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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있길래

백두산

by 산드륵 201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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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단풍이 지고 있다.

가을비가 곱다.

 

 

백두산 가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우리는 서파 방면으로 올랐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2만여명까지만 입산이 가능하다.

가장 먼저 개발된 북파 방면에서는 3만명까지도 입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서파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흰눈이 덮힌 백두산이 점점 가까워진다.

 

 

셔틀버스로 정상 입구까지는 30여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덜컹거리는 셔틀버스에 몸을 맡기고

온 시선은 해발 2470m의 백두를 향해 고정한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1442개의 계단을 오르면 천지연.

 

 

청명한 날씨

 

 

지난밤에 눈이 많이 내려서

백두는 온통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북파에서 출발한 여행객들은 입산이 금지되었고

우리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던 다른 일행들도

제설작업이 끝나지 않아 입산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했다.

통하에서 자고 이곳으로 출발한 것이 오히려 천운이었다.

천지연.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하여

망천후(2,712m)·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16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중 6개의 봉우리는 북한, 7개는 중국, 나머지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고 한다.

백두산천지는

호수면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에 이른다.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된 후

융설수, 우수 등이 고여 생긴 칼데라 호로,

분화구의 전체면적 가운데 천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40.6%에 이른다.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대택, 대지, 달문지라고도 불려왔다.

북쪽의 달문으로는 화구벽이 터지면서 호수의 물이 흘러내려

비룡폭포로 떨어지고

송화강의 상류인 이도백하로 흘러간다.

 

 

구름이 밀려오고 구름이 밀려간다.

 

 

구름을 타고 내려온 99명의 선녀가 목욕을 하고 내려갔다는 전설이 실감난다.

 

 

수많은 일이

짧은 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났다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이곳.

 

 

천지 앞에서 천지를 닮아간다.

오래 묵어가고 싶은 이곳.

다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행복이겠지.

 

 

북적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들.

경계석의 오른쪽은 북한 땅이다.

경계석에는 조선이라고 쓰여있다.

이곳 어디에 백두산 정계비가 있었을까.

1931년 당시 일제의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이었던 소전치책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청나라 황제가

그 선조의 발상지를 자국 영토 내에 포함함과 아울러

조선과 국경을 명확히 하여 국경 분쟁을 막기 위하여

조선과 협의해서 백두산에 건립한 유명한 국경비이다.

그후 간도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조청양국과 청일양국 간에 28년에 걸쳐 국제분쟁의 원인이 된 중요한 사적이다.

또 오늘날에는 1909년 9월 4일 '청일간의 간도에 관한 협약'에 기인한 일만(日滿) 간의 국경비이다.

 

 

그런데 이 정계비는 1931년 7월 28일부터 다음날 29일의 아침 사이에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근래 백두산에 등산하는 자는 경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국경수비대와 동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때 역시 수비대 약 100여명과 함께 56명의 일반인 등산자가 있었다.

일행이 1031년 7월 28일 오전 9시 30분경 정계비가 서 있는 곳에서 휴식을 할 때에는

정계비가 아주 확실히 있었다.

일반인과 군대가 나뉘어져 산 정상에 올라가 천지 부근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산을 내려왔다.

 

 

이 내려오는 길에 두번째로 정계비에 도달했을 때에는

정계비가 이미 누군가의 손으로 철거되었다.

그 곁에는 단지 백두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일행 가운데 사적 연구가는 돌아오는 길에 비와 비문을 조사할 예정이었는데

결국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매우 실망하고 산을 내려왔다는 것을

당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나에게 알려줬다.

아, 이 어찌 몰상식한 행위가 아니냐.

이 중요한 사적을 없애버린 것은 국경을 모호하게 하려는 기도가 아니냐.

비석을 철거하고 그 대신 안내도를 세운 것을 보면

진실로 계획적인 행위이지 한 순간의 호기심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 행위는 일반 등산객이 한 것이 아닐 것이며, 그밖의 자들이 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30여년 동안 간도문제와 관련하여

이 정계비를 연구해 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놀랐고, 또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사적은 국가로서도 영구히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고

또한 현재 국경비로서 그 위치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나는 여러 차례 조선총독부에 그 조사를 요구했고

그것도 총독의 명령으로 빨리 착수하면 아주 큰 비석이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총독부는 어떠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1938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조사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있다.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지며

우리의 땅 간도도 사라졌다.

 

 

깊고 아주 푸른 천지 앞에서

흔들린다.

마음에는 바람이 없어도 물결이 인다.

 

 

천지를 머리에 이고 사는 줄 모르고

기어기어 여기까지 올라와서야

하늘을 본다.

하늘이 곧 천지의 호수다.

 

 

한쪽에서는 꿈을 안고 올라오고

한쪽에서는 천지를 두 눈에 담고 하산 중.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고 있다.

 

 

천지연의 깊고 푸른 고요가

아직도 두 눈에서 출렁이는데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달리니

장백산 대협곡.

주차장에는 가을이 가득 들어서 있다.

 

 

장백산 대협곡.

시계를 보니 14:10분이다.

 

 

백두산 용암이 흘려내려 형성된

V자 계곡.

 

 

금강대협곡이라고도 하는데

그저 넓고 깊다.

 

 

서파로 이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 금강대협곡에서 쉬어간다.

 

 

기암괴석과 얼마남지 않은 가을 속에서

천지연에서의 떨림을 가라앉힌다.

 

 

쉬어간다.

 

 

쉬어간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어젯밤 묵었던 순풍호텔로 이동.

버스를 타는 시간이 결코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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