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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장수 죽림정사

by 산드륵 2015.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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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31일 오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정사.

조선광복과 근세불교의 선각자 백용성 조사의 탄생성지.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전면에 나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뤘으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오계를 수계하고 만주로 보낸

민족의 큰스승.

일일불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선농 불교운동을 진작시키고

한글로 불경을 번역케 하여 불교의 대중화를 이뤄낸

근세불교의 선각자.

그 용성조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죽림정사.


 

용성조사의 큰 삶을 따라 장안산 죽림정사로 들어섰다.


 

연당.

피안교 아래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이를 것도 없이

면면히 이어지는 중생들의 삶.


 

그러기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한

불자들에게

역사의 전면에 자신을 던져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것은

하화중생의 또다른 길이 아닐 수 없다.


 

대웅보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다.

 


용성조사의 생가.

2005년 (사)독립운동가 백용성기념사업회에서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복원해 놓은 곳이다.

용성조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한송이 백련을 닮은

그의 삶.


 

한나절 둘러보는 것으로

어찌 그 삶을 다 따라가리오만

햇살 아래서 어른대는 것만으로도

큰스승의 그림자에 폭 안긴 듯하다.


 

1864년,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탄생하고

14세가 되던 해

밀양 덕밀암을 찾았다가

지난 밤 꿈에 본 부처님을 발견하고 그대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귀가하였다가

다시 16세가 되던 해

해인사 극락암에서 화월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신 용성조사.


 

48세가 되던 해에는

산사에서 걸망을 지고 나와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여

대중불교 운동과 함께 왜색불교 청산에 나섰다.

또한 독립운동을 결의한 이들이

용성스님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이후 대각사는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 된다.

 

 

1919년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찻잔 속을 맴도는 조그만 바람으로 그칠 수 있음을 간파한

용성조사는

제자 동헌스님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을 가장하여 일본순사에게 전화를 걸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고 있다고 알리게 해서

용성 큰스님은 현장에서 체포되셨고

결국 33인의 구금 소식은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3.1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조선사람이 조선 독립을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

 

전국적 독립운동의 큰불을 지피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고 투옥된 뒤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에게 일갈한 스님.

 

태화관에 몰래 숨어 서명이나 하고

뒷날을 기약하리다라고 말하며 돌아서려는 이들에게

한 방 크게 먹이셨다.

훗날 그들 33인 중에서는 민족을 저버린 자들이 속속 나오니

스님의 판단은 참으로 정확하셨다.


 

용성 큰스님.


 

조선 불교 중흥율 제6조.


 

그 용성 큰스님을 이끄신 원불.

14세 때 꿈에서 뵈었는데

밀양 덕밀암에서 만나게 되자

그 자리에서 출가해버렸다.



용성 큰스님의 수행길.

해인사 극락암에서 재출가하여

48세에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전국의 참선수행도량에서 정진하셨다.


 

용성교육관.


 


중앙에 괘불을 모시고

칠여래탱화와 삼처전심, 69조사, 칠대사탱화 등으로

벽면을 장식하였다.


 

69조사.


 

벽면의 왼쪽에 모셔진 칠여래탱화.

 


화려하게 장엄된 괘불.


 

용성 진종조사의 오도송.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용성 진종조사의 열반송.

 

모든 행이 항상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거기에 그냥 가기 아쉬워 덧붙이는

나의 망상송.

 

옛뜰을 한가로이 거닐도다.

바람 울타리 뚫고 이러저리 노닐어도

만법이 고요한 것은

모든 행이 항상함이 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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