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순풍호텔을 나서서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찾았다.
10시 40분 도착.
12시 15분까지 둘러볼 수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는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부터 20대 장수왕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425년간의 세월을 1시간 남짓한 시간에 둘러봐야 한다.
고구려 28대왕 박람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박람관이다.
박람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동북공정을 위한 중국의 역사 왜곡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안내문 앞에서 말을 잊었다.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 민족 정권입니다'라는 표현에서
한민족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고구려 정권의 발생이 필연적이고 그의 소망도 필연적입니다.'라는 문구와
'기원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 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이 철저히 소멸했습니다.'라는 문구에서는
고구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치욕적이다.
장군총
무덤에서
'장군'이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장군총'이라 명명하게 되었는데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저 산 너머는 북한 땅.
장수왕 15년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이곳 국내성 터는 고구려의 별도(別都)가 되었다.
평양 천도 이후에도 집안은 독자적인 문화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지만
고구려의 멸망 이후 이 지역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가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우면서
임강 일대에 서경압록부를 설치함에 따라
집안은 서경압록부의 환주로 편제되었다.
국내성 터에서 약 7.5km 떨어진 통구평야의 동쪽 용산 자락에 자리한 장군총.
7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적석총이다.
마치 기계로 깎아놓은 듯한 장군총의 화강암들은
고구려의 석조기술과 건축술 및 과학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집안 현성 북쪽에는
고대 채석장이 있어서
당시의 활발했던 건축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구려를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장군총 근처의 적석총.
장군분 1호 배분(陪坟)이라 명명된다.
이 적석총은 장군총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장군총의 모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집안시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1만 2천기에 달하는 고구려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장군분 1호 배분(陪坟)
도시개발로 인해 많은 고구려 무덤들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천여기 정도가 남아있다고 하니
국내성의 위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군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규모로 보아 대단한 위세를 지녔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집안 너머는 평양 땅.
아직은 갈 수 없는 나라.
아쉬움을 달래며 버스에 올랐다.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차한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곳.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은
일직선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이 무덤들의 임자는 모두 추정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능을
이처럼 작게 조성할리는 없었을 것이라고도 하는데
아직까지 모든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집안시의 모습.
이곳에서 유리왕은 황조가를 읊었고
호태왕은 기마병들을 이끌고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왔다지.
그리고 장수왕은 저 산 너머 평양으로 진격.
광개토대왕릉비.
유리문을 달고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부왕의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높이가 6.39M, 무게가 37톤에 달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조성된 비석으로
4면의 글자 총수는 원래 1775자인데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는 141자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우선 고구려 건국 신화와 왕가의 내력, 호태왕의 행장, 그리고 비를 세운 목적을 서술하고
호태왕 정복 사업의 이유와 과정 그리고 결과를 열거하고 있다.
거란과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시켜 신라를 구했으며
동부여 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총 64성 1400촌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연호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열거되어 있다.
호태왕비의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현전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보다
731년이 빠른 당대의 사료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오회분 오호묘.
오회분 오호묘의 안내문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내부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새로 덧칠한 사신도를 볼 수 있었는데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고구려를 깊이 느끼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그야말로 산적해 있다고밖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고구려를 잃어버리고나서
우리 민족의 호연지기도 함께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그 답은 현장에서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