적 삶을 떠나 8단계를 영원히 준수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의 활동적 분노나 소극적 분노도 없습니다. 근심이나 비탄도 없을 것입니다. 아나가미의 성취는 아디타나스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모든 검증이 성공적으로 끝날 때까지 짧은 순간에 오랫동안 종종 일어나는 그리고 고정된 시간에 다시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위한 확고한 서약과 결심이 필요합니다.
코티카 존자는 좀더 높은 수행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나가미를 이룬 사람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도 물었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답했습니다.
“아라한의 도를 바라는 자 역시 5온에 대하여 명상하여야 합니다.”
만약 아나가미가 위빠사나 지혜의 점차적인 진보에 의해 5온을 명상하면 적당한 시기에 아라한을 이룰 것입니다. 그가 5온을 명상할 때 우다야바야 지혜로 되돌아갈 것이고 다른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를 통과해서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을 깨닫고 아라한과를 실현할 것입니다.
아라한과의 성취는 오랫동안 혹은 잠깐 동안 자주 발생하는 의식의 소멸과, 규정된 시간에 다시 의식을 회복하는 같은 과정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그와 같은 방법의 검증을 거친 후, 성취가 확인되면 아라한을 이룬 사람은 계속된 수행의 결과 아라한과를 향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탈속적인 결과에 도달하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수행이 필요합니다. 다른 3개의 탈속적 도를 이룬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소타파티 도를 실현한 자가 만약 규칙적인 수행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길은 쉽게 도달할 수 없고 쉽게 그 결과를 향유할 수도 없습니다. 사카다가미를 이룬 자가도 만약 규칙적 수행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도과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아나가미를 이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인의 특성을 극복하고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이고 부지런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코티카 존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라한을 획득한 사람은 무슨 법에 대하여 명상해야 합니까?”
사리불 존자가 답하였습니다.
“아라한과를 얻은 후에도 또한 5온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이 5온에 대한 명상으로서 더 높은 단계의 파제카 부처님(독각) 또는 삼막삼붓다(완전한 깨달음, 보편적 불성)를 얻을 수는 없으나 현생 동안 법열을 향유할 것입니다. 5온에 대한 지속적이며 부지런한 수행에 의해서 그의 의지대로 손쉽게 탈속적 도과를 향유할 수 있으며 그가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속적 잡사에 얽매이지 않고 탐욕, 분노, 미혹과 관련된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계율과 경전, 법에 관한 일반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5온의 집착에 대한 명상에 의해 소타파나를 획득하고 같은 과정의 반복적 수행을 통해 사카다가미, 아나가미,그리고 아라한과를 계속적으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코티카 존자와 사리불 존자의 질문과 답변을 들을 기회를 가짐으로서 우리 모든 수행자들은 5온의 집착에 대한 관찰하고 빠른 시간 안에 열반에 이르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5. 4대 요소
오늘 법문의 주제는 4대 요소의 분류와 구분에 관한 것입니다. 요소란 전체를 이루는 궁극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부처님께서 사티를 상세히 설명할 때, 대나무를 사티의 예로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티를 육체, 감정, 마음, 법(마음의 대상)으로 분류했는데 그것은 마치 대나무를 4부분으로 자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중 육체를 명상하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1)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2)움직임의 방식에 대한 알아차림(행주좌와)
3)42개 몸의 부분에 대한 의식의 명료성
또한 부처님께서는 4념처 가운데 육체를 다시 14가지 작은 부분(색취)으로 구분하셨는데 그것들은 지, 수, 화, 풍, 색, 성, 향, 미, 촉, 안, 이, 비,설, 신 등입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14개의 분류 가운데서 5번째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함으로서 모든 수행자들이 인성과 에고에 대한 집착을 덜게 되고 모든 존재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모든 수행자는 명상에 들 때 육체를 여러 요소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명상하는 방법은 육체가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명상을 통하여 이 몸이 나의 몸, 소유물이 아니라 단지 4가지 구성요소, 지(흙의 요소, 딱딱함) 수(물의 요소, 액체) 화(불의 요소, 열) 풍(바람의 요소, 운동)들의 집합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 중에서 흙의 요소란, 1)머리의 털 2)몸의 털 3)손톱 4)치아 5)피부 6)살 7)힘줄 8)뼈 9)골수 10)신장 11)심장 12)간장 13)막 14)비장 15)폐 16)위 17)창자 18)식도 19)배설물 20)뇌 등을 일컫습니다.
만약 육체를 이러한 구성 부분들로 분류할 수 있게 되면 수행자는 더 나아가 육체에서 42개 품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의 20개 품목은 그중 흙의 요소들입니다. 그것들의 특징은 딱딱함, 부드러움, 거침, 유연함, 무거움, 가벼움 등입니다. 뼈를 만지면 딱딱하고 머리카락을 만지면 거칠고 살은 유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이것들은 다른 특징들입니다. 행선을 위해 다리를 들어올릴 때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가벼움을 느낍니다. 수행자가 이 요소들에 대해 명상할 때 수행자는 명상된 요소들의 이름을 따라서 알아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수행자가 다리를 들어 올릴 때 무거움을 느끼면, ‘무거움, 무거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이는 머리의 무거움을 경험하는데 그것 또한 ‘무거움’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서 그는 흙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엉덩이의 거침과 딱딱함을 알아차림 하는데 그것 또한 흙의 요소입니다. 행선에서 어떤 때는 발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 부드러움을 느끼는데 그 때도 흙의 요소에 대해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한 때로 걸음이 무겁고 가볍고 몸이 뜨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발생할 때 그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흙의 요소입니다. 수행자가 그것이 발생할 때 이러한 특징들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은 흙의 요소를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흙의 요소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그는 4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인 흙의 요소에 대해 명상 관찰한 것입니다.
딱딱함, 유연함, 거침, 부드러움, 무거움, 가벼움 등은 서로 다르게 정의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흙의 요소일 뿐입니다.
딱딱함이란 말을 분석해 봅시다. 만약 철과 벽돌과 흙을 비교해 보면 철이 벽돌보다 더 딱딱합니다. 그리고 벽돌은 흙보다 딱딱합니다. 벽돌은 철보다는 부드럽고 흙보다는 딱딱합니다. 그러므로 딱딱함과 부드러움은 모두 흙의 요소일 뿐입니다. 다시 흙을 진흙과 비교해 보면 진흙이 더 부드럽습니다. 흙은 벽돌보다는 부드럽고 진흙보다는 딱딱합니다. 그러므로 딱딱함과 부드러움은 요소를 분류함에 있어서 흙의 요소일 뿐입니다.
거침과 매끄러움을 비교해 봅시다. 거친 무명으로 만든 옷은 거칠지만 좋은 무명으로 만들어진 포플린 옷은 매끄럽습니다. 그러나 포플린 옷은 실크에 비하면 거칩니다. 실크는 더 좋은 옷감과 비교하면 거칠게 됩니다. 거침과 매끄러움은 비교에 의해서 정의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요소의 분류에 있어서는 같은 것입니다.
무거움과 가벼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측정단위 10비스와 5비스, 1비스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5비스는 더 무겁고 1비스는 가볍습니다. 1/2비스와 1/1비스도 같습니다. 1비스와 비교하면 1/2비스는 가볍고 1비스는 더 무겁습니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정의이지만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움과 가벼움은 요소들의 분류에 있어서 흙의 요소일 뿐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딱딱함과 부드러움, 무거움과 가벼움, 거침과 매끄러움을 관할 때 그것은 흙의 요소에 대해 알아차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흙의 요소는 머리카락부터 두뇌까지 우리 몸에서 20개의 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의 요소의 특징은 유동성과 응결성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12개의 물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1)담즙 2)담 3)고름 4)피 5)땀 6)눈물 7)고체지방 8)액체 지방 9)침 10)가래 11)활액 12)소변 등입니다. 물의 요소의 특성은 유동성과 응결성인데, 건조한 부분은 응결성인 물의 요소에 의해 함께 결합됩니다. 빵을 구울 때 밀가루를 물에 섞은 후에 구워야 빵이 됩니다. 물은 밀가루를 결합시키는 주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유동성, 응결성을 관할 때는 몸 안의 물의 요서에 대해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흙의 요소 20개와 물의 요소 12개를 합치면 32개의 요소가 되는데, 그것은 1)머리털 2)몸 털 3)손톱 4)이빨 5)피부 6)살 7)근육 8)뼈 9)골수 10)신장 11)심장 12)간장 134)막 14)비장 15)폐 16) 위 17)창자 18)식도 19)배설물 20) 뇌 21)담즙 22)담 23)고름 24)피 25)땀 26)고체 지방 27)액체 지방 28)눈물 29)침 30)점액 31)활액 32) 오줌 등입니다.
다음으로 열의 요소에 4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우선 산타파나 테조(열)는 높은 열의 온도에 도달하기 전의 보통의 체온입니다. 2)두 번째 지라나 테조는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열입니다. 망고가 다 익지 않았을 때 더 많은 열을 가해야 가듯, 이 열은 더욱 성숙되고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입니다.
3)세 번째 다하 테조는 매우 심한 열인데, 이 열이 몸에 가해졌을 때, 참을 수 없는 열 때문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울 수밖에 없는 열입니다.
4)네 번째 파짜카 테조는 음식의 소화에 도움이 되는 열입니다. 수행자 몸 안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알아차림 하면 열의 요소에 관한 명상이 완성됩니다.
마지막은 운동 또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여기에는 6가지 종류의 요소가 있습니다.
1)우단가마는 위로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하품, 딸꾹질, 트림 등이 그것입니다.
2)아도가마는 아래로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대소변, 방귀 등이 그것입니다.
3)쿠시타는 위의 장애를 일으켜 소음을 만드는 바람입니다.
4)코타사야는 장 안에 있는 바람입니다. 장 안의 음식을 압박합니다.
5)엔가수사리는 손, 다리, 눈의 열고 닫음 등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람입니다.
6)아사사파사사는 들숨, 날숨을 말합니다. 이것을 명상하기 위해서는 몸을 똑바로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서 있음을 알아차림 할 때 그것은 바람의 요소를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복부의 일어남, 사라짐의 요소도 바람의 요소이며, 그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도 바람의 요소를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좌선을 할 때 등 뒤에서 뻐근함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그것도 바람의 요소이며, 행선할 때 걸음을 앞으로 내걷는 것도 바람의 요소입니다. 수행자가 팔다리의 동작을 알아차림 하는 것 모두가 바람의 요소를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해 보면 모두 42개의 품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흙의 요소 20개, 물의 요소 12개, 열의 요소 4개, 바람의 요소 6개가 그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에 대해 더 말씀하시기를, 도살자가 소 한 마리를 죽인 후 네거리에 두면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시체로 여기지만, 도살자가 소를 작은 덩어리의 고기로 잘라 버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소고기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5온도 나의 몸, 나의 소유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지수화풍의 4대 요소로 분리되면 거기에는 42개 품목에 집착하는 더 이상의 자아나 개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에 의해서 우리는 에고라는 실재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의 사카야 디티는 전적으로 포기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깨달은 수행자는 도과와 열반의 획득을 향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든 수행자들은 5온을 형성하고 있는 4대 요소, 즉 지수화풍에 관해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몸은 단지 4대 요소의 집합체이며, 그것에 의존하는 아상이나 인성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4대 요소에 대한 지속적인 알아차림과 몸의 참 본성을 깨달아 모든 수행자들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열반에 이르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6 원인과 결과를 구별할 수 있는 이는 작은 소타파나이다.
오늘의 법문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할 수 있는 이는 작은 소타파나(사다함)이다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소타파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일정 기간의 수행을 마친 수행자는 단지 물질과 마음만이 있을 뿐, 자아란 실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 단계 후에 수행자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인과의 지혜가 분명한 비전에 의해 이해되기 전까지는 삶의 윤회에 관한 적절한 지견이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는 영혼이란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서,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영원불변한 실재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영원성의 믿음’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자아라는 실재의 지속적 존재에 대한 신념입니다. 그것은 또한 육체적 정신적 과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삶을 구성하고 사후에도 계속됩니다.
반면 절멸의 믿음을 갖는 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나 성격이란 단지 정신적 육체적 과정과 동일한 것이며 사후에는 해체되어 소멸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는 모든 중생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념이 잘되고 못되었다는 비판이나 판단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처님의 교리를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윤회적 존재는 결과를 잉태하는 원인의 산물로서 발생합니다. 연기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업의 형성은 무명을 통해 일어나는데, 연기(緣起)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Snakkara paccaya vinnanam
전생의 업의 형성에 의해 의식이 생겨납니다.
Vinnana paccaya nama rupam
의식을 통해 이른바 개인적 존재를 구성하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생겨납니다.
Nama rupa paccaya salayatana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통해서 6관이 생겨납니다. 5가지 육체적 감각기관과 6번째의 의식
Salayatana paccaya phasso
6관을 통해서 감각적 인상(접촉)이 생겨납니다.
Phassa paccaya vedana
인상을 통해서 감정이 생겨납니다.
Vedana paccaya tanha
감정을 통해서 갈애가 생겨납니다.
Tanha paccaya upadanam
갈애를 통해서 집착이 생겨납니다.
Upadana paccya bhavo
집착을 통해서 생성의 과정 즉 능동적 소극적인 삶의 과정과 재생을 생산하는 업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재생의 과정이 생겨납니다.
Bhava paccaya Jati
생성의 과정 (업을 생산하는 재생)을 통해서 재생이 생겨납니다.
Jati paccaya jaramaranam etc
재생을 통해서 생로(슬픔과 비탄)가 생깁니다. 따라서 고통의 모든 덩어리들이 미래에 다시 발생합니다.
다음으로 업과에 의해 연기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펴볼 때 모든 사람이 머리와 어깨는 같지만 제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불일치성에 관해, 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수바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가 부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이는 장수 혹은 단명하고, 어떤 이는 건강하고 혹은 나약하며, 어떤 이는 예쁘고 어떤 이는 추하며, 어떤 이는 많은 친구와 하인을 갖고 있는데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하며, 어떤 이는 부자이거나 혹은 가난하고, 어떤 이는 유식한데 어떤 이는 문맹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불일치성은 업의 결과 때문이다.”
젊은 수바는 그 답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부처님께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장수는 이전의 행위에 의존하며, 살인을 저지른 이는 단명하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이는 장수합니다. 살인은 원인이며, 단명은 결과입니다. 살인하지 않음은 원이이고 장수는 결과입니다.
남에게 잔인한 행위를 한 이는 몸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남에게 친절한 이는 건강합니다. 젊은 수바여, 어떤 이는 쉽게 분노하여 모습이 잔인하고 흉측하게 되고, 남에게 희롱하는 말을 쓰게 되는데, 그러한 불건전한 말과 행위로 인해 그는 욕계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또한 인간 세계에 나더라도 추한 외모를 갖게 됩니다.
친절하고 인내심 있는 이는 매력적인 용모를 갖습니다. 친절과 안내는 원인이고 매력적 용모는 결과입니다. 어떤 이는 남을 시기하고 어떤 이는 다른 이의 성공과 번영을 부러워하는데 그런 이는 친구나 협력자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다른 이의 성공에 행복해 하고 동정적 기쁨을 갖는데 그런 이는 많은 친구를 갖게 됩니다.
