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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佛家思議

양주 회암사

by 산드륵 2017.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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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를 지나 회암사에 이르렀다. 



고려시대 전국사찰 총본산이었고

억불정책 기조를 유지하던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창을 거듭하며 전국제일의 수행 도량으로 거듭났던 회암사가

결국은 조선 명종 때 보우대사와 함께

한 줌 재로 사라지고 난 후에

그 빈 터에 남은 유물들을 수습하여 모시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

바로 현재의 회암사이다.



회암사로 좀더 가까이 간다.

1565년 명종 20년에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고

회암사가 불태워졌고

이후

폐사지에 남아있던 탑과 부도와 석조물들이

다시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 순조 21년 1821년

회암사지를 묘택으로 쓰고자 했던 이응준이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선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파손한 것이다.



조사전



조사전의 아미타여래좌상.

1755년 3월

창평 용흥사 상선암에 봉안하기 위해

조각승들이 조성한 불상이었는데

인연은 오히려 이곳에 있었나보다. 



지공선사.

인도의 승려로서

나옹선사의 스승이며

회암사를 인도의 나란타사에 견줄만한 도량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지공선사의 설법을 모아놓은 『지공직지』가 전해진다.



나옹선사.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로 건너가 지공선사를 만났다.

스승과 함께 다시 회암사로 돌아온 나옹선사는

민중과 함께 홍건적의 난을 견뎌냈고

공민왕의 신임을 받는다.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민중의 삶 속에서 부처의 지혜를 구현하고자 했던

나옹선사의 행보는

이곳 회암사에서 그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4년간에 걸친 회암사의 중창 낙성 법회에는

신분과 귀천에 상관없이

수많은 인파들이 회암사로 몰려들었는데

도저히 그 인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에는 국가에서 회암산문을 강제로 닫고 통행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때

민중의 거대한 움직임에 놀란 공민왕은

나옹선사를 밀양의 영원사로 떠나도록 명령했고

나옹선사는 도중에 여주 신륵사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공민왕의 스승

이성계의 스승

나옹선사의 제자



그리고 다시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함허득통선사



조각나버린

그들의 시절을

모아놓은 회암사



관음전을 맴돈다.



천보산 자락의 삼성각을 지난다.



바람이 이끄는대로 산자락에 오른다.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탑.

그리고 그 뒤로

지공선사의 부도도 보인다.



무학대사 부도.

연꽃이 흩뿌려진 허공에

구름도 꽃인양 흐르고

그 사이로 용이 노닌다.



쌍사자 석등




석등을 밤낮 받치느라

엉덩이 근육이 실하다.



무학대사 비.

조선 태종 10년 변계량이

조선개국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의 행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원래의 비는

순조 21년 이응준에 의해 파괴되었고

현재의 비는

순조 28년 1828년 다시 조성한 것이다.



지공선사 부도비.

원래의 부도비는

고려 우왕 4년 1378년에 조성되었으나

이 역시 순조 21년 파괴되었고

다시 세워진 것이다.



지공대사 부도와 석등



그리고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

나옹선사의 경우에는

회암사에서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여주 신륵사에도 부도가 있다.



목은 이색이 기록한 나옹선사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들을 위하여 열반불사를 마친다.」


너희들을 위하여

그 말씀에

목이 메이고

불사를 마친다

그 말씀에

절로 두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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