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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제주 추사관

by 산드륵 2017.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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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를

모르는 사람 없지만

추사를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가 제주에 유배되어 9년여를 지내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는 강도순의 집.

제주 4.3 당시 불타버린 것을 복원해 놓았는데

굵은 가시 돋은 그 집 담장에

여전히 탱자가 성글다.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류되어

추사가 유배길에 오른 것은 1840년 9월.

화북진을 통해 제주에 들어온 것은 10월.

그 가을날

그 시간을

유배지인 대정읍 안성리 송계순의 집에 이르는 그 과정을

추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사람과 말이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숲도 있었네

이것은 육지의 단풍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아취가 있겠는가.



추사는

대정읍 송계순의 집과

강도순의 집

그리고 창천리 적거지에서

제주에서의 9년여를 보냈다.

현재의 추사관은

강도순의 집과 담장이 맞물려 있다.  



하늘이 개이자

저녁 햇살 두루 퍼지고

산에서 풀려나온 저녁 구름이 낮게 깔린다.

모래톱엔 기러기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내려앉았는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은 산에서 멀어지고

촌로는 어린 목동을 염려하여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서 기다린다.



여균사청(如筠斯淸)

빛푸른 대나무처럼 맑아라.



금석학에 종횡무진함이 이와 같으니

문학과 전각과 그림은 내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추사는 이 구절을 좋아했나.

추사는 말하였다.

일찍이 옹방강과 유용의 글씨를 보았는데 모두 이 구절이었다.

비록 삼십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신령한 빛이 눈에 감돈다.

감히 헛되게 모방하여 쫒아가려는 것만은 아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북학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당대의 석학 김정희.

54세에 쓴 옥산서원과 생애 마지막 작품인 판전.

55세에 제주에 유배와서 64년에 떠난 그 사람 글씨는

제주의 거친 땅에 썼다 지웠다 하는 연서같다.



작은 창가에 달이 밝으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현판 글씨를 탁본한 이 작품을 두고

졸(拙)하면서도 무심하니

괴(怪)의 멋이 있다고 한다.

정형을 벗어난 파격의 미가

기름지지 않고 멋스럽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의문당.

1846년 11월 대정향교에 써 준 현판.



풍사실.

마음이 넉넉한 선비의 방.



보정산방(寶丁山房).

전남 강진 다산초당 현판으로

이학래에게 써준 것이다.

옹방강은 소동파를 그리워하여 보소재(寶蘇齋)를 짓고

김정희는 옹방강을 그리워하여 보담재(寶覃齋)를 지었듯이

그대들은 정약용을 그렇게 보배로이 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윽하고 곧은 한떨기 꽃

알려지길 원치 않아 산속에 숨어 사네

나뭇꾼이 나무 하러 가는 길에라도 볼까 두려워

다시 높은 산 하나 그려 살짝 막았네.


청나라 문인 정섭의 난초시이다.

양주팔괴로 이름난 정섭의 시도 그렇지만

난을 닮은 추사의 글씨 또한 참으로 멋이 지극하다.



판전.

봉은사 판전각 현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 하여

경기도 과천에 사는 71세의 늙은이가 병 중에 쓰다라고 되어 있다.

추사 최후의 작품으로

이 작품을 쓴 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한철이 그리고

권돈인이 찬문을 쓴 김정희 초상.

실사구시학파의 거장이었던

추사 김정희와 제주와의 만남은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 대상이다.



세한도.

우선아, 보아라.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주었구나.

이는 세상에 흔히 있는 물건이 아니어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야하고

더구나 그것도 몇 해가 걸려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더욱이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와 같이 많은 고생을 하여 애써 구한 것을 권력자에게 주지 않고

바다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보내주니,

마치 세상 사람이 권력자를 따르듯 자네는 나를 따라주었네.

태사공이 말하기를 권력으로 마음을 같이하는 자는

권력이 사라지면 사귐이 멀어진다고 하였네.

자네 역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일 텐데

스스로 권력을 따르는 무리를 초연히 떠나서 권력을 좇아 들어가지 않으니

나를 권력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하길

날이 차가운 이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하였네.

송백은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아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일뿐.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자네는 이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이후라고 덜한 것이 없네.

세한 이전의 자네를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자네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갖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네.

아, 전한 무제 때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이에게도

찾아오는 사람이 세상의 흐름과 더불어 성쇠하였으며

하비의 방문 같은 것은 박절이 너무 심하였으니 슬픈 일이네.

완당 노인 쓰다.



제자 이상적은

스승의 이 그림을 가지고

중국의 연경으로 갔다.

그리고 청나라 명사 16인의 제(題)와 찬(贊)을 받아 돌아왔다.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추사관의 작품은

진품이 아니지만

추사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오로지 혼자만의 추측이지만,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그려진 건축물은

아마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시대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저 묘한 건물이 없었다면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

그 사이의 세한이

뼈속까지 사무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장무상망(長毋相望)


완당노인이

세한도에 새긴 말.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제자 이상적의 가슴을 찢어놓았을 이 말.

쯪쯪, 이 늙은이가 이때까지도 모르고 있었구나.

향 깊은 스스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