동정적 기쁨을 갖는 것은 원인이고 많은 친구를 갖는 것은 결과입니다. 시기하고 부러워함은 원인이고 친구가 없음은 결과입니다. 관대하고 타인에게 공양을 베푸는 이는 성공적이고 부유합니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공양을 하지 않는 이는 가난합니다.
어떤 이는 배우려 하지 않고 그들의 지식을 타인과 나누려 하지 않는데 그런 이는 결과적으로 문맹이 됩니다. 어떤 이는 배우는데 힘쓰고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려 하는데 그런 이는 지적이며 유식합니다. 이것이 업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항상 변화하는 원인과 결과를 의미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수행을 상세히 연구할 때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행선할 때 걸으려는 의도는 원인이며, 걸음은 결과이고, 걸음이 원인이면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같은 비유가 들어올림, 나아감, 놓음의 동작에도 적용됩니다. 들어 올리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들어올림은 결과입니다. 들어올림이 원인이면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배의 모습을 알아차림 할 때 들숨의 원인이고 배가 올라옴은 결과입니다. 배의 오름은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가 됩니다. 대상을 볼 때 수행자는 보는 것이 ‘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이 작용할 뿐입니다.
모습을 알아차림할 때 1)좋은 시력 2)빛 3)볼 대상 4)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은 원인이고 ‘봄’은 결과입니다. 다음에 보는 것은 원인이고 ‘봄’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들음을 알아차림 할 때 1)좋은 귀 2)소리의 존재 3)소리와 귀 사이의 장애 없음 4)의식의 존재 이 네 가지 요소들은 원인이고 ‘들음’은 결과입니다. 들음은 원인이고 들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먹음을 알아차림 할 때 10좋은 혀 2)좋은 맛 3)액체의 존재 4)의식의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4가지 요소들은 원인이고 맛의 발견은 결과입니다. 다음에 맛의 발견은 원인이고 맛의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감각을 알아차림 할 때 거기에는 1)몸의 의식-감각적인 몸의 특성(몸의 의식이 손상되면 감각이 없고 손톱의 끝, 죽은 피부 또한 감각이 없다) 2)대상의 존재 3)실재적인 닿음의 존재 4)감각 의식의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4개의 요소들은 원인이고 촉감(닿음의 감각)은 결과입니다. 촉감은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냄새를 알아차림 할 때 거기에는 1)좋은 코 2)향의 존재 3)냄새를 풍기는 바람 4)의식의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이 4가지 요소들은 원인이고 냄새는 결과입니다. 다음에 냄새는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봄, 들음, 냄새 맡음, 먹음, 닿음 들은 모두 원인이고, 그것들을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해 수행자들은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과는 원인 없이는 나타날 수 없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중생 또한 원인과 함께 나타납니다. 중생의 모든 행위는 업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윤회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들은 그 과정이 아라한 도에 의해 종식될 때까지 스스로 반복될 것입니다. 업의 원인이 존재할 때 그 결과로 마음과 물질이 생성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들이 재생, 존재의 운명을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경전에서 묘사되기를 숲에서 소리가 나면 메아리로 돌아옵니다. 이쪽에서 만들어진 소리는 원인이고 돌아온 메아리는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그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사람은 원인이고 모습은 결과입니다. 고무도장의 예도 같습니다. 고무도장에 잉크를 묻힌 후 종이에 찍으면 종이 위에 문양이 생깁니다. 고무도장은 원인이고 문양은 결과입니다.
촛불의 예를 들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촛불을 두 번째 촛불에 붙이면 첫 번째 촛불은 원인이고 두 번째 촛불은 결과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중생의 마음과 물질의 생성은 결과이고 업이 생산하는 재탄생은 원인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법에 의해서 우리는 조건성과 존재의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의 끊임없는 흐름 속의 상호 의존성을 깨닫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과정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지속적인 자아나 존재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주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생성의 업보 과정이 낳은 재탄생을 통해 마음과 물질이 일어날 뿐입니다. 전생의 선업을 통해 좋은 현생이 결과로 나타나고 전생 악업이 불행한 현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교리가 이제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명상 수행을 통해 그 자신의 경험으로 이해한 이는 작은 소타파나로 불립니다. 그런 분명한 견해가 각성되면 더 이상의 욕계로의 재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야도는 여기 모인 수행자들이 원인과 결과를 분리하는 지혜를 획득하고 단계적으로 향상되어 가능한 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고통의 종식, 즉 열반을 실현하기를 빌며 오늘의 법문을 끝낼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7 질병을 위한 법 치료
오늘은 ‘질병을 위한 법 치료’란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법 치료에 의해 인간의 어떤 고통이 치료되거나 완화되었다는 보고는 있어왔습니다.
인간의 작업에 장애를 주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 옛날에는 96개의 주요한 그룹의 질병이 있었고, 그 가운데 32개는 점액과 관련된 질병이며, 32개는 담즙과 관련된 것, 그리고 32개는 바람의 요소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대에는 에이즈와 같은 악성의 셀 수 없는 질병들이 추가되어 왔습니다.
그와 같은 장애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적이고 재래적인 의술이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것도 이상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충고하셨습니다.
“비구여, 법이라고 하는 약보다 더 효과적인 약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부지런히 수행함으로서 법 치료를 하십시오. 법 치료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번뇌에 의한 장애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제거됩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요약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법치료를 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행선을 알아차림 하고 좌선에서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하거나 6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현상, 즉 아픔, 통증, 생각, 망상 등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 법 치료술에 의해 그의 제자를 치료하곤 했습니다. 한 때 마아가섭과 목갈라나가 병이 불자 부처님께서는 보장가경전 깨달음의 7개 요소를 암송했습니다. 여기서 깨달음의 요소란 ‘알아차림, 법의 연구, 힘, 환희, 고요, 집중, 평온함’이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암송을 듣는 동안 두 존자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명상하여 깨달음의 7가지 요소를 활성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질병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병이 드셨을 때도 쿤다 존자가 그 경전을 암송했고, 깨달음의 7가지 요소들을 활성화시켜 병으로부터 회복되셨습니다.
병에 의한 고통은 과거의 불건전한 행위의 결과이며, 법을 듣는 건전한 행위에 의해 대치될 수 있습니다. 새 물을 밖에서 파이프로 채움으로서 막힌 것을 뚫어 물의 흐름을 재생시키는 원리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시작에, 중간에, 마지막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이익이 있습니다. 지역 의사에게서 한 달 간 더 살 수 있다고 선고받은 사람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몇 년의 수명을 더 연장한 경우도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진지하게 수행하면 깨달음의 7가지 요소들을 개발시킵니다.
예를 들면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할 때, 그 알아차림이 그 순간 현재하고 방해되지 않습니다. 그때 알아차림은 더욱 향상됩니다.
또한 알아차림에 들어 있는 동안 법에 대해 더 현명하게 연구 또는 명상하고 육체적 현상과 알아차림 하는 정신적 현상을 분명히 지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요소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그의 노력이 확고할 때 깨달음의 요소인 힘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초감각적 환희, 즉 몸의 빛, 진통, 몸 전체의 차가움 등이 일어나고 그는 환희의 요소를 계발하게 됩니다. 환희에 빠져들 때 몸과 마음은 조율되고 진정됩니다. 그와 같은 때 고요함의 요소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몸이 조율되었을 때 알아차림 하는 마음이 고정되고 그 알아차림은 알아차리게 되는 대상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때 집중의 요소가 향상됩니다.
마지막으로 좋고, 나쁨, 기쁨, 불쾌감과 관계없이 모든 대상을 명상할 때마다 평온의 요소를 향상시키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와 고요함이 결과적으로 육체적 장애를 회복시킵니다.
어떤 일본인 여신도가 차 사고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해 왔는데 위빠사나 수행으로 완치되었고 한국 아마라요 스님이 만성적 심장병으로부터 완치되었다는 적절한 증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에 일치해서 부지런히 관찰함으로서 정신적 육체적 장애로부터 벗어나기를 빕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8 선호할 수 있는 4가지 길-1부
오늘 나는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4가지 다른 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1)나쁜 길
2)좋은 길
3)더 나은 길
4)최선의 길
나쁜 길이라 일컬어지는 첫 번째 길은 4욕계로 인도합니다. 좋은 길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길은 인간이나 천상의 존재로 인도합니다. 더 좋은 길로 일컬어지는 세 번째 길은 범신의 세계로 인도하는데, 범신의 세계란 천신(데바)의 세계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네 번째 길은 모든 불자들의 궁극적 목적인 고통의 소멸, 열반의 실현인 최선의 길입니다.
이 네 가지 다른 길 가운데 모든 중생들은 선호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란 보석으로 가득 찬 산 위에 착륙하는 것과 같습니다. 산 위의 보석들 가운데는 루비, 사파이어, 토파즈는 물론 연석이나 일반적인 돌 등도 있습니다. 산으로 내려가서 중생들은 루비나 사파이어, 토파즈를 주울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돌들을 선택할 위치에 있습니다. 4욕계, 인간이나 천상, 범신의 세계, 열반의 실현 중에서 인간 존재를 획득하는 것은 취사선택의 문제입니다.
나쁜 길은 욕계의 세계로 인도하는 악행을 범함을 의미합니다. 공양이나 계의 준수를 실행하는 이는 인간이나 천상의 존재로 인도될 것입니다. 자비관이나 선정 수행을 하는 이는 더 고귀한 범신의 세계에 도달합니다. 계와 선정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한 이는 열반, 즉 4가지 길 가운데서 최선의 길을 획득할 것입니다.
사야도는 모든 분들이 이 4가지 길 가운데 좋고, 더 나은, 그리고 최선의 길을 택하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오늘 나는 악행의 결과로 4욕계로 가게 되는 불건전한 행위에 대해 상세히 해석하고자 합니다.
불건전한 행위란 ‘나쁜 결과를 맺는 죄가 되는 행위’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죄가 되는 행위를 저지르면 나쁜 결과가 옵니다. 아무도 모르게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고 해도 그 비밀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그 행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강박관념이 되어 자신의 악행을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기꾼으로 책망하지만 사실은 사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빨리어로 그러한 자기 책망 또는 자기 비판은 아타누바다 고통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러한 해악이 행해진 것을 봤다면 그들은 분명히 이 사람이 불건전한 행위 또는 언행을 저질렀다고 책망합니다. 빨리어로 이것은 파라누와다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이가 죄를 범했다면 그는 죄에 상응하는 감옥형을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단다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 벌금형이나 무기에 의한 보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후에 그는 두가티라 불리는 4욕계에 도달합니다. 이는 살인, 도둑질, 간통과 같은 불건전한 행위와 망어妄語(거짓말), 양설兩舌(두말), 악구惡口(욕지거리), 기어綺語(꾸밈말)와 같은 언어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즉, 남에게 불리한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 절친한 친구 간에 중상모략 하는 것, 증오를 야기하는 거친 말로 농락하는 것, 천박한 잡담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3가지 정신적 부도덕한 행위인 탐진치도 불건전한 행위에 속하는데, 남의 소유물을 탐내는 것,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들을 향한 나쁜 의지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의 불행을 바라는 일종의 분노 또는 질투와, 건전한 행위에 의해 획득될 이익을 없다는 잘못된 견해 즉 나쁜 행위가 불이익하지 않다는 공덕에 대한 불신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10가지 우파킬레사 또는 순수하지 않음은 오직 나쁜 결과만을 낳습니다. 언젠가 젊은 수바가 부처님께 질문을 올렸습니다.
“왜 사람들은 같은 특권을 갖지 못합니까? 예를 들면 어떤 이는 장수하고 어떤 이는 단명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살인을 범해 지옥에 떨어지고 그후에 비록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단명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금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는 자는 장수합니다. 도적질한 자도 불리한 결과를 갖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섯 가지의 적, 물, 불, 사악한 왕, 강도, 나쁜 기질의 후계자에 의해 파괴되거나 방해받게 됩니다.
잘못된 성행위를 한 자들은 그 결과 다른 이의 증오, 많은 적, 가난한 삶을 받습니다. 중성인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거짓말한 이는 그 결과로 말더듬이로 태어나고 또는 고르지 못한 치아, 추한 외모, 입안의 악취로 고통받습니다. 그들은 거친 말을 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중상모략의 결과는 사랑받는 이로부터의 이별입니다. 나쁜 의지를 범하면 그 결과 경제적 퇴락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건전한 혹은 불건전한 행위는 그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건전한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지만 불건전한 행위는 내생에 있어서 4욕계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떤 비평가는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욕계에 떨어진다는 것에 대해 부처님께서 상세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논쟁을 걸어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데바두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신성한 눈으로 마치 어떤 사람이 인접한 집의 거주자를 분명히 보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의 상태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육체적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자, 부도덕한 언행, 부도덕한 사고, 잘못된 사고를 한 이들이 사후에 지옥이나 동물, 괴물의 세계에 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성한 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해악의 정도에 따른 중생의 고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부도덕한 행위, 언행, 생각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큰 물통을 채우는 것처럼 작은 부도덕한 행위도 쌓이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이를 입증하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대 모가랄라 존자가 라카나 존자와 함께 기자쿠다 산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모가랄라 존자가 무언가를 보고 미소 지었습니다. 라카나 존자가 그에게 미소의 의미를 묻자, 그는 오직 부처님 앞에서 그 이유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라카나 존자는 다시 부처님 앞에서 그 이유를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가랄라 존자는 부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큰 뱀을 보았습니다. 그 큰 뱀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불로 덮여 있고 때로는 불이 다른 끝 부분에서 시작해서 중앙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큰 뱀은 열과 고통으로 몸부림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 때문에 웃은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그런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미소 지은 것입니다.”
모가랄라 존자의 이 말은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종류의 고통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시면서 모가잘라의 말을 확인하셨습니다. 아라한을 획득한 나의 제자는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전지한 불성을 획득했을 때 나의 신성한 눈을 통하여 그러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비전을 나 스스로 간직하고 있지만, 이제 나의 제자들도 그러한 비전을 봤으므로 타는 뱀의 이야기로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옛날에 붓다 카사파 시절에 수만갈라란 부자가 큰 수도원을 세워 부처님께 보시했습니다. 그는 카사파 부처님을 아주 존경해서 그 수도원으로 매일 찾아가 청소하고 정돈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아오는 길에 노란 색 가사를 덮고 자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수만갈라는 그 가사를 들어 올려보고,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발에는 진흙이 덮여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도둑이 분명하며 밤에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후 노란 가사로 스님처럼 가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만갈라가 이 사람은 가짜 스님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도둑은 매우 흥분하여 언젠가 복수하고 말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만갈라의 농장에 불을 놓고 악의를 가지고 그 부자의 소를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인내심이 강하고 침착했습니다. 그는 그저 업의 법칙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저지하거나 수정할 수 없음을 관찰하자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도둑은 수만갈라가 인내심이 있고 비탄해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수만갈라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카사파 부처님께 보시한 큰 사찰임을 알게 되었고 카사파 부처님과 비구들이 탁발하러 간 사이에 절에 불을 놓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커다란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로 도둑은 오랫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았습니다. 그후 그는 큰 뱀이 되었고 그 나머지 부도덕한 행위가 계속되어 뱀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타는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은 상당 기간 동안 계속 되었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그가 카사파 부처님의 절을 태운 행위의 나쁜 업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언행적, 그리고 정신적 부도덕한 행위와 같은 불건전한 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4욕계의 세계에 떨어질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건전한 행위를 범했다면 구제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과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함으로서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불건전한 행위의 결과를 자연적으로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가장 짧고 손쉬운 방법으로 모든 고통의 소멸, 열반의 획득을 위해서 노력하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19 선호할 수 있는 4가지 길-2부
1부에서는 악행을 한 중생은 4욕계의 세계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인간이나 천상의 존재로 이끌어주는 공양이나 계와 같은 선행을 수행한 중생들이 선호하는 두 번째 길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모든 속인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4가지 길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욕계로 나아가는 길 2)인간이나 천신 3)범신 세계로 인도하는 길 4)열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속인들은 각자의 선호에 따라 이러한 4가지 길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악행에 탐닉한 사람들은 4욕계를 향해서 여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천상으로 인도되는 길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를 성취한 이들은 자동차 운전사처럼, 전등에 의해 조절되는 건널목의 신호등에 이릅니다. 그는 거기서 동서남북 마음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입니다.
