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여순항쟁 74주년 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10월 14일부터 11월 말까지 기획되어 있다.
여수 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재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면 '여수·순천 10.19 사건'이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서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 순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여수·순천 사건 당시 현재 순천대학교 운동장에서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진이다.
토벌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을 연행해 고문하고 학교 건물 뒷편에서 사살했다.
형제들끼리 서로 손가락총을 쏘게 한 여수 순천 10·19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1947년 이승만은 5.10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한민족의 분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는 5.10선거가 보이콧되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선거를 피할 요량으로 가족의 손을 잡고 한라의 기슭으로, 제주의 곶자왈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내려오지 못했다.
1948년 4.3 무장대의 봉기가 시작되면서 산으로 갔던 모두가 토벌대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산으로 몸을 피했던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총탄의 표적으로 삼을 수 없었던 토벌대장 김익열은
4월 28일 제주인민유격대 김달삼과 협상을 통해 모든 전투를 중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협상은 5월 1일 미군의 오라리방화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서 5월 5일 김익열은 해임되었다.
해임된 김익열은 그해 6월 여수에 머무르면서 제주에서의 기억을 글로 썼다. 그리고 8월에 신문에 기고했다.
1948년 8월 이후 여수에서는 이렇게 해서 제주도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학살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제주토벌을 거부했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동족상잔 결사반대
1.미군 즉시 철퇴
이때부터 이승만의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을 조장하여 공포정치로 민중을 제압하고 정권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 독립운동가의 시나리오이고 그 시나리오는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반복해서 이용되고 있다.
김용옥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승만은 그 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더 크게 말하면 그는 6.25전쟁의 최대의 수혜자였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할 길이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태극기부대가 준동하는 우익친미기독교국가가 될 길이 없었다."
반군에 의해 살해당한 국방경비대 전사자와 그의 가족들의 고통을 미국 고문관 랄프 블리스 중령이 위압적인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스스로는 피를 묻히지 않은채 형제들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고 죽게 하는 미국식 전법이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제주도민 학살에 반대해서 궐기한 14연대 군인들은 1948년 10월 19일 밤에 여수 시내로 이동한다.
제주인민유격대가 한라산에 의지하여 투쟁하듯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유격투쟁을 벌이려고 한 것이다. 14연대
군인들은 지리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를 타려 여수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교전이 시작된다.
당시 14연대 군인들에게는 제주도민을 학살하라고 최신무기였던 M-1이 공급된 상태였다.
무기에서 월등했던 14연대군인들은 경찰과의 첫교전에서 경찰을 물리치고 이동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당시 봉산지서 지서장을 역임했던 신영길은 그의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기록에서 봉산지서에 14명의 경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1명도 죽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군인은 동포를 향해 총을 쏘지 않는 것이다.
해방 이후 조선인민은 줄곧 경제개혁과 토지개혁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승만 민주공화국 정부는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이에 인민위원회에서는 10월 20일 인민대회를 통해 쌀을 배급하고 은행을 열어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다.
그 흐름 속에서 제주토벌반대군인들이 제주도민 학살을 반대하여 항쟁에 나선 것이고, 여수와 순천의 시민들이 동참하여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군대는 달랐다.
여수 밤바다 종포로 해군과 부산 제5연대가 들어와 여수를 포격하고 1차 전투를 벌인다.
순천지역으로도 반군 세력이 퍼지자 토벌 사령부는 10월 23일 순천을 점령하고 10월 24일 인구부 전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당시 송호성 토벌 사령부의 차량에 미국 AP통신의 램버트 기자가 타고 있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미군은 해군, 공군을 위시한 7개 연대를 총동원하여 여수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사진에 반군토벌전투사령관 송호성 준장(가운데)과 그 왼쪽으로 박정희가 보인다.
학살을 수도 없이 자행했던 이들의 시발점은 간도토벌대이다. 그들은 이때 여순 토벌에서 사살된 여수 순천 지역민들을 불에 태운다. 불에 태운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경험은 그대로 제주도로 이어져 쏘아죽이고, 태워죽이고, 산위에서 산아래로 쓸어내리듯 찾아 죽이는 작전이 시행된다.
그렇게 여순은 끝이 났다. 이승만은 11월 4일 여순사건 진압 후 담화를 발표했다.
이어서 11월 17일 제주도 전지역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여순에서의 학살 실습을 제주에 그대로 이행하였다.
"이행하지 않겠다.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 명령을 이행하지 않겠다."
오직 민족에 대한 충정으로 항쟁에 나섰으나 결국 폭사하고만 여수의 기억을 이제 제주도민들이 이어받았다.
탐라미협의 오석훈 화백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여순의 고통에 동참했다.
그 기획전이 11월 30일까지 열린다.
기억의 전승으로 그날을 확인하고 굳건히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우리는 피묻은 자유를 누린다.
오석훈 화백의 디지털 작품은 현장에서 만나보기를 추천하여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남겨진 기억의 흔적 - 양동규
누군가를 향했던 탄두, 누군가가 삶을 연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숟가락이 남아있는 기억의 흔적이다.
한라산에, 그리고 바다건너 지리산에는 전하지 못한 말을 간직한 기억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손가락 총과 하얀 고무신 - 정유진
1848년 여수 순천일대에 대한 진압군과 경찰은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모아놓고 협력자 색출에 나선다.
그 과정에 손가락 '총'에 지목당한 혐의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참수·사형당했다.
광란의 기억 - 여순 - 이명복
평화로운 천국 - 양미경
산곡(山谷)에서 - 강요배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 박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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