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교를 건넌다.
이곳은 고려 진정국사 천책이 머물렀던 곳.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고,
초의선사의 한 잔 차가 그 향으로 한나절을 가득 채웠던 곳.
현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흥사 최초의 사명은 대둔사 大芚寺였으나 근대초기에 대흥사大興寺로 사명을 바꾸었다.『죽미기竹迷記』에는 신라 진흥왕 5년 544년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어 이후에 자장스님과 도선대사 등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둔사지大芚寺誌』에는 백제 구이신왕 7년 426년 신라 정관존자가 이곳에 만일암을 창건하여 수행하였으며, 무령왕 8년 508년에 중건불사가 행해졌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현재는 『죽미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아도화상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제1대 종사 풍담 風潭 의심선사에서 초의 草衣 의순선사까지 13의 대종사. 그리고 만화 대사 에서 범해 梵海대사에 이르기까지 13의 대강사를 배출하였으니, 가히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붓다의 선禪은 숲을 이루고, 붓다의 교敎는 바다를 이루는, 붓다의 꽃이 가득한 도량이라 하겠다.
반야로 건너면 보리 .
대흥사 북원 北院 에서 대흥사 남원 南院 으로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
‘삼재불입지처 만년불훼지지 종통소귀의처三災不入之處 萬年不毁之地 宗統所歸之處’ 대륜산 대흥사.
서산대사가 이곳 대흥사를 ‘삼재가 미치지 못하며, 천만년 훼손되지 않을 곳이니, 종통이 귀의할만한 곳이라’ 하여 자신의 의발을 전하게 한 이후로 호남의 대흥사는 크게 사세를 떨치게 되었다.
대륜산대흥사 해탈문
해탈문은 해사海士 김성근의 글씨이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해탈
산으로 둘러싸인 대흥사 도량의 모습.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등과 함께 아름다운 산지 승원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대흥사 전각들은 사찰내의 금당천을 중심으로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크게 구분되고, 남원의 표충사, 대광명전 등은 별원別院으로 따로 구분되며 자유롭게 들어서 있다.
북원北院은 대웅보전,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선열당 등과 요사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원南院은 천불전,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종무소와 요사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원 오른쪽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사우로서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재, 명의재, 보련각, 성보박물관 등으로 구성된다. 표충사 뒤쪽은 대광명전이다.
침계루.
계곡을 베개삼아 누운 침계루 앞 금당천을 중심으로 북원北院구역이 된다.
북원구역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신라말에 조성된 응진전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광사의 대웅보전 편액, 추사 김정희의 백설당 무량수각, 해사 김성근의 백설당 편액 등도 찾아볼 수 있는 구역이다. 이중에서 이광사의 편액은 대웅보전 편액을 비롯하여, 침계루의 편액과 침계류 뒷편의 원종대가람 편액, 그리고 천불전 편액 등 4개나 걸려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건물이다.
목조삼세불을 모시고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하였다.
현판은 원교員嶠 이광사의 글씨이다. 제주도로 귀양가던 추사가 이 현판을 보고 조롱하며 떼어내게 하고 자신이 쓴 현판을 걸도록 했으나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갈 때는 다시 이광사의 현판을 달도록 했다고 한다.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이광사와 금석학의 대가 김정희의 한판 충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대웅보전 삼존불
삼존불 뒤로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축대 앞 괘불을 고정한 용두와 함께 대웅보전을 수호하기 위한 사자상으로 귀신형상을 하고 있다.
응진전.
석가여래삼존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16나한상을 모셨다.
응진전 삼층석탑.
신라 자장율사가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보물 제32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음33응신전 앞 무염지.
초의선사가 조성한 곳이다.
물들지 않는 본래면목이
인연따라 그림자를 짓는다.
햇살 따라 걷는다.
바람 따라 걷는다.
기약없이
가만가만 걷기에 좋은 곳.
초의가 사랑한 곳.
가허루.
남원南院의 출입문이다.
이 길을 지나면 천불전이 있다.
현판은 호남의 명필가 창암蒼巖 이삼만의 글씨이다. 조선후기 3대 명필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서울에 추사 김정희가 있고 평양에 눌인 조광진이 있다면 호남에 이삼만이 있다고 하였다.
천불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있는 모든 부처님을 상징하여 모시는 전각이다.
2013년 보물 1807호조 지정보호되고 있다. 이 천불전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목침을 사용해 지은 전각이라고 하는데 풍계대사의 『일본표해록』에는 천불전의 옥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초의 의순선사의 스승 원호玩虎대사가 조선 순조 13년 1813년 천불전을 중건하고나서 쌍봉사 풍계스님에게 경주 불석산으로 가서 천불을 조성해오라고 하였다. 풍계스님은 6년여에 걸쳐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천불을 조성했다. 그리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에서 3척의 배에 그 천불을 싣고 대흥사로 향하는데 그 중 한 척이 표류하여 일본 장기현에 닿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 배의 옥불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절을 세워 봉안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일제히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차마 그 불상들을 약탈하지는 못하고 그 대신 불상 밑바닥이나 어깨 등에 '日'자를 새기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영험이 뛰어나기로 알려진 천불전 옥불상들은 대흥사에 봉안된 뒤, 신도들에게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흥사에서는 4년마다 한번씩 그 옥불들의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고 한다.
천불전 좌우의 용화당
연리지.
오백년도 넘은 느티나무 앞에 서서
무슨 생각 하는가.
부처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중생을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내 밖에
산하대지가 있음을 보지도 않고
내 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인식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