선택을 한 이후에 그는 선택한 방향을 향해 차를 몰 수 있습니다. 동쪽을 선택했다면 푸른 등을 기다린 후에 엔진을 가속시킨 후 핸들을 동쪽 방향으로 돌리며 몰면 됩니다. 만약 서쪽 방향을 선택했다고 해도 같은 절차가 뒤따릅니다. 차를 모는 예와 같이 악행에 탐닉한 속인들은 4욕계의 방향으로 차를 모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건전한 행위에 열중한 이들은 인간과 천상의 존재를 행해는 가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선정 수행을 하는 이들은 열반을 향해 가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좋은, 더 나은, 최선의 길은 선행을 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됩니다. 쿠살라는 번역하면 순수한, 그리고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공양을 올릴 것을 결정하면 그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집착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탐욕을 버린 것이며 공양을 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비심을 밝혀야만 합니다. 그 자신의 소유물에 집착을 버린 후에 그는 재산에 대한 탐욕이라는 악행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공양 받는 사람들이 자비심을 밝혀줌으로서 그는 분노를 자비심으로 대치함으로서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공양이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때 그는 삼독심의 하나인 미혹(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사람이 탐진치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그는 순수하게 되며, 좋은 결과가 생깁니다.
일반 대중들은 공양을 존중하고 좋아합니다. 귀족들과 지적인 원로들은 기쁘게 공양주의 집을 방문해서 법문을 하거나 충고를 하는데 그것은 이로운 일입니다. 공양주는 사회에 용기를 주고 조화를 이루며 대중들은 공양주의 선행에 대해 매우 존중합니다. 이외에 공양주는 현생에서는 인간으로 내생에서는 천상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공양하는 것은 선으로 정의됩니다.
계 또한 선행입니다. 계를 준수하는 사람들은 살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고기를 먹으려는 의도에서 살생하면 그것은 탐욕과 관련된 악행입니다. 만약 살생이 해악한 의도에서 범해졌다면 그것은 분노와 관련된 악행입니다. 어떤 이가 살생을 금한다면 탐욕과 분노라는 악을 소멸할 것입니다. 어떤 이가 악행이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미혹함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준수하는 이는 탐진치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는 탐진치와 같은 불건전한 업의 의지와 그와 관련된 의식 및 정신적 부수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좋은 기억과 건강 현생에서의 풍요한 조건과 같은 이로운 공덕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계를 준수하는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명예를 얻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에서 존경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대담성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계를 준수함으로서 생기는 두 번째 이점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평화롭고 분명한 의식 상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는 또한 윤회에서 내생의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계를 준수하는 것은 미래에 있어 좋은 결과를 맺는 고귀하고 건전한 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데바두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셨습니다.
“오, 스님들이여! 어떤 사람이 좋은 눈으로 옆집 사람들의 행동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의 신성한 눈으로 모든 중생의 운명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부도덕한 행위를 범한 이는 죽어서 낮은 4욕계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고 계를 준수하고 공양하고 정견을 갖고 이를 다른 이에게 포교하는 이는 죽어서 더 나은 행복한 존재의 경로에 도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성한 눈으로 모든 선한 이들이 좋은 생을 획득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생에 선행을 한 이는 현생에서 부유하고 건강합니다. 왕, 황제, 영주 또는 부유한 이들은 전생에 선행을 한 이들입니다. 선행으로 천상의 세계를 획득한 이는 타바팀사에 도달합니다. 분석해 보면 이러한 좋은 업적은 전생의 선행의 결과입니다.
부처님 시대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카필라바투 지역의 나가우다이원 사원에 머무르고 계셨을 때, 아누루다 존자가 부처님을 찾아 왔습니다. 아누루다 존자는 그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친척들과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친척들이 돌아간 후 아누루다 존자는 그의 아저씨께 왜 작은 여동생 로히니가 오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여동생이 병에 걸렸다고 하였습니다. 아누루다 존자는 여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병이 부끄러워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누루다 존자가 그녀에게 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제가 문둥병에 걸려 피부와 얼굴이 뭉개져서 그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응답했습니다.
아누루다 존자는 그와 같은 재앙은 전생의 악행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양과 선행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가지고 공양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아누루다 존자는 그녀가 귀한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너의 목걸이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목걸이를 아직도 소유하고 있으며 만 쨑의 값어치는 된다고 답했습니다. 아누루다 존자는 그것을 팔아서 선행에 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녀는 목걸이를 팔아서 사원과 식당을 건축하도록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그곳을 닦고 청소하는 손작업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위층이 완성되었을 때 그 바닥을 매일 쓸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공양, 계, 명상을 수행하도록 지시받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문둥병은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건물 개축식에 부처님과 스님들이 점심 공양을 위해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로히니가 그 자리에 오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문둥병 때문에 오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전생의 잘못과 다시 열거되어야 할 사건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너는 한 국왕의 부인이었다. 거기에 예쁜 하인이 있었는데 왕이 그녀를 총애하자 그것을 질투해서 하인의 침대에 해롭고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가루를 뿌려서 다치게 만들었다. 그러한 나쁜 행위 때문에 너는 지금 문둥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해야만 한다.”
말씀이 끝난 후 부처님께서는 개축식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명상 수행을 할 것을 충고하셨습니다.
그후 로히니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명상 수행을 했습니다. 수도원을 쓸고 닦고 스님들을 위한 식수통을 채웠고 계를 준수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선행을 하고 명상을 하자, 그녀는 소파타나 도를 이루고, 전생의 악행의 결과를 벗겨냈습니다. 그녀의 문둥병은 치유되어서 일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후에 그녀는 천신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천신 세계의 천사가 될 때, 그것은 순간적인 탄생이라 불립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성장한 천신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녀가 가슴 부분으로 닿으면 딸이 됩니다. 때로는 중앙 부분으로 닿을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 논의가 일어나고 거리가 측정되어야 하고 가장 가까운 집에서 소유를 주장합니다. 착륙이 정확히 중앙 부분이 되면 그녀가 바라보는 집에 소유권이 돌아갑니다. 지금 로히니는 정중앙 부분으로 착륙했기 때문에 그녀가 마주 보는 곳이 없어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제의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주 예뻤고 모든 남자 천사들이 자기 소유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문제가 천신의 세계에 보고되고, 천신의 왕이 로히니를 보게 되었는데, 왕도 그도 역시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왕은 법정을 열어 로히니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로히니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한 천신은 모두 4명이었습니다.
왕이 첫 번째 천신에게 묻었습니다.
“네가 로히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오, 고귀한 왕이시여! 내가 로히니를 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전쟁터의 북처럼 크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로히니를 소유하지 않으면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너의 곤경은 이해할 만하다”
왕은 첫 번째 천신에게 답하고 두 번째 천신에게 로히니를 보았을 때 어떻게 느꼈는지 물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내가 로히니를 보았을 때 나의 사랑이 마치 산의 급류처럼 흘렀습니다. 그러므로 로히니를 나의 아내로 주장하게 해 주십시오.”
“너도 또한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는 것 같구나.”
왕은 두 번째 천신에게 답하고 세 번째 천신에게 로히니를 보았을 때 그의 느낌이 어떠했는지를 물었습니다.
“로히니를 보자마자 제가 눈을 감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었고 로히니를 당장 쳐다보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 역시 곤란을 겪는구나.”
왕은 세 번째 천신에게 답하고 네 번째 천신에게 로히니를 어떻게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네 번째 천신은 답했습니다.
“저 기둥의 끝에 있는 깃발처럼 느꼈습니다. 바람이 불면 깃발이 펄럭이듯 나의 사랑도 깃발처럼 펄럭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로히니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자 왕은 단언했습니다.
“네가 겪는 모든 고통은 나의 느낌과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만약 로히니에게 거절 당한다면 나는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다. 어떻게 하겠는냐?”
다른 천신이 응답했습니다.
“왕께서 죽으려고 한다면 우리의 고통은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왕이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왕께서 로히니를 소유하셔도 됩니다.”
결국 아름다운 로히니는 왕이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천신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로히니는 강한 권력을 지니고 천상의 지복을 즐기며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것은 공양과 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공양과 계와 선행을 준수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천상의 존재라는 좋은 길을 향해 여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수행자들이 공양과 계와 선행을 수행함으로서 최선의 길로 여행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고통의 종식, 열반을 쉽고 빠르게 성취할 수 있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0 선호할 수 있는 4가지 길-3부
오늘의 법문은 이전의 법문에서 설명된 바 있는 선호할 수 있는 4개의 길 가운데 3버너째 부분입니다.
앞의 법문에서 우리는 악행을 하는 사람들은 4욕계의 세계로 가는 길을 향해서 여행할 것이고, 공양과 계와 같은 선행을 행한 이는 인간이나 천상의 존재를 향해서 여행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오늘 나는 4개의 선호할 수 있는 길 가운데서 3번째, 너 나은 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더 나은 길은 천신의 세계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범신의 세계의 존재로 인도하는 길을 말합니다. 범신의 세계에서는 천신의 세계에서보다 더 장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천신의 세계와 같이 감각적 쾌락을 위한 갈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양과 계만으로는 범신의 세계로 가는 길을 여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선정 수행은 오직 범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선정 수행을 함으로서 장애들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를 얻은 사람은 기차 교차역에 도달한 사람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교차역에서 여행자는 위쪽이나 왼쪽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은 차표를 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를 획득한 사람은 악행으로 인해 4욕계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공양과 계의 선행을 함으로서 인간이나 천상의 세계를 향해 여행합니다. 선정을 수행함으로서 범신의 세계로 여행할 수도 있습니다.
선정은 장애를 제거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는 5가지 종류가 있는데 1)감각적 욕구 2)나쁜 의지 3)수마(잠) 4)불안 5)회의(의심) 등이 그것입니다.
선정을 수행하는 사람은 감각적 욕구를 버리고 감각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자신의 가슴(마음)을 정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절멸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른바 ‘억제를 통한 극복’으로 불리는 일시적 정지 상태입니다. 그는 범신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감각적 욕구를 내던질 수 있습니다. 범신의 세계의 생존 기간은 놀라울 정도로 긴 억겁의 기간입니다.
감각적 욕구는 불결함을 명상의 주제로 하는 혐오감 명상으로도 억제될 수 있습니다. 선정 명상을 수행하는 이는 비록 완전한 절멸은 아니지만 나쁜 의지를 일시 정지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의지의 완전한 절멸은 아나가미 과의 지혜에 의해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자비관의 명상에 몰두하는 이도 분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비관에 몰입해 있을 때 분노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를 분노하게 한 어떤 사람을 떠올릴지라도 머리카락이나 체모와 같은 몸의 32부분에 대해 관찰하면 그 사람을 향한 분노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택일적 방법도 있습니다. 윤회의 순혼 속에서 하나의 생명 기관은 작고 빠른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인생으로 전환될 때 사람은 친척이나 형제 누이 또는 어머니와 아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전의 관계를 추정해 봄으로서 전생에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 사람에 대해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쁜 의지를 던져 버리고 나쁜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가슴 깊이 살며 모든 생명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소중히 여기고, 나쁜 의지로부터 그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선정 명상을 수행함으로서 수마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불안감을 제거하고 그의 마음을 불안과 망설임으로부터 씻어냈기 때문에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는 또한 회의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선한 것에 대한 신념이 가득한 그는 의심으로부터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그 선정 수행에는 명상을 위해 규정된 4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 하나는 파리카마니미타라 불리는 흙의 둥근 원판입니다. 수행자가 눈을 감은 채 우카하-니키타라 불리는 이미지, 정신적 반사를 지각할 때까지 완전한 그리고 분리되지 않은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선정 명상을 파리카마 명상이라 부릅니다. 지금 계속해서 이 영상에 집중하는 동안 마치 파타바가-니미타라 불리는 맑고 빛나는 보름달과 같은 특정한 점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집중력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의 반복적인 관찰에 의해서 우파카라 사마디(근접 삼매)가 성취됩니다. 여전히 흙의 둥근 원판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면 마침내 모든 감각 활동이 일시 정지하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거기에는 봄도, 들음도, 더 이상의 느낌이나 육체적 인상에 대한 지각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침내 선정의 정취에 이르는 정신적 몰입, 열중의 상태, 즉 아파나 삼매(安止定)라 불리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와 같은 선정의 획득으로 마침내 범신의 세계에 이를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취의 예는 많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범신의 세계에서 온 천상의 존재, 로히타사가 부처님께 존경을 표하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생로병사가 없는 우주의 끝까지 걸어서 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로히타사 범신이여, 거기에 걸어서 여행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며 도달할 수 없느니라.”
범신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답변은 놀랍도록 옳습니다. 저는 우주의 끝까지 걸어서 닿을 수 없다는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질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제 자신의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저는 로히타사란 이름을 가진 사냥꾼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포기한 채 운둔자가 되었습니다. 운둔자로서 저는 숲 가운데서 고귀한 운둔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선정을 얻은 뒤에 저는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고 그 능력에 의해서 즉시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여행 속도는 화살이 팜나무의 그늘을 통과하는 그 짧은 순간에 우주를 한 바퀴 여행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저는 또한 걸음이 너무 커서 한 걸음이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우주의 끝까지 여행하고자 하는 매우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을 향한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휴식과 화장실 가는 것도 제쳐두고 제 의도대로 모든 능력을 이용하여 100년 동안 여행했지만, 100년 후 오카사 로카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저는 저의 목적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범신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지난 저의 경험을 통해서 우주의 끝까지 걸어서 도착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히타사 범신은 사냥꾼의 아들이었으나 운둔자로 수행했습니다. 선정 명상 수행 덕분에 그는 공중을 떠다니고 장애 없이 땅을 통과하는 등과 같은 마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이는 죽어서 범신의 세계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선정 수행에 의해서 사람은 더 나은 길로 이름 붙여진 선호할 수 있는 3번째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범신의 세계란 넓은 의미로 순수한 물질의 세계와 비물질의 세계를 위한 이름입니다. 범신은 그 자신의 몸에 빛나는 반사가 있어 다른 인위적 빛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범신은 인간 또는 천신처럼 음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환희가 선정의 몰입에 의해 얻어지고 그것만이 그들의 안락한 생활 방식입니다. 범신의 눈은 숭배하는 부처님을 보기 위함이지 영화나 오락과 같은 눈의 의식, 즉 안식(眼識)의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범신의 귀는 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 즉 법을 듣기 위함이지 노래와 같은 것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범신의 혀나 코도 맛이나 냄새를 위한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신은 좋은 냄새도 좋은 음식도 좋은 촉감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범신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는 않지만 완전한 희열의 집중력을 통해 획득된 4색 계정의 지복을 만끽합니다.
