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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관음성지 대성산 정취암

by 산드륵 200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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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월 13일 세번째 일기- 인연의 끝을 따라 간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대성산

 

 그 대성산 깊은 골

 백척간두 절벽을 취해 

 발을 딛고 있는 정취암

  

 길을 몰라

 무작정 옛길을 타기 시작했는데

 뒤따르던 인연들도 멋모르고 저 험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산사로 가는 길은

 처음 그 길을 낸 사람

 그 사람이 풀어낸 인연의 실타래를 붙들고 가는 것이 정도임을

 이곳에서도  다시한번 느낀다.

 

 산 아래 내려다 보이는

 사람의 마을은 언제나 고요하다.

 

 이곳 정취암은

 그가 품은 산의 향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신라 신문왕 6년(병술, 서기 686년)

동해에서 장육금신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 줄기는 금강산(金剛山)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大聖山)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바로 이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정취 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원통보전

 

 신라 헌강왕 2년(무인, 858년)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정취보살상을 봉안했는데

 고려 고종 41년(갑인, 1254년) 명주성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낙산사 정취보살은 야별초 10인과 사노인 걸승에 의해 땅속에 묻히면서 난을 피하게 된다.

 그 후 기림사 주지스님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이니 어부(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그후 어부에 모셔졌다.

 

 그러던 정취보살상이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려 공민왕 3년(갑오, 1354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이운하여 봉안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조선 효종 3년 임신 4월 26일(서기 1652년) 화마가 진동하여

 원통보전 (圓通寶殿)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전소하였으며

 이때 정취보살상도 함께 소실되어 창건 이래 가장 큰 비운을 맞았다.

 그러다가 당시 정취암에서 정진하던 봉성당 치헌선사()께서

 효종 4년(계사, 서기 1653년)에서 9년(무술, 서기 1658년) 사이에 화주를 구하고 사재를 내어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普薩坐像:정취관음보살상)은

 효종 5년(갑오, 1654년)에 소실된 정취보살상을 재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전한다.

 

 

원통보전의 정취관음보살 좌상

정취보살은 관음보살의 화현으로 해탈의 빠른 길을 일러주시는 분이다.

인연의 끝에서 만나는 그윽한 미소는

세상을 살면서 쉬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원통보전 뒤 석조 정취보살상

 

 보살의 길을 묻는 선재동자에게

 '다른 길로 가지 않는 무이행이 그것'이라고

 해탈의 길을 일갈하신  정취보살님

 

 물음이 튀어 나올 때

 스스로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음을  선재 역시 몰랐을리 없기에

 정취보살은 그에게 미소로 답하셨다.  

 

 

응진전

 

나한탱화가 모셔진 아름다운 곳

기도 중인 분이 있어 사진은 찍지 못하였다.

 

벼랑 끝에 붙어있는 삼성각과 산신당을 함께 모신 전각

 

 그 뒤 세심대에는 산신령을 모셨다.

 

 산신당의 산신도는 마치 민화처럼 정겨웁기까지 하다.

 

 

이곳은

고려 공민왕과 더불어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파들이 거점으로 

정취암에서 멀지 않은 진주시 문산의 청곡사는 신돈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곳이기도 하고

창건 이래 고승납자들의 요결처로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께서도 한때 주석하시며 정진하셨던 곳이다.

 

 

한때

의상대사는 이곳 정취사에서

원효대사는 바로 아래 율곡사에서 수행하고 계셨는데

그러던 어느날 일이 벌어졌다.

의상대사께서 매일 아침 공양 때마다

천녀들이 내려와 하늘의 공양을 바친다고 하자

보리죽으로 살아오던 원효대사께서도 그 공양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원효대사께서 찾은 그날은

 천녀들의 공양이 없었다.

 이에 의상대사께서

 다음날 공양을 바치러 내려온 천녀들에게

 왜 어제는 오지 않았는가 궁금해 하자

 천녀들이 답하기를

 원효대사를 지키고 있는 신장들의 위엄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의상과 원효 대사의 행적에 관한 평가가 스민 일화라고 생각되는데

이곳에 앉아 있으면

보리죽으로 살다가도

그것이 천녀의 공양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정취암은

 찾아갈 때보다 다녀온 후에 더욱 가슴에 남는 곳이다.

 

 

다시 한번 좌정하고 앉았어도

그날의 향기가 감도는 정취암

그곳의 정취보살님께 마음의 공양 두 손 모아 올린다.

 

 

<화염경 입법계품 정취보살>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이 ‘넓은 문으로 빨리 이르는 행(普門速疾行)’이다.

선남자여, 이 일은 알기 어렵다.

모든 세간의 하늘·사람·아수라·사문·바라문들은 알지 못한다.

오직 용맹하게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고 겁이 없는 보살들이라야 능히 듣고 능히 지니고 능히 알고 능히 할 수 있다.

 
선남자여, 나는 동방 묘장(妙藏)세계의 보승생(普勝生) 부처님 계신 데로부터 이 세계에 왔으며,

그 부처님 처소에서 이 법문을 얻었고,

거기서 떠난 지는 불가설 불가설 부처 세계의 티끌수 겁을 지냈다.
또한 낱낱 찰나마다 불가설 불가설 세계의 티끌 수 걸음을 걸었고,

낱낱 걸음마다 불가설 불가설 세계의 티끌수 부처의 세계를 지나왔는데,

낱낱 부처님 세계마다 내가 모두 들어가서

그 부처님께 아름다운 공양거리로 공양하였다.

그 공양거리는 모두 위없는 마음으로 이룬 것이며, 지음이 없는 법으로 된 것이다.


나는 또 저 세계의 모든 중생을 보고 그 마음을 다 알며 그 근성을 다 알고,

그들의 욕망과 이해를 따라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였다.

또한 광명을 놓기도 하고 재물을 보시하기도 하여 갖가지 방편으로 교화하고 조복시켜 조금도 쉬지 아니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보살의 넓은 문으로 빨리 이르는 행의 해탈을 얻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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