그와 같은 순수하며 걱정 없고 고귀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은 범신의 세계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인 선정 명상을 수행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선정 명상 수행하는 이들은 범신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은 여기에서 위빠사나란 최선 최고의 명상에 참여하고 있으며 반드시 선정 명상을 통해서 고귀한 범신의 세계를 획득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수행자들이 선호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서 가까운 미래에 모든 고통의 종식,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1 선호할 수 있는 4가지 길-4부
오늘 법문의 주세는 최선의 길로 선호할 수 있는 4번째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위빠사나 명상에 의한 열반의 실현입니다. 열반은 모든 불자들의 가장 소중하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모든 불자들은 열반을 열망합니다.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위와 같이 종국적인 염원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열반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불자가 삼보에 경의를 표할 때 그들이 염원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그들이 부모나 원로들에게 존경을 표하거나 계율을 준수하는 것도 다 열반을 획득하기 위함입니다. 왜 모든 불자들은 열반을 열망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가장 고귀한 그리고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열반에는 아무 것도 없고 감각적 쾌락이나 감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의심할지 모릅니다. 비틀을 씹는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 잎이 없는 곳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흡연에 중독된 이들은 흡연이 금지된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감각 기관에 접촉해서 생기는 쾌락이라 불립니다.
다른 종류의 쾌락은 감각 대상과 접촉되지 않은 산티수카입니다. 그것은 평화롭고 고요함의 의식, 즉 완전한, 열정이 없는 행복합니다. 어떤 감각적 쾌락의 경우도 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시각을 즐기기 위해서는 영화나 비디오 테잎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고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비록 비용을 충당할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시청해야 할 육체적 수고가 있게 되고 눈이 피로하게 되거나 또는 시각이 손상되거나 염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좋은 맛도 같습니다. 어떤 이가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을 모아다 식사를 준비하고 요리해야만 합니다. 맛있는 것을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도 스스로 같은 것을 모으려 할 지 모르기 때문에 같은 재료를 얻기 위해 경쟁과 위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얻은 뒤에는 먹음, 씹음, 삼킴 등과 같이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음식이 사람에게 맞지 않으면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적, 재정적, 정신적 노력과 위험도 따릅니다. 성공적인 맛있는 식사 후에도 배설의 곤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미각적 대상의 감각적 쾌락은 순수한 행복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혼합된 것입니다.
대조해서 산티수카(평화와 행복)은 일종의 감각적 쾌락에 의해 물들지 않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몸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평화와 휴식의 편안한 느낌, 완전한 행복, 모든 고통의 소멸로 정의됩니다.
그것에 대한 유사한 예를 찾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에 대한 개념을 얻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죄로 인해 감옥에 있다고 합시다. 당연히 그는 매우 슬프고 육체적으로 혹사 당하고 삶의 조건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에게 할당된 구역은 매우 비좁고 해충과 모기와 악취로 가득 차고, 죄수로 머무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고민으로 고통 받습니다. 이 순간에 감옥형으로부터 풀려나고 감옥 생활과 관련된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의 사치를 얻지 않는다 해도, 자유롭게 풀려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행복이고 성취일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어떤 사람이 문둥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모습이 일그러지고 상처에서는 늘 진물이 나고 아무도 그와 사회적으로 관계맺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격리될 것입니다. 그는 그 병 때문에 통증으로부터 고통 받고 육제척으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아주 불행합니다. 그런데 그가 최신의 약을 주며 그 자신을 치료해 주는 친절한 의사를 만난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상상해 보건데 그것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지만 그 병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생기는 행복 못지 않은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열반의 지복은 물질적 취득과도 같은 감각적 쾌락과는 관계 없습니다. 이 법문의 시작에서 말한 것처럼, 열반은 평화와 평온의 지고한 의식이며,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 즉 완전한 열정 없는 완전한 행복입니다.
어떤 이는 열반을 웅장한 왕궁이나 유토피아의 매우 아름다운 수도처럼 묘사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열반을 빛나는 유리 왕궁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모든 종류의 사치스런 인간의 거주지와 인공적 창조물을 능가하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환경을 가진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와 같은 상상은 모두 환영입니다. 질문과 답변으로서 열반을 정의해 봅시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열반이 거대한 것인가? 또는 으리으리한 수도인가? 또는 그것은 빛나는 유리 집인가?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다음의 빨리 문장에 의한 몇 가지 정의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적절합니다.
1)열반이란 소통의 소멸로 설립된 평화입니다. 평화로운 차분함(coolness, 평온 또는 빨리어로 santi, 평화)은 열반의 한 특성입니다. 수행자가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관찰하는 동안 갑자기 모든 현상의 소멸을 성취하는데 그와 같은 소멸이 발생할 때 고통은 절멸됩니다.
2)평화로운 차분함(냉정함)이 성취되었을 때, 번뇌의 업, 업과의 영역에서의 고통의 연속은 고갈됩니다. 열반에서 볼 때 절멸을 의미하는 존재의 세계의 3가지가 완전한 분리를 맞습니다.
3)열반에서 고통의 연속, 평화로운 종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소멸이 열반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멸되는가?
1)번뇌의 연속이 소멸됩니다. 무명(4성제에 대한 무지), 갈애, 그리고 모든 집착, 이러한 3가지 번뇌의 연속이 고통의 연속을 일으킵니다.
2)Kamma의 연속은 끝없는 재생, 즉 윤회를 생겨나게 하는 공덕 있는 혹은 공덕 없는 행위를 포함한 영역입니다.
2)업과의 연속은 업과라 불리는 ‘행위의 결과의 영역’인데 선악이라는 행위의 결과에 관계됩니다. 모든 행위는 마음과 물질, 느낌으로 인해 그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높거나 낮은 존재의 재생을 야기합니다. 열반을 깨달음으로서 이 세가 가지 연속이 소멸합니다.
수행자들은 아마도 일상의 언어가 경전의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언어로 열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수행자들은 물어볼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질문이 전에 제기된 바 있습니다.
한때 밀란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학식 있는 나가세나 존자는 대답하기를 “오, 고귀한 왕이시여! 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늘 빠짐없이 관찰하는 수행자는 돌연히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사라지는 상태에 이릅니다. 오, 고귀한 왕이시여! 수행자가 올바른 수행에 의해서 모든 정신적 육체적 소멸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와 같은 단계를 이른바 ‘열반의 깨달음(실현)’이라 부릅니다.”
수행자가 기상 시부터 잠들 때까지 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 즉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걸음, 봄, 들음, 냄새 맡음, 먹음, 생각함, 그리고 앎 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 갑자기 아무 것도 알아차림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 알아차릴 대상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알아차리는 마음 그 자체도 없다는 것, 아무 것도 없음을 갑자기 발견합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경험, 현상의 소멸이 열반의 깨달음으로 불립니다.
수행자들이 열반을 깨닫는 순간에 무엇을 인식하는가? 그것의 특성 기능, 표명(현시)은 다음과 같습니다.
1)특성: 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
에 의한 평화로움의 특성에 의해서 열반의 실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수면도 죽음도 무의식도 아닙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격렬한 몸과 다리의 진동, 의식을 잃고 쓰러짐과 같은 징후를 열반의 실현으로 여기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2)기능: 고무됨은 매우 엄숙하고 차분한 특성을 갖습니다. 몸의 자세와 평형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현상의 소멸이 좌선시 일어나면 몸의 자세가 매우 곤두서고 차분하고 그리고 그것이 행선시 일어나면 숙임이나 좌우 흔들림 없이 적절하고 우아하며 차분한 평형에 머뭅니다.
3)표명(현시): 열반을 깨닫는 시간에 수행자들은 몸의 형태, 시각 또는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생성과 소멸이 모두 정지되고 평화롭게 됩니다. 모든 동작과 형태, 시각과 그림자가 모두 사라집니다. 이것들이 열반의 깨달음의 징후들입니다.
여기서 수행자들은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스님들이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스님들은 대념처(알아차림 설정) 위빠사나 명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이 성취될 때까지 왼걸음, 오른걸음, 일어남, 사라짐, 봄, 들음 등을 항상 알아차림 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도과를 이루고 열반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시절에 소레야라는 부자의 아들이 강가에 목욕하러 가는 길에 카짜야나 존자란 이름의 매우 잘생긴 스님을 보았습니다. 그 스님을 보는 순간에 그의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림 하는데 실패하고, 그 스님이 자기 부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스님은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소레야는 아라한을 모욕한 죄로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깨닫고서 그 아라한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서 용서를 빌며 사죄했고, 마침내 남성으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회개하게 되었고 스님에게 계를 받아 명상 수행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도과의 지혜를 얻을 때까지 행선에서의 발의 동작과 좌선에서의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봄, 들음, 생각함, 먹음, 닿음 등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위빠사나 명상에따라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 열반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모든 번뇌의 종식과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 해탈을 성취하고 열정이 없는 완전한 행복, 열반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길!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2 계의 청정
오늘 법문의 주제는 행위의 정화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3개의 청정함 가운데 첫 번째이자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도덕(행위)의 준수 없이는 높은 도과의 지혜를 거의 획득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sila란 계를 의미합니다. 재가 신도에게는 5계나 8계의 준수를 의미하고 비구에게는 파티모카를 의미합니다. 엄숙함에 관한 계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일반적 계
2)고귀한 계
3) 궁극적 바라밀 계
계를 준수함으로서 사람은 천신에 세계에 태어나거나 인간의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높은 지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위빠사나를 더불어 행하면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계를 꾸준히 그리고 영원히 준수할 때 생기는 5가지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1)현생에서 큰 부를 얻음 2)큰 명예와 명성을 얻음 3)공공 모임에서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음 4)침착함과 조용함으로 죽음에 직면할 수 있음 5)고귀한 천신 세계 또는 인간세계에서는 더 높은 지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 등입니다.
그리고 계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은 항상 향기로운 도덕입니다. 어떤 사람이 착용하는 장식은 한 때 어느 정소에 어울릴 뿐이지만 계는 어떤 나이에도 빛이 납니다. 빨리어로 계는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사람의 장식품입니다.
부처님 시절에 수바란 이름의 젊은이가 부처님께 ‘왜 어떤 이는 몸이 약하고 아프며, 어떤 이는 강하고 건강한지’를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수바여! 계를 준수하지 않고 악한 행위를 하는 습관이 배인 사람은 병들고 유약하게 되고 계를 꾸준히 지키는 이는 강하고 건강하다. 그러므로 계는 네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위한 기반이 되며 수행자의 장식품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달콤한 향이나 냄새는 바람이 가는 방향으로만 가지만 계는 언제나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미 삼기짜에 관련해서 도덕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시절에 30명의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명상 대상에 관한 말씀을 들은 후, 곧 마을을 향해 떠날 것을 준비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들이 명상 수행할 때의 어려움과 그것이 사리불과 함께 공부한 사미 삼기짜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들에게 떠나기 전에 형제 사리불에게 가서 경의를 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사리불을 찾아 경의를 표하자, 부처님의 뜻을 예견한 사리불은 수행원으로 사미 삼기짜를 동행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사미 삼기짜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는 겨우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삼기짜의 어머니는 그를 출산하려 할 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화장할 때 자궁을 제외한 몸 전체가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밤에 그 시체를 태운 경비원이 타지 않은 자궁을 대나무 깃대로 쑤신 후 자궁 안에 들어있는 아이의 눈구석을 약간 쳤습니다. 다음날 그 아이는 시체를 태운 불 위에 호기심을 끌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친척에게 보내져 양육되었습니다. 어린이의 미래에 대해 물어봤을 때 점쟁이는 만약 그가 양자로 들어가는 그의 7세대가 가난하게 되고, 만약 사미로서 출가해 계를 받으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유명한 이가 되리라 예언했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그는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재생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덕을 짓기 위해 승단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친척이 허락하자 그는 사미로서 계를 받기 위해 사리불에게 보내졌습니다. 머리를 깎는 동안 그는 위빠사나 명상을 했고 삭발이 끝났을 때 그는 단지 7살의 나이에 아라한과를 획득했습니다.
이제 법문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30명의 비구가 젊은 사미 삼기짜와 함께 마을 근처의 숲 속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명상하고 있는 동안 숲 속에 숨어 있던 500명의 도둑들이 자신들이 도둑질한 것이 성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착각에서 숲 속의 수호신에게 인간의 목에서 나는 피를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도둑들은 마을의 수도원으로 와서 비구 중 한 명이 희생양으로 바쳐져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예견하신 것처럼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명상하던 비구들이 그 요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 중 가장 원로한 이가 일어나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오, 젊은 형제들이여! 이 도둑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나머지 스님들은 계속해서 위빠사나 명상을 평화롭게 수행하여야만 합니다. 나는 도둑들을 따라갈 것입니다.”
다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이가 일어나 요청했습니다.
“아닙니다. 장로 형제여, 당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젊은이들이 지도자 없이 남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도둑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다시 세 번째로 나이 많은 비구가 일어나서 같은 방식으로 요청했습니다. 나이든 비구부터 나이 어린 비구까지 각기 자발적으로 도둑과 함께 가기를 요청했습니다. 마침내 사미 삼기짜가 일어섰습니다.
“오, 비구 스님들이여! 이것은 제가 책임져야할 일입니다. 나의 스승 사리불 노장께서 이 위험을 미리 예견하시고 여러분과 동행하라는 목적으로 저를 보냈습니다.”
삼기짜는 그렇게 말하고 도둑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비구 지도자는 도둑들에게 너무도 어린 사미가 칼을 보면서 공포에 떨지 않도록 요청했습니다. 도둑들은 그 사미를 숲 속으로 데려가서 그를 그늘진 나무 아래에 놓고 칼을 날카롭게 갈았습니다. 그들이 제물을 준비하는 동안 어린 사미는 나무 그늘 아래서 지고한 황홀경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도둑의 우두머리가 일종의 사마파티 집중에 그의 마음을 고정시킨 채 앉아 있는 사미 삼기짜에게 왔습니다. 우두머리가 그에게 칼을 휘두른 후 어린 사미의 목을 세게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칼로 돌을 내려친 것과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칼날이 휘었습니다. 그는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사미를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우두머리는 사미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오, 어린 사미여! 이 칼로 너를 자르리라.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너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너의 얼굴빛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너의 행동도 매우 차분하구나. 그래도 무섭지 않으냐?”
사미 삼기짜는 대답했습니다.
“오, 우두머리여! 우리와 같은 아라한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법이다. 이 몸, 즉 집합체는 하나의 커다란 짐이다. 매일 이 몸에 공양하는 것은 다름아닌 고통이다. 이 집합체인 몸을 벗어 던지는 날은 우리들에게 바로 가장 행복한 날이다. 우리와 같은 아라한은 공포도 불행도 없다.”
젊은 사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도둑의 우두머리는 그의 칼을 들어올린 후 말했습니다.
“오! 그는 아라한이다. 이 생명 없는 칼도 훌륭한 아라한을 알아보는데 마음을 갖고 있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잘못 되었다.”
도둑의 우두머리는 악행을 깨닫고나자 그의 칼을 떨어트리고 사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오, 사미여! 승단에 들어가서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적당한 계를 받도록 해 주십시오. 다시는 훔치거나 강도질하지 않겠습니다.”
500명의 모든 도둑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회개하고 사미가 될 수 있는 허락을 구했습니다. 젊은 사미 삼기짜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10계를 주었습니다.
사미 삼기짜는 노란 가사를 입은 500명의 새로운 제자들과 동행하여,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며 기다리던 30명의 비구들에게 돌아왔습니다. 비구들은 이 다행한 일에 대하여 매우 안도했습니다.
“오, 삼기짜! 너는 반드시 너의 스승에게 가서 뵈어야 한다. 사리불 노장이 너와 제자들을 보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러자 삼가짜와 그 제자들은 그의 스승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사리불은 그들을 맞이하여 부처님께 경의를 표했습니다. 고귀한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 삼기짜야, 얼마나 훌륭한가! 네가 참 많은 제자를 갖고 있구나!”
그러자 삼기짜는 모든 도둑들이 자신으로부터 계를 받고 승단의 사미가 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오, 사미들이여! 좋은 일이다. 옛날의 도둑들이여, 너희들은 덕행과 집중력 없이 여러 해 동안을 살아왔다.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 이제는 너희들의 덕행으로 가득 찼고 너희 스승도 마찬가지이다. 짧으나 도덕적 삶은 길고, 부도덕한 삶보다 더 낫구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필요함과 통찰의 수행을 계발하는
도덕적인 사람의 하루는
삶의 감각을 제어하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의 100년 간 삶보다 더 낫다.
수행자 여러분, 7가지 청정함의 토대인 계의 청정함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고, 7가지 청정 단계의 순서대로 도과의 지혜를 획득하며, 모든 고통의 종식, 열반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축원 드리면서 오늘의 법문을 끝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3 마음의 청정
오늘 설하는 법문은 7가지 청정함 가운데서 2번째인 마음의 청정입니다. 계를 청정히 한 수행자는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마음의 청정이란 빨리어로 씨타위수디(Citta Visuddhi)라 불립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는 방식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여러분에게 마음을 청정히 할 수 있는 위빠사나 까마타나(Vipassana Kammatthana)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는 사람에는 사마타 야니카와, 수다 위빠사나 야니카가 있습니다.
1)사마타 야니카(samatha yanika), 즉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선정 명상을 기초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며, 처음에 우빠짜라 삼매(근접정)와 아빠나 삼매(안지정)를 수행하고, 계속해서 선정 수행을 기본으로 해서 위빠사나(통찰, 관찰)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2)수다 위빠사나 야니카(suddha Vipassana yanika), 즉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선정 명상을 기초적으로 수행하지 않고 위빠사나를 직접적으로 수행한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수행하고 있는 방법이 이른바 수다 위빠사나 야니카라 불립니다.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을 반드시 관찰해야만 합니다. 수행자는 시작 초기부터 모든 대상들이 일어날 때 통찰의 순간, 집중하여 알아차림 하여야만 합니다. 관찰을 시작할 때 수행자의 마음은 방황합니다. 집중력이 약하면 마음을 조절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이 다른 대상으로 벗어나자마자 즉각적으로 정신 상태가 주시되고 관찰되어야 하며, 그러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방황하는 정신적 상태가 이러한 방식으로 여러 번 반복적으로 관찰될 때 방황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방황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싸타누빠사나(cittanupassana)입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 또한 법(다마, Dhamma)입니다.
이러한 관찰의 수준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마음은 항상 근접하게 그리고 고정적으로 모아집니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마음의 고정이 통찰의 순간적 집중입니다. 그것을 마음의 청정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고하시 사야도는 “다른 대상으로 방황하지 않는 관찰하는 마음과 관찰되어야 할 대상에 대한 집중만이 마음의 청정이라고 이름 붙여집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정화하려고 애씁니다.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얼굴을 씻고 양치질하고 화장실에 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몸을 정화하고 세척합니다. 낮에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질하고 화장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몸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같은 일을 다시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매일 하루에 세 번씩 몸을 정화합니다. 오직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마음을 정화합니다. 몸의 불결함 때문에 사람들은 4욕계의 어느 하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눈으로 물소, 암퇘지, 황소, 개, 오리, 닭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그들의 몸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불결함 때문에 더욱 타락합니다. 과거의 사악한 생각들, 말, 행위들의 결과로 이러한 동물들은 저급하고 고통스런 세계로 떨어집니다.
마음을 순화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의 서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여, 이것이 존재들을 정화하기 위한 하나이자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당산들 마음이 순화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꾸준한 알아차림(mindfulness)의 방법, 대념처(Satipatthana)를 계발시켜야 합니다.”
꾸준한 알아차림에는 4가지 수행 방법이 있습니다.
1)몸에 관한 알아차림(관찰)
2)느낌(감정)에 관한 알아차림
3)생각(망상)들에 관한 알아차림
4)법(마음의 대상)에 관한 알아차림
만약 모든 존재들이 파티파티 사나나(Patipatti Sasana 수행 실천의 가르침)에 포함된 가르침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들 모두는 분명히 마음의 청정함을 획득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알아차림 설정법을 수행하셔서 마음을 청정히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방법으로 파세카(Pacceka)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고귀한 제자들도 마음의 정화를 얻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마음이 정화를 원한다면 대념처를 발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불결하게 만드는 많은 번뇌가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은 번뇌입니다. 분노와 교만함 또한 번뇌입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꾸준한 알아차림을 수행 계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번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대념처를 발전시켜야만 합니다.당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대념처를 수행하고 계발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은 또한 야생 코끼리와 같습니다. 야생 코끼리는 숲 속에서만 즐겁고 건물이 있는 도시에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야생코끼리가 풀려나면 그들은 쓸모가 없고 인간들을 해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야생코끼리는 있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된 코끼리에 의해 유혹되어 우리에 갇힌 후 물과 음식 없이 그 속에 남겨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둥에 묶인 채 물과 음식을 조금씩 주면서 조련사에 의해 훈련받게 됩니다. 조련 후에 그들 야생 코끼리들은 잘 훈련된 코끼리가 되고 매우 유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감각들을 탐닉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마음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다른 훈련된 코끼리에 의해 유혹되어야만 합니다. 훈련된 코끼리는 신념과 열망을 의미합니다. 사다(신념)는 법을 수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욕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반드시 수행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그와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반드시 신념과 열망에 의해서 유혹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으로 집어넣어져야 합니다. 마음은 영화감상, 음악을 들음과 같은 세상의 대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격리는 야생 코끼리에게 물과 음식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불립니다. 이 마음은 명상의 대상이란 기둥에 묶여지고 길들여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멀리 방황하고 혼자서 움직인다.
생각들은 차례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비물질적이다.
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사악한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이 조절되지 않으면 그것은 가고 싶은 곳에 도달합니다. 앞의 게송은 삼가라키타 테라의 조카와 관련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그 조카의 이름은 바기네야였습니다. 그 또한 스님이었는데 그의 아저씨에 의해 지명되어 마을의 사찰 주지로 머물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어서 가사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천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가사를 위한 천들을 아저씨께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10월 이후, 그는 천을 가지고 아저씨께 가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앉아 있을 때 부채를 부치며 말했습니다.
“오, 존경하는 아저씨, 제가 가사를 위한 천을 공양해도 될까요? 당신의 자비로 기꺼이 저의 공양인 천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저씨는 자신은 충분하니 너 자신을 위해 쓰라고 말하면서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조카는 “오, 안됩니다. 당신께 올리기 위해 이것을 보관해 왔습니다.”라고 하며 재차 공양드리려고 했지만, 테라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젊은 비구는 상심해서 그의 아저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자기와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승단을 떠나 재가불자로서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방황하기 시작했고, 갖가지 생각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는 승단을 떠나 재가불자가 되면 부자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 비난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생계를 위해 천을 팔아서 한 마리의 암염소를 사면 그 암염소가 많은 새끼를 낳을 것이고 그중 몇 마리를 팔아서 결혼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염소를 돌본 후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요리를 할 것이고, 그 일이 너무 지루하니 배우자를 찾아야겠고 결혼을 한 후에는 아들을 낳으리라. 이렇게 그는 생각의 끝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의 아들은 큰아저씨를 닮을 것이다. 그리고 원추형의 덮개가 있는 음식 상자를 가져가서 아저씨께 아들을 보여줄 것이다. 작은 수레와 한 쌍의 황소를 사고, 아내에게 “오, 나와 함께 아저씨 스님께 가서 그를 위해 커피와 밥을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아내와 아이를 작을 수레에 싣고 수도원에 사는 아저씨를 방문할 것이다. 푸른 황소를 수레에 메고, 그 수레에 푸른 음식 상자를 싣고, 수레에 올라타서 수레의 황소 멍에의 고삐를 세게 당기며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아이를 내게 건네 주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겐 신경 쓰지 말고 수레만 잘 몰라고 말할 것이지만 그는 완고하게 아이를 잡아당길 것이다. 그때 아이가 수레바퀴 자국 위로 떨어질 것이고 바퀴가 아이를 밟고 지나갈 것이다. 그는 격분해서 몰이용 막대기로 그의 아내를 때리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삼가라키타는 테라에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는데 방심해서 부채로 테라의 머리를 내려치게 되었습니다. 젊은 비구의 생각을 안 테라는 “너는 너의 아내를 때릴 수 없어 늙은 비구를 때리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젊은 삼가라키타는 늙은 비구의 말에 매우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그 절의 젊은 비구들과 어린 사미들이 쫓아가서 마침내 그를 부처님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비록 멀리 헤메인다 해도 그 대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나쁜 의지와 무명, 열정의 짐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것을 쫓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조절해야만 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면 열정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비구는 마음을 관찰하고 위빠사나 명상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성욕이 일어나면 알아차림 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자마자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 분노’라고 알아차림 했습니다. 만약 행복하다면 ‘행복함, 행복함’이라고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게을러지면 ‘게으름, 게으름’이라고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 하는 것이 마음에 관한 관찰(씨타누파사나)입니다. 반복적으로 알아차림 함으로서 젊은 비구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정화한 후에 여러분은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마음의 더러움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비 때문에 흙이 진흙으로 바뀝니다. 만약 당신이 진흙으로 더렵혀진다면 물로 더러움을 씻어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탐욕과 분노도 마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당신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그것을 마음으로서 알아차림 하여야 합니다.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배가 떠나면 당신은 다른 배로 그것을 쫓아가야만 합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면 남은 돈으로 잃은 돈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방황한다면 마음을 알아차림 하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림 할 수 있으면 마음은 순결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방황하지 않을 것이고 차분하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다른 대상으로 방황하지 않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과 관찰되는 대상에 대한 집중이 마음의 청정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대상을 관찰해서 계의 청정함과 마음의 청정함과 같은 7가지 청정의 단계 속에서 열반을 깨닫기를 가장 진지한 축복으로 표명하면서 결론지으려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4 견해의 청정
오늘 전달하고자 하는 법무는 7개의 청정함 중 3번째인 견해의 청정에 관한 것입니다. 비행 계단을 발을 디딘 큰 뜻을 품은 수행자는 그의 계를 정화해야 합니다. 계라고 하는 땅 위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고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마음은 더 이상 헤매지 않고 그의 주의력이 알아차림의 대상에 자리 잡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청정은 알아차림 할 때의 순간적인 집중을 통해서 획득됩니다. 알아차림이 이곳저곳 방황하는 마음 없이 편해질 때,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는 통찰의 지혜가 모든 알아차림 행위와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과 물질이 구분될 수 있다면, 지각될 수 있을 정도로 인성에 대한 믿음이 제거됩니다. 이 단계가 견해의 청정입니다.
우리들의 견해에는 62가지의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그중 가정 고통스런 잘못된 견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영원성에 대한 믿음
2)절멸에 대한 믿음
3)인성에 대한 믿음
1)영원성에 대한 믿음은 지속적인 자아의 실재, 영혼 또는 인성, 삶을 구성하고 사후에도 계속하는 육체적 정신적 과정으로부터 독립된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몸만이 죽는다고 믿습니다. 이생에서 현재의 몸이 해체된 이후 현생으로부터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근에 좋은 사람의 영혼을 초대해 그들의 공덕을 그 영혼과 나눕니다. 사실 독립된 영혼이란 초대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현존하는 마음과 물질이 현생을 위해 멈춥니다. 남아 있는 것은 그의 공덕과 불 공덕, 의지, 무지, 갈애의 원인입니다. 그 원인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새로운 마음과 물질이 새로운 생명에서 일어납니다. 사후에 어떤 이는 귀신의 영역에서 다시 귀신으로 태어납니다. 그와 같은 영역으로부터 그들은 ‘잘했음(사두)’이라고 말함으로서 다른 이의 공덕을 기쁘게 할 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영혼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재로 그것은 오는 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부터 ‘잘했음’이라고 말합니다.
2)영원성의 믿음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절멸에 대한 믿음은 사후에 마음과 물질의 절멸을 주장합니다. 이런 절멸의 믿음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은 사후에 사멸합니다.그래서 사람은 그가 좋아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윤회하는 삶이 없는 것처럼 사후에 좋고 나쁜 결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멸의 믿음은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 또한 잘못된 견해입니다.
3)인성의 믿음(사카디티)은 수행자들이 철저히 인식해야 할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성의 믿음을 제거하지 않는 한 당신의 명상의 진보를 방해할 것입니다. 인성의 믿음은 마음과 물질, 또는 정신성과 물질성을 개인적 자아 또는 나로서 잘못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성은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에 의해 포기된 후 그는 마음과 물질을 구별하는 통찰의 지헤를 획득합니다. 그러므로 고 마하시 사야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아차림 하는 동안 오직 마음과 물질만이 있다는 믿음이 견해의 청정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를 걸어 걷는 동작을 알아차림 하는 동안 수행자는 걷는 것은 물질로서 그리고 알아차림 하는 것은 마음으로 구분합니다. 그는 듦, 나아감, 놓음이라고 알아차림 하면서 걸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림 하는 동안 그는 분명히 듦, 나아감, 놓음이 물질(몸)이고 알아차림은 마음임을 지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 또는 아는 것이 견해의 청정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과 물질(몸)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할 때 그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의식(알아차림)과 독립된, 즉 물질로서의 일어남과 사라짐, 마음으로서의 운동의 알아차림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눈과 시각의 대상을 물질과 마음으로서의 봄과 알아차림으로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냄새 맡고 맛보고 닿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생각함을 알아차림 하는 동안 마음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통증과 아픔을 알아차림 할 때 통증과 그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대상을 알거나 알아차리거나 지각하고 알아차림 하는 동안 그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서 정신적 계발을 통해 수행자에 의해 획득된 통찰의 지혜가 정신적 계발에 근거한 통찰의 지혜입니다.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음으로서 얻어지는 지식은 배움에 근거한 지식입니다. 또한 그 자신의 사고로 다른 이에게서 배우지 않고 획득한 지식은 사유에 기초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명상을 통한 정신 계발에 기초한 지혜를 획득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획득한다면 그는 알아차림 하는 동안 분명히 믿음과 물질의 본성을 경험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1)알아차림 되어야 할 물질적 대상 2) 알아차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할 때마다 마음과 물질만이 일어나고 개인적 자아나 ‘나’ 또는 남자, 여자란 없습니다. 처음에 수행자는 사물들을 있는 그 자체로 보기 위해서 견해의 청정을 계발합니다. 한 점에 모인 집중된 마음으로 그는 이른바 존재를 분석하고 조사합니다. 이런 분석과 조사는 그가 ‘나’라는 인성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과 물질의 복잡한 합성물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가 단지 마음과 물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견해는 분명해지고 올바르게 됩니다. 이른바 존재의 참 본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획득함으로서 그는 영원한 영혼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의 견해는 완전히 정화됩니다.
이제 나는 ‘인성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더 상세히 설명코자 합니다. 빨리어로 사캬는 볼 수 있는 지각할 수 있는 물질과 마음의 집합체이고, 디터는 잘못된 해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마음의 견해 또는 개체적 자아로서의 물질과 마음의 집합체 또는 중생은 이른바 인성의 믿음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이라 부르지 않고, 이 남자, 이 여자. 이 스님 , 이 동물 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존재들을 개체적 자아라 부릅니다. 이것들은 실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의문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머리카락이나 머리가 인간으로 불릴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뼈가 인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이른바 사람이란 것을 찾아본다면 인간이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적용 심리학(아비달마)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이름(pannatti)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 인간, 존재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이름입니다. 실재하고 존재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이란 본성입니다. 누군가 물을지도 모릅니다. 머리카락은 물질인가, 마음인가? 그것은 물질입니다. 몸의 살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그것은 물질입니다. 몸의 뼈들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그것들은 물질입니다. 복부의 기관들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그것은 또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그것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실재하고 존재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시는 마음과 물질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법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법의 두 가지 영역, 즉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영역(빠라마타)과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인 영역(빠나띠)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세계에는 오직 4개의 실재적이며 절대적인 실재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10마음 2)정신적 요소 또는 마음의 부수 현상 30물질 4)열반, 고통과 퇴락이 없는 지고한 행복의 상태. 나머지는 모두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이고 단지 이름뿐인 환상이나 착각을 통해서 실재라고 믿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인 것을 다루는 것도 바람직한 일인데, 왜냐하면 부처님에 따르면 어떤 것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인가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또한 아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렇지 않다면, 비실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부분하는데 혼란스럽고 환상을 쫓도록 잘못 인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사물(살아있건 살아있지 않건)의 본성을 세밀히 조사하여 입증하며 그것들이 실재한지 또는 실체적인지를 스스로 발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에를 들면 이른바 남자, 여자, 짐승은 단지 이름뿐이며 그 안에 어떤 실체도 갖고 있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조사할 대 유일하게 실재적이며 실체적인 마음과 물질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관념들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이른바 남자, 여자, 짐승 들은 비실재적이고 상대적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인 이름의 영역에서 우리는 인간이나 스님, 남자, 여자 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마음과 물질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점심을 먹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쌀, 커리, 수저, 포크가 물질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만약 이 물질을 저 물질로 들어올리기 위해서 이 물질을 이용해라 라고 말한다면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비실재적이며 상대적인 이름의 세계에서 실재적이며 절대적인 영역의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실재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나’, ‘그 남자’, ‘여자’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마음과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것은 보는 순간에 보는 눈(감각기관)과 모습을 인지하는 정신적 기능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처음의 두 개는 물질이고 정신적 기능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순간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이과 물질과 마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또는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실재적이며 실존적인 물질과 마음을 나의 몸, 나의 집합체와 나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거의 모든 속인들은 이런 인성적 믿음, 즉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그들이 물질과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견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5개의 집합체(오온, 색수상행식)를 ‘나’, ‘나의 물질’ 등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반드시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물질과 마음을 구분할 때까지 관찰하거나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해야 합니다. 걷는 동안 왼발 오른발 들음 나아감 놓음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앉아 있는 동안,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뻗음과 구부림 등과 같이 다리와 손을 움직일 때 포함된 모든 동작들을 알아차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아차림 하는 동안 이런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짝으로서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뚜렷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림 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형태는 물질이고, 알아차림 또는 알아차리는 성질은 마음입니다. 앉음을 알아차림 할 때 앉아 있는 형태는 물질이고 알아차림의 성질은 마음입니다. 보는 경우에 눈과 모습은 물질이고 알아차림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명상을 알아차림 할 대 마음의 대상과 그것의 알아차림은 마음입니다. 또한 통증과 그것의 알아차림도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관찰하는 동안 마음과 물질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 이르면 마음과 몸의 집합체를 살아있는 개별자로서, 나, 나의 몸, 나의 소유물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으로서 여러분은 바로 견해의 청정을 획득합니다.
이런 견해에 의해서 인성의 믿음이 거의 제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수행자가 꾸준히 알아차림 해서 고귀한 수다원이 되면 그는 인성의 믿음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수다원의 단계를 이루는 누구나 인성의 믿음이란 짐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4욕계로 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타 경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성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가슴이 창에 찔렸거나 머리에 불이 난 사람이 응급한 상황에서 즉각적인 구제를 청하는 것처럼 윤회의 위험을 알아차린 비구는 인성의 믿음으로부터 서둘러 자유로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속인들이나 재가 불자들은 해야 할 많은 의무가 있고 다른 것보다 자신의 임무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성의 믿음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수다원의 지혜를 획득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4욕계의 세계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인간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여러분은 위빠사나 명상을 함으로서 인성에 대한 믿음을 제거하고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견해를 청정히 하기 위해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을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조심스럽게 관찰하도록 노력해서 인성의 믿음을 제거할 수 있는 도의 지혜에 의해 고통의 종식 열반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며 나의 법문을 마치려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5 의심을 초월하는 청정
오늘 전달하고자 하는 법문은 의심을 초월하는 청정 또는 의심의 극복에 관한 것입니다. 시간의 세 가지 구분, 존재의 부활 등에 관심을 갖는 많은 의심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심들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통찰의 지혜라 불리는 명상에서의 올바른 견해에 의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청정의 길에 다라서 그것은 작은 수다원 도와 훌륭한 재생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명상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의심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의심을 초월하는 청정에 관한 법문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속인이나 보통 사람들은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8가지 종류의 의심이 있습니다.
1)부처님은 과거에도 존재하셨을까?
2)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이 실재인가 또는 아닌가?
3)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하는 고귀한 비구는 있는가?
4)계정혜의 훈련은 진실인가, 아닌가?
5)과거의 존재, 전생이 있는가?
6)미래의 존재, 내생이 있는가?
7)과거와 미래의 존재가 모두 있는가?
8)부처님에 의해 전해진 연기는 사실인가, 아니면 단지 생각일 뿐인가?
이 8개와 다른 16가지 의심도 있습니다.
1)나는 과거에 존재했는가?
2)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
3)나는 과거에 무엇이었는가?
4)그렇다면 나는 과거에 어떻게 존재했는가?
5)나는 과거에 어떤 형태에서 어떤 형태로 바뀌었는가?
6)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인가?
7)나는 미래에 존재 하지 않을 것인가?
8)나는 미래에 무엇일까?
9)나는 미래에 어떻게 될까?
10)나는 미래에서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변할까?
11)나는 실재하는가?
12)나는 실재하지 않는가?
13)나는 무엇일까?
14)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15)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16)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러한 의심들은 존재에 부활에 관심을 갖게 될 때, 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왜 현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는 존재란 운명 예정설, 결정론에 따라 또는 현재하는 대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그 부모 때문에 존재가 발생한다고 믿지만 우리는 어떤 부모는 자녀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는 사후에 영혼이 다른 육체로 옮겨간다고 믿습니다. 아주 많은 의심들이 존재의 부활에 관련해서 발생합니다. 이런 모든 의심들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통찰의 지혜에 의해 제거될 수 있고, 명상을 통해서 의심을 초월하는 청정 또는 의심의 극복을 곧 획득할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1)의존적 발생 또는 의존적 기원
2)행위의 기원
3)일시적 기원
1)의존적 기원에 있어서 4성제에 대한 무명(무지)이 삶의 순환에 대한 첫 번째 원인입니다. 4성제는 모든 올바른 이해를 갖습니다. 4성제에 대한 무명으로 인한 삶의 순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무명으로부터 행위가 발생합니다. 행위로부터 의식이 발생합니다. 의식으로부터 유기적 존재가 발생합니다. 유기적 존재 6가지 감각기관이 생겨나고 6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으로부터 감각이 생겨나고 감각으로부터 욕망이 일어나고 욕망으로부터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으로부터 지속적 존재가 일어나고 지속적 존재로부터 탄생이 일어나고 탄생으로부터 죽음 늙음 슬픔 비탄 아픔 절망이 발생합니다. 이 모두가 원인과 결과의 순환입니다.
2)행위의 기원에 있어 행위와 그 결과란 순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람직하고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들은 그에 상응하는 좋고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때 수바란 이름의 어떤 젊은이가 부처님께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왜 인간은 높고 낮게, 건강하고 병약하게, 잘 생기고 추하게, 권력 있고 없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지적이고, 단명하고 장수하는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간략히 응답하시기를 모든 중생은 자신의 유산이며 원인, 동족, 은신처로서의 행위(업)를 가지고 있습니다. 행위 즉 업이란 모든 중생을 높고 낮은 단계로 분류합니다. 만약 어떤 이가 어떤 중생[-원인]을 살해했다면 그는 단명할 것이고[-결과] 살생을 금하면[-원인] 장수하고[-결과],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중생을 해치거나 고문하지 않는다면 원기 왕성할 것이고 해치고 고문하면 병약해질 것입니다.
어떤 이가 분노와 증오로 가득차면 추한 외모를 갖게 되고, 인내와 만족, 차분하면 좋은 외모, 존경스럽고 겸손한 이에게 존경을 표하면 권위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권력이 없고, 관용적이고 도움을 주면 부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난해질 것이고, 현명한 이와 관계하지 않으면 무지할 것이고, 현명한 이와 관계하면 유식해지니, 이 모든 것들은 행위의 기원에 있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3)이제 우리 수행자들이 알아야 하는 일시적인 기원이라 불리는 실재적인 명상에 있어 원인과 결과입니다. 일시적 기원이란 행선에서 알아차림 할 때 걸으려는 욕구와 실제 걸음,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림 하는데 걸으려는 욕구나 의도가 먼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걸으려는 욕구 속에서 걸음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걸으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걸음은 결과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걸음은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발을 들어 올리고 내밀고 놓음을 알아차림 할 때 들어 올리는 의도는 원인 그것을 아는 것은 결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발의 동작을 관찰함으로서 유사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몸의 행동에 있어서 서 있음을 알아차림 하면 서 있으려는 의도가 원인이고 서 있음은 결과입니다. 앉아 있는 동안 앉으려는 욕구는 원인이고 앉음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하는 동안 원인과 결과가 전환됨을 알게 됩니다. 배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할 때 숨을 들이쉬려는 욕구 의도는 원인이고 들이쉼은 결과입니다. 다시 배의 일어남은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또한 내쉼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외에 6가지 감각기관의 감각을 알아차림 해야만 합니다. 봄, 들음, 냄새, 맛봄, 닿음, 생각함을 언급한 현상을 알아차림 할 때도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귀로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원인과 결과인가? 소리(들음)의 의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귀, 소리의 대상, 소리가 귀로 전해지는 매체 또는 공간, 들으려는 의도 등 이러한 4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결합해서 원인이 되고 듣는 소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들음의 경우에서의 원인과 결과를 봅니다. 그러므로 들음은 원인이고 들음의 알아차림은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봄의 의식의 발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눈, 시각의 대상, 빛, 보려는 의도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4가지 요소들이 함께 묶여져서 원인이 되고 ‘봄’은 결과입니다. 또한 봄은 원인이고 봄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빛이 없으면 보려는 과정이 발생할 수 없고 인지의 과정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냄새의 의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코, 냄새의 대상, 들숨의 공기, 냄새 맡으려는 의도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4가지 요소들이 함께 결합해서 원인이 되며 냄새 맡음은 결과입니다. 그 냄새 맡음이 원인이 되어 냄새맡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향기가 코에 접촉 될 수 없어 결과적으로 냄새 맡음의 기능과 비근의 의식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맛의 의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혀, 맛의 대상(매운 맛, 신 맛, 짠 맛, 단 맛, 쓴 맛), 혀의 축축함, 맛보려는 의도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4가지 결합된 요소들이 원인이고 맛봄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다시 맛봄이 원인이 되어 알아차림 하는 결과가 있습니다. 혀가 말라 있으면 혀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촉감의 의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좋은 몸, 촉감의 대상, 대상의 질(거침 또는 좋음), 닿으려고 하는 의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4가지 요소들이 결합해서 원인이 되며 닿음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닿음은 원인이 되고 닿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촉각의 대상이 너무 좋으면 몸에 인상을 미칠 수 없고 촉감의 의식이나 촉식이 이러날 수 없습니다. 흉터, 손가락, 발톱, 머리카락에는 피나 공기가 흐를 수 없기 때문에 감각적 인상을 미칠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현상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언급된 의심을 제거되고 극복되고 초월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존재의 부활의 원인을 확실히 깨달을 것입니다.
존재의 부활의 원인은 무엇일까? 재생의 조건이 되는 무지와 갈애에 뿌리 박혀 있는 행위[업]입니다. 과거의 업이 현생의 조건이 됩니다. 과거의 업과 결합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조건이 됩니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는 행위의 모체로부터 태어났으며 부모는 미세한 세포를 제공했을 뿐입니다. 연기설에서는 존재가 존재에 선행하는 것처럼 행위가 계속됨으로 삶이 생긴다라고 이야기됩니다.
수행자는 그가 감각을 느끼는 대상들과 현상들을 매순간 알아차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하는데 실패했고 부분적으로 무명이 모든 이해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무명이 집착을 초래하고 집착은 갈애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고 싶은 것 없이 그가 지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명, 갈애, 집착이 행위[업]의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이에 의해 행해진 공덕 있는 행해들은 결과를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번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속인들은 그들을 재탄생시킨 번뇌 때문에 행위를 지속합니다. 행위에 들어 있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낳는 잠재성입니다. 새로운 삶은 자동적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선한 것, 악한 것 모두에게 있습니다.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현생의 행위는 결과로서 내생의 새로운 존재를 낳습니다.
경전에서는 새로운 존재에 관해서 메아리, 화염, 도장인, 거울의 반사 등이 예로 인용되었습니다. 메아리는 소리의 파장이 벽에 충격을 가했을 때 생기는 소리의 반사입니다. 우리가 원래 소리와 그것의 메아리 사이의 인과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할지라고 그것이 원래 소리를 먼 곳으로 전송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원래 소리는 원인이고 메아리는 결과입니다. 새로운 램프의 불꽃은 새 것이 여전히 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이전 램프의 불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이전의 불꽃은 원인이고 새 불꽃은 결과입니다. 거울을 볼 때 얼굴이 반영되지만 그것을 얼굴 그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얼굴은 원인이고 반사는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도장이 얼굴처럼 문양을 남기지만 그것이 얼굴은 아니며 도장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습니다. 도장은 원인이며 문양은 결과입니다.
원인이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원인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한 행위 때문에 새로운 존재가 발생합니다. 과거의 행위가 현생을 결정합니다. 많은 선행을 했으면 6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선이 선을 낳습니다. 많은 악행을 했으면 4욕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악이 악을 낳습니다. 선과 악을 모두 행했다면 다음 존재에 몸의 일부분이 결손된 인간이 될 것입니다. 좋아함이 좋아함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행위에 따라 존재하게 됩니다. 행위라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의심은 제거되고 극복되고 초월됩니다.
수행자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게 될 때 알아차림 할 때마다 다음에 존재하게 될 원인이 있음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원인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들어오는 대답은 행위입니다. 행위가 원인이며 유기적 존재는 결과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는 의심을 초월하는 청정입니다. 8개와 16개의 의심이 이 지혜에 의해서 제거되고 극복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았을 때 이 지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통찰의 지혜로 불립니다.
이제 모든 수행자들이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통찰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애써서 7가지 청정의 일련의 순간적 단계를 통해 도과를 얻어 모든 고통의 종식, 열반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며 끝마칠까 합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6 세 가지 종류의 길
오늘 법문의 주세는 3가지 종류의 길입니다. 진정한 모든 불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며, 그 실현의 방법은 고귀한 도의 지혜를 통해서입니다.
도의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반드시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의미하는 뿌바바가도(Pubbabhaga Magga)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수행자는 반드시 물라 마가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물라 마가는 업과 그 결과에 대한 기본적인 정견, 다른 말로 하면, 도덕적 행위는 건전한 결과를, 부도덕한 행위는 불건전한 결과를 낳는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말씀하시기를 3가지 마가가 있는데 1)물라 마가(Mula Magga) 2)Qnqkgkrk 마가(Pubbabhaga Magga) 3)아리아 마가(Ariya Magga)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마가를 모두 그 자신의 체계로 흡수할 수 있다면 그는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물라 마가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물라는 뿌리 또는 주요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마가는 절멸로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단어의 합성인 물라 마가는 뿌리 되는 것을 절멸시킴으로서 극복하는 특성을 갖는 것을 암시합니다. 뿌리는 ‘법’ 또는 ‘열반’의 실현을 성취하기 위한 근본 요소입니다. 근본 요소란 업의 결과에 대한 신념을 말합니다. 어떤 이가 선업과 악업의 존재를 믿는다면 도덕적 행위는 건전한 결과를, 비도덕적인 행위는 불건전한 결과를 낳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빨리어로 이 교리는 까마사카타 삼마디티라 불리는데, 좋건 나쁘건 당신이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의 재산이 된다, 즉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까마사카타 삼마디티는 물라 마가라 할 수 있습니다. 도과의 지혜를 깨닫기 이한 기본 요소는 업과 업과의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전통적 불교도 중에는 업과 그 결과의 교리를 감히 믿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총명과 근면함을 갖추고 있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성공적으로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업가들은 총명하고 부지런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모두 부자가 될까요? 그들 모두가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부자가 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들 모두가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몇몇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세계 여러 국가를 살펴보면 어떤 나라는 부강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합니다. 모든 국가나 정부가 부강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기만 많은 나라가 여전히 가난합니다.
건강의 영역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건강해지려고 그들의 총명과 근면을 발휘하여 최대한 노력을 다합니다. 그 외에 정부도 의산 약품을 생산함으로서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애씁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모든 시민들이 건강하냐는 것입니다.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병원에는 아직도 아픈 시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민들은 그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명과 근면함만으로 부유해지고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문학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학자나 유식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정부는 학교를 열고 시민들이 교양 있고 지적이고 유식해지도록 여러 방식으로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고 원하는 모든 시민들이 유식한 학자가 되었는가요? 모든 시민들이 학자는 아닙니다. 이런 사태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차이점은 각각의 업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은 근본 요소입니다. 총명함과 근면은 두 번째 요소입니다. 업, 총명(지혜), 근면(노력)은 3개의 다리가 달린 걸상과 같은데 한쪽 다리가 부러지면 걸상은 똑바로 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업, 지혜, 정진의 한 요소라도 빠지면 목적하는 성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3가지 가운데 근본 요소는 업입니다.
업에 대한 신념이 있으면 가시 숲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가시 숲에 뛰어 든다면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업에 의존해서 호랑이가 살고 있는 숲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다른 속담도 있습니다. 숲으로 들어가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 것입니다. 이러한 속담들은 업, 지혜, 정진이 균등하게 조화를 이루며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배적인 요소는 업입니다.
경전에 수바란 젊은이가 부처님께 어떤 이는 장수하고 어떤 이는 단명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이를 살해한 자는 단명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자는 장수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차이는 선행과 악행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즐기고 어떤 이는 병으로 고통받습니다. 그것 또한 잔인함과 친절함의 결과입니다. 다른 이에게 잔인한 짓을 한 이는 건강하지 못하고 남에게 친절한 이는 건강한 삶을 누립니다. 어떤 이는 잘생겼고 어떤 이는 추합니다. 그 이유는 분노와 인내심 때문입니다. 분노 때문에 압도 당하는 이는 내생에서 추하게 태어나고, 인내심 있고 참을성 있는 이는 잘생긴 외모를 갖습니다. 어떤 이는 많은 협조자가 있는데 어떤 이는 외롭습니다. 다른 이의 번영과 풍요를 질투하는 이는 어렵습니다. 다른 이에게 동정적이고 번영을 즐거워하는 이는 많은 협력자를 부여받습니다. 어떤 이는 고귀하게 태어나고 어떤 이는 비천하게 태어납니다. 젊은 수바는 부처님께 그와 같은 일의 원인에 대해 물었습니다. 연장자나 스승, 부모를 존경하는 사람은 고귀하게 태어나고 그들에게 무례하고 복종적이지 않은 이는 비천하게 태어납니다. 수바는 어떤 이는 부자고 어떤 이는 가난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공양을 제공하고 관대한 이는 내생에 부유하고 그렇지 않은 이는 가난합니다. 어떤 이는 유식하고 어떤 이는 무식한데 그 이유는 자신의 지식을 다른 이와 공유하려 하고 동시에 자기가 모르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려 하는 이가 지혜의 완전함을 얻으며 학자가 됩니다. 이것들도 업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젊은 수바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도덕 행위가 선한 결과를 낳고 부도덕한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는다.”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물라 마가입니다.
물라 마가의 문자적 해석은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의심을 극복해서 뿌바바가 마가를 향해 여행하는 근본 요소를 말합니다.
뿌바바가 마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선행으로서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근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탐욕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어떤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욕계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그는 도의 지혜로 인도하는 대념처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그 해답임을 알게 됩니다.
악행을 제거하기 위해서 업과 그 결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뿌바바가 마가를 수행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아리야 마가(성스러운 길)에 선행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마가는 절멸에 의해서 극복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죽이는가? 그것은 아라마나누사야 번뇌를 죽이고 성스런 길을 향해 여행합니다. 아라마나누사야(Arammananusaya) 번뇌는 아라마나 대상에 잠재된 번뇌를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분명한 대상들이 6관을 통해 지각될 대마다 발생합니다.
뿌바바가 마가는 현재 우리 수행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명상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에 지시된 것처럼 그가 움직이면 반드시 동작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왼발, 오른발, 듦, 나아감, 놓음을 알아차림 할 때 그것이 뿌바바가 마가입니다. 두 번째 절은 멈출 때는 멈춤을 알아차림 하고, 세 번째 절은 앉을 때는 앉음, 닿음을 알아차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 절은 누워있을 때는 누움을 알아차림 하고 다섯 번째 절은 모든 몸의 동작은 그것들이 일어날 때 주의깊게 알아차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명상 수행을 통해서 수행자는 뿌바바가 마가를 따라갑니다. 각각의 알아차림은 로키 마강가스(lokimaggamgas, 평범하고 예비적인 도)를 가져다 줍니다.
예를 들어 행선할 때, 그는 왼걸음을 알아차림하고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합니다. 그는 왼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하고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합니다. 그는 왼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마음이 발의 움직임을 이름붙입니다. 이것이 삼마디티(Samma Ditthi, 정견)입니다.
수행자가 내가 발을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잘못된 지식입니다. 올바른 지식은 발이 움직이고 마음이 알아차리고 배가 움직이고 마음이 알아차리고 귀가 소리를 듣고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삼마디티, 즉 올바른 견해입니다. 알아차림 하는 마음에 관한 생각은 삼마 산카빠(samma sankappa, 정사)이고 각각의 걸음에 들어가는 노력이 삼마 와야마(samma vayama, 정정진)입니다. 각각의 걸음에 대한 알아차림은 삼마사티(samma sati, 올바른 알아차림)입니다. 일련의 계속되는 집중은 삼마 사마디(samma samadhi,올바른 집중)입니다.
이것들이 5가지 뿌바바가 마가입니다. 수행자가 계를 준수할 때 그는 삼마와짜(samma vaca, 정언), 삼마까만(samma kammanata, 정업), 사마아지와(samma ajiva, 정명)를 성취한 것이고 그것들이 3가지 실라마가(계도)입니다.
모두 합쳐 8개의 마가, 즉 8정도입니다. 모든 것을 알아차림 함으로서 수행자는 8정도를 성취하는데 그때 8정도법이 발전되어서 완전히 성숙해진 수행자는 성스런 길, 탈세간적 의식인 성스런 길을 획득합니다.
수행자가 성스런 길을 성취하였을 때 그는 틀림없이 열반을 실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된 불교도들이 소중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수행자들이 업과 그 결과의 존재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대념처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함으로서 모든 번뇌를 정화하는 고귀한 길을 성취하고 열반을 실현하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7 열반의 정의
오늘 법문의 정의는 열반에 관한 정의입니다. 열반은 모든 불교도들의 가장 소중하며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모든 불교도는 열반을 열망하고 그래서 여러 종류의 종교적 행위 속에서 궁극적 바람은 가장 짧고 가능한 시간 속에서 열반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불교도들이 삼보에 경의를 표할 때 그것이 바라는 것은 열반입니다. 그들이 부모나 장로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계를 준수할 때 그들의 궁극적 희망 역시 열반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불교도는 열반을 열망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열반이야말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선의 가장 고귀한 완전한 열정 없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열반에는 감각적 쾌락이나 다른 어떤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비틀에 중독된 사람은 비틀 잎이 없는 곳을 싫어합니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흡연이 금지된 곳을 싫어합니다. 연회를 관람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연회가 없는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각적 쾌락은 내적 기관, 눈과 시각 대상, 귀와 청각 대상, 코와 후각 대상, 혀와 맛의 대상, 몸과 촉각 대상, 의식과 마음의 대상의 접촉에 기인합니다. 이것들은 웨디이카수카(vedayika-sukha),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기인하여 생기는 쾌락입니다.
다른 종류의 쾌락은 산티수카(santi-sukha), 평화의 행복입니다. 그것은 평화와 평온의 지고한 의식, 완전한, 열정이 없는 행복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경우, 물질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좋은 시각을 즐기기 위해, 사람은 영화나 비디오 테잎을 찾아야 합니다.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비용이 마련된다고 해도 눈으로 관람해야 하는 육체적 수고가 있어야 하고 눈은 피로해지고 시각에 손상을 주는 염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좋은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먹을 것을 축척해서 훌륭한 식사를 위해 준비하고 요리해야 합니다. 맛있는 것은 구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도 스스로 같은 것을 모으려 할 지 모르기 때문에 같은 재료를 얻기 위한 경쟁과 위험도 따릅니다. 좋은 음식을 획득한 뒤에 먹음, 씹음, 삼킴의 과정이 있습니다. 음식이 어울리지 않으면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얻기 위해 육체적 재정적 정신적 노력과 위험이 따릅니다. 만족스런 식사 뒤에도 배설의 곤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각적 미각적 청각적 후각적 촉각적 대상의 감각적 쾌락은 순수한 행복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혼합된 것입니다.
이와 대조해서, 산티수카(평화의 행복)은 일종의 감각적 쾌락에 물들지 않는 행복입니다. 그것은 몸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평화와 휴식의 편안한 느낌, 완전한 행복, 모든 고통의 소멸로서 정의됩니다. 그것에 대한 좋은 예를 들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에 대한 개념을 얻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죄로 인해 감옥에 있다고 합시다. 당연히 그는 매우 슬프고 육체적으로 혹사 당하고 삶의 조건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에게 할당된 구역은 매우 비좁고 해충과 모기와 악취로 가득차고 그리고 죄수로 머무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고민으로 고통 받습니다. 이 순간에 감옥형으로부터 풀려나고 감옥 생활과 관련된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의 사치를 부여받지 않는다고 해도 자유롭게 풀려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큰 행복이고 성취를 느낄 것입니다.
다른 예는 어떤 사람이 문둥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모습이 일그러지고 상처는 늘 진물이 나고 아무도 그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늘 격리됩니다. 그는 그 병 때문에 통증으로부터 고통 받고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는 아주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가 최신의 의약품을 주며 그 자신을 치료해 주는 친절한 의사를 만난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할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지만 그 병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기대에 그의 행복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생기는 행복 못지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반의 지복 또한 물질적 취득과도 감각적 쾌락과도 관계없습니다. 이 법문의 시작에서 말한 것처럼 열반은 평화와 평온의 지고한 의식이며,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 해탈, 즉 완전한 열정없는 행복입니다.
어떤 이는 열반을 웅장한 왕궁이나 유토피아의 매우 아름다운 수도처럼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열반을 빛나는 유리왕궁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모든 종류의 사치스런 인간의 거주지와 인공적 창조물을 능가하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환경을 가진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와 같은 상상은 모두 환상입니다. 질문과 답변으로 열반을 정의해 보겠습니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열반이 거대한 곳인가? 열반이 으리으리한 수도인가? 그것이 빛나는 유리집인가?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빨리 문장에 의한 몇 가지 정의를 들어보겠습니다.
1)열반이란 고통의 소멸로 설립된 평화입니다. 평화로운 차분(coolness, 평온) 또는 빨리어로 santi(평화)는 열반의 한 특성입니다. 수행자가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관찰하는 동안 갑자기 모든 현상의 소멸을 성취하는데 그와 같은 소멸이 발생할 때 고통은 절멸됩니다.
2)평화로운 차분함(냉정함)이 성취되었을 때, 번뇌의 업, 업과의 영역에서의 고통의 연속은 고갈됩니다. 이제 열반에서 볼 때, 절멸을 의미하는 존재의 세계의 3가지가 완전히 분리(단절) 됩니다.
3)열반에서 고통의 연속(되풀이), 평화로운 종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소멸(cessation)이 열반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멸되는 것일까요?
우선 무명[4성제에 대한 무지], 갈애, 그리고 모든 집착의 소멸을 말합니다. 이러한 3가지 번뇌가 고통의 연속을 일으킵니다.
번뇌가 소멸되면, 번뇌의 연속(vatta)을 끝없이 재생시키는 공덕 있는 그리고 공덕 없는 행위 모두를 포함한 행위의 영역이 소멸됩니다. 그리고 업과의 연속, 즉 행위의 결과라 불리는 업과의 영역이 소멸합니다. 업과의 연속은 행위의 결과에 속하는 영역인데 그것은 선악이라는 행위의 결과와 관련있습니다. 모든 행위는 마음과 물질, 느낌에 그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높거나 낮은 존재의 재생을 야기합니다. 열반을 깨달음으로서 이 세가지 연속이 소멸합니다.
수행자들 중에는 일상의 언어가 가진 의미로 경전의 언어를 이해하려 할 때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열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질문이 이미 제기된 바 있습니다. 한 때 밀란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유식한 나가세나 존자가 대답하기를 “오, 고귀한 왕이시여! 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늘 빠짐없이 관찰하는 수행자는 돌연히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사라지는 상태에 이릅니다. 오, 고귀한 왕이시여! 수행자가 올바른 수행에 의해서 모든 정신적 육체적 소멸의 상태에 이르렀을Eo 그와 같은 단계를 이른바 열반의 깨달음이라 부릅니다.”
달리 말하면 수행자가 기상 시부터 잠들 때까지 그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 즉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걸음, 봄, 들음, 냄새 맡음, 먹음, 생각함, 그리고 앎 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 갑자기 아무 것도 알아차림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 알아차림 할 대상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 하는 그 마음 자체도 없다는 것, 아무것도 없음을 갑자기 발견합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경험, 현상의 소멸이 열반의 깨달음으로 불립니다.
수행자들이 열반을 깨닫는 순간에 무엇을 인식하는가? 그것은 특성, 기능, 현시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특성: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에 의한 평화로움의 특성에 의해서 열반의 실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수면도 죽음도 무의식도 아닙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격렬한 몸과 다리의 진동, 의식을 잃고 쓰러짐과 같은 징후를 열반의 실현으로 여기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2)기능:고무됨은 매우 엄숙하고 차분한 특성을 갖습니다. 몸의 자세의 평형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현상의 소멸이 좌선시 일어나면 몸의 자세가 매우 곤두서고 차분해집니다. 행선시 일어나면 숙임이나 좌우 흔들림 없이 적절하고 우아하고 차분한 평형에 머뭅니다.
3)현시:열반을 깨닫는 시간에 수행자들은 몸의 형태, 시각 또는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생성과 소멸이 모두 정지되고 평화롭게 됩니다. 모든 동작과 형태, 시각과 그림자가 모두 사라집니다.
이것들이 열반의 깨달음의 징후들입니다.
여기서 수행자들은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오, 스님들이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스님들은 대념처(알아차림 설정) 위빠사나 명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이 성취될 때까지 왼걸음, 오른걸음, 일어남, 사라짐, 봄, 들음 등을 항상 알아차림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도과를 이루고 열반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시절에 소레야라는 부자의 아들이 강가에 목욕하러 가는 길에 카짜야나 존자라는 이름의 매우 잘생긴 스님을 보았습니다. 그 스님을 보는 순간에 그의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림 하는데 실패하고 그는 스님이 자기 부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스님은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소레야는 아라한을 모욕한 죄로 여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죄를 깨닫고서 그 아라한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서 용서를 빌고 사죄했고 마침내 남성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회개하게 되었고 스님에게 계를 받고 명상 수행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도과의 지혜를 얻을 때까지 행선에서의 발의 동작과 조선에서의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봄, 들음, 생각함, 먹음, 닿음 등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에 따라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 즉 열반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열반의 실현이 마치 웅장한 왕궁에 들어가거나 또는 빛나는 유리 집으로 된 이상향의 수도 같거나 또는 사치스럽고 환희에 가득찬 곳이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정의의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열반은 평화와 평온함의 지고한 의식이며 완전한 열정이 사라진 행복이며 모든 조유의 고통과 속박으로부터 궁극적 해탈입니다. 탐욕과 증오, 착각(어리석음)도 종식됩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나가세나 존자에 의해 밀란다 왕에게 주어진 열반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 수행자들은 명상의 과정에서 부지런히 강도높게 노력을 다한다면 번뇌의 영역에서의 고통의 순환을 끊고, 행위의 습관을 제거하고, 업과의 순환을 제거함으로서 5온의 재발새을 방지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모든 종류의 고통과 번뇌로부터의 궁극적 해탈을 성취하고 완전한, 열정 없는 행복, 열반의 실현을 향유하시기를!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28 4개의 상서로운 바퀴들
Anguttaranika라는 점진적인 격언이 실린 4권의 책 속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여, 현생과 내생에서 지혜롭고 고귀함을 성취하기 위한 4가지 상서로운 바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유명하고 부유하고 높은 지위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4개의 상서로운 바퀴, 즉 축복이 부여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가 이러한 축복을 부여받는다면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명예와 높은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결함도 없는 4개의 상서로운 바퀴가 필요합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것은 좋은 엔진, 차체, 차대가 있어야 하지만 바퀴가 없다면 1인치도 갈 수 없습니다. 한 바퀴만 없더라도 적절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떤 곳으로든지 쉽게 갈 수 있는 좋은 조건의 차처럼, 4개의 상서로운 바퀴를 구비한 사람은 궁극적 열반을 획득할 때까지 현생에서뿐만 아니라 다시 태어날 어느 곳에서도 지혜롭게 되기를 열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4개의 상서로운 바퀴들인가?
1)알맞은 지역에서 사는 것
2)고귀하고 의법하게 사는 사람의 도움과 지도를 받는 것
3)고귀하며 학식 있는 사람의 입장을 유지할 것
4)과거에 공덕 있는 행위
첫 번째 바퀴는 알맞은 곳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움 없이 음식, 옷, 주거지, 교육, 건강과 같은 삶의 필수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런 삶을 이끌어 갑니다. 어떤 이들은 음식, 옷, 주택과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도 얻기 힘듭니다. 몇 몇 사람만이 깨끗한 옷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상황에서 고귀한 삶과 경제적 번영을 열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술, 과학 또는 기술의 영역에서 학식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육을 얻기 위한 좋은 시설들이 필요합니다. 좋은 건강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의사, 그리고 병원에 쉽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 보건, 경제적 번영, 통신을 위한 사회적 설비를 제공하는 곳이야말로 적당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가장 번영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완전한 만족을 갖고 살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바퀴의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현재 삶을 개량시키기 위해 일하기 위한 시설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정신적 계발을 위해 일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윤회를 통해서 내생의 조건을 개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생에 좋고 안락한 삶을 제공할 운송 수단이 되는 공양, 계, 명상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충분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융성했을 때만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선을 베풀만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고 수행자에게 도덕을 준수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덕망 있는 스승과 명상 수행의 방법을 설명할 수 있는 지도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맞은 지역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융성하고 삶의 기본적인 것이 용이한 장소를 말합니다. 그와 같은 장소에서 수행자는 편안한 숙박시설, 따뜻한 의복, 영양있는 음식, 전문 의료인 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본 시설이 완비되면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통한 고귀하고 학식 있는 사람의 지도 아래 공양, 계, 명상의 선행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귀하고 의법한 사람의 지도와 도움을 받는 것이 두 번째 상서로운 바퀴입니다.
어떤 이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고귀하고 정직한 부모를 갖고 순수한 가슴과 덕망 있는 스승과 품위 있는 친척을 가지며, 경건하고 종교적인 동료 등과 함께 산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사냥꾼 사이에 태어나는 사람은 사냥꾼이 될 것이고 어부들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어부가 될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도움이 되는 환경, 고귀한 부모, 덕망 있는 스승, 충실한 친척과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아난 존자가 한 때 부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이가 의존할 수 있는 도반과 스승을 갖고 있다면 성스러운 삶의 목적, 즉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어떤 이가 의존할 만한 스승과 도반을 얻었다면 성스런 삶의 목적은 완전히 이룩된 것이다.”
앙구리마라의 이야기 가운데 훌륭한 도반의 중요성에 대한 놀라운 예가 있습니다. 앙구리마라는 나쁜 스승의 영향 하에서 거의 천 명에 가까운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숫자를 기록하기 위해 그들의 집게 손가락을 수집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손가락 화관이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그는 천 명을 채울 마지막 손가락을 수집하려 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앙구리마라가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면 그는 흉악한 죄악 때문에 아위치(avici) 지옥에 다시 태어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만남으로서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고 대신 명상을 수행한 후 아라한을 획득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의존할 만하고 덕망 있는 스승이야말로 현세의 혹은 탈속의 이익을 얻도록 도와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의존할 만한 친구와 스승을 갖는 것은 4개의 상서로운 바퀴 가운데 두 번째 것입니다.
세 번째 바퀴는 고귀하고 학식 있는 사람의 위신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일반의 자연적 경향은 불건전한 행위, 언행과 생각을 향합니다. 그와 같은 악행을 금하는 것, 자기 억제가 궁극적으로 유일한 구제약입니다. 고귀한 부모나 스승이 올바른 태도를 낳도록 도와주지만 자기 억제를 결여한다면 그는 그들의 영향에서 멀어지며 불건전한 행위를 할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억제는 나쁜 생각, 언행과 행위를 피할 마지막 의지처입니다.
불굴의 노력으로 장대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거기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어떤 이가 부자나 유명한 사람 혹은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높은 지위를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것은 자기 억제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결함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자기 억제는 자신의 가족의 명성을 생각하면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나 조상, 친척 그리고 친구들의 좋은 이름을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조상들은 덕망 있고 정직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내가 악행을 범하면 가족의 명성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함으로서 그 자신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질책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어떤 해악을 범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비난하고 험담할 것이고 나의 명성이 훼손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여러 해의 주의 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명성이 손상되고 위신을 잃게 되는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귀하고 지각 있는 사고에 의해 좋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고 부도덕한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 결국 고귀하고 학식 있는 사람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세 번째 상서로운 바퀴입니다.
데와다타(Devadatta)는 부처님 시절부터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는 왕의 가족 출신이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비구로서 계를 받았지만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사악한 욕망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승단의 분열을 만들어 왕자 아자타사투에게 그의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을 살해하라고 탄원했고 심지어 부처님도 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런 악행 때문에 아위치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리불 존자와 모칼라나 존자는 원래 다른 종파의 추종자였지만 아타삼마판디(attasammapanidha, 자기 조절)의 원리를 수행했고, 고귀하고 학식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입지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아시지(Assaji, 부처님의 처음 다섯 제자 중 한 분) 존자로부터 법을 배운 후 그들은 수다원의 단계를 획득했습니다. 곧 그들은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아라한과를 얻고 부처님의 상수 제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4번째 상서로운 바퀴는 건전하고 공덕 있는 행위들을 축적해온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전생의 공덕 있는 행위 덕택에 현생에서 인간이 될 만큼 행운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풍부한 음식, 옷, 약, 주거지 등으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공양, 계, 명상을 수행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애에서 그와 같은 공덕의 반복적 수행에 의해 내생에서 같은 이익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생에서 공덕있는 행위들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다음 생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4욕계 중의 하나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4번째 바퀴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신념과 근면으로 공덕 있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보살은 비록 많은 공덕을 이미 축적해 왔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공덕 있는 행위를 항상 수행했습니다. 차카와티(우주의 군주)로서 다시 태어났을 때조차도 권력과 쾌락을 버리고 공덕을 더 축적하기 위해 운둔자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선행의 또 다른 선행으로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서 그 결과 윤회를 통해 좋은 존재를 갖게 되었습니다.
미얀바 속담이 있습니다. “위가 가득한 사람은 계를 준수할 수 있다.”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은 어떤 이가 충분히 먹지 못하면 도둑질을 하거나 다른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충족할 만큼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공양, 계, 명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국 열반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덕 있는 행위들은 일상 생활의 필수 조건입니다.
마하시 센터의 수행자들은 4가지 상서로운 바퀴를 모두 부여받았기 때문에 전생에 지은 공덕 있는 행위의 결과를 지금 향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1)알맞은 지역에 사는 것
2)고귀하고 의법한 사람의 지도와 도움을 받는 것
3)고귀하고 학식 있는 사람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
4)과거에 공덕 있는 행위를 한 것
이러한 4가지 상서로운 바퀴를 충족시킴으로서 여러분들이 모든 고통의 종식, 여러분의 소중한 목표인 열반을 가장 짧고 가능한 시간 안에 성취하기를 !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 이 법문은 존경하는 닥터 우 수난다에 의해 미얀마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음
편집후기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종교 서적과 선배들에게서 그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였지만 내용 없는 대답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있다.
지식, 서적 상의 지식, 종교 의식, 위빠사나 통찰 지혜, 깨달음 등 그들이 아직 모르는 지식에 대한 탐구가 지금 그들의 연구 대상이다.
위빠사나 명상 또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분야이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틸라 사야도께서는 마하시 명상 센터에서 가장 뛰어난 명상 지도자이시며 여러 해 동안 영국 유럽 스리랑카 한국 등지에서 위빠사나 수행과 가르침을 펴셨다.
사야도의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주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다른 나라들로부터 많은 외국 수행자들이 마하시 센터로 몰리게 되었고 그들에 대한 지도와 책임이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인 자틸라 사야도에게 주어졌다.
자틸라 사야도께서는 또한 여러 나라들로부터 안거 수행을 부탁 받았으며 어떤 때는 100명이 넘는 수행자를 지도하시기도 하였다.
자틸라 사야도께서는 양곤 마하시 센터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케나다 이태리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태국 대만 중국 네팔 말레이시아 일ㄹ본 스리랑카 등지에서 온 수행자들을 가르치셨다.
이 법문들은 마하시 센터에서 외국 수행자들을 위해 법회 시간에 설해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미얀마어를 모르는 외국 수행자들이 법문의 공덕을 입을 수 있다면 크게 기쁜 일일 것이다.
With Mitta
(Universal Unbounded Loving-Kindness To All)
Hla Kyaing, President, Buddha Sasana Nuggaha Organization.
Yangon, the 22th Dec:1998
위빠싸나 지혜 16단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 수행과 8정도의 수행을 통해, 계청정(도덕적 행위의 청정)과 심청정(집중-사마디)을 성취한 후
1. 정신적-물질적 현상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리쳇다 냐나)
: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들을 직관적으로 구별하게 됨. 견해의 청정을 성취하여 유신견(나, 나의 것, 자아 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무명망상)이 소멸됨
2. 인과법을 아는 지혜(빳짜야-빠릭가하 냐나)
: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지혜, 믿음의 청정을 성취하여 의심이 소멸됨, 작은 수다원이 됨
3. 비영속성을 분명히 이해하는 지혜(삼마사나 냐나)
: 모든 현상들의 비영속성(무상)을 직관적으로 꿰뚫어 보는 지혜
4.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우다야바야 냐나)
: 모든 현상들은 인연 따라 서로 의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변화 속에 있음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지혜. 바른 도리를 이해하는 청정을 성취함
5. 사라짐을 아는 지혜(방가 냐나)
: 일어난 현상들이 아주 빠르게 사라져서, 사라지는 것만 관찰하게 되는 지혜
6. 두려움을 아는 지혜(바야 냐나)
: 관찰되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짐을 관찰하여 진실로 두려움을 자각하는 지혜
7. 비참함을 아는 지혜(아디나와 냐나)
: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
8. 혐오의 지혜(닙비다 냐나)
: 혐오감을 자각하는 지혜
9. 해탈하기를 지향하는 지혜(문지두가미야따 냐나)
: 본질적 괴로움인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혜
10. 재관찰의 지혜(빠티상가 냐나)
: 무상,고, 무아를 더욱 분명하게 재관찰하는 지혜
11. 평정의 지혜(상카루빽카 냐나)
: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간택의 마음이 사라지는 평등심의 지혜
12 적응의 지혜(아눌로마 냐나)
: 해탈로 이끄는 꿰뚫어 보는 지혜. 마음작용들(상카라)에서 벗어남. 수행단계 이해의 청정을 성취함
13. 성숙의 지혜(고뜨라부 냐나)
: 관찰하는 마음과 대상이 소멸됨. 범부와 성인의 경계선이 되는 지혜
14. 도-지혜(막가 냐나)
: 마음이 닙바나를 취하는 지혜. 앎과 봄에 의한 청정을 성취
15. 과-지혜(팔라 냐나)
: 닙바나를 취하면서 닙바나에 머무는 지혜
16. 반조의 지혜(빳짜웨카나 냐나)
: 정신적 오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괴로움의 소멸인 닙바나의 성취를 회상할 수 있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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