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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가파도 풍경

by 산드륵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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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의 보리가 익었다.

 

 

4월의 청보리 가파도가 청순하다면, 보리가 익어가고 자리가 잡히는 5월의 가파도는 풍성하다. 예전에는 개역볶는 냄새가 정미소 부근에서 떠나지 않고, 집집마다 자리젓을 담그느라 늘 바쁘고도 풍성했던 5월이었지만 사실 요즘은 그렇지만도 않다고 한다. 이상 기온으로 바다의 미역이나 톳의 수확량은 예전만 못하고, 낮은 수온으로 자리돔이나 벵어돔은 아직 제철이 아닌 것 같다. 단지 대기업에 납품하는 가파도 보리만 납품 기일에 맞추어 익어갈 뿐인 것이다.

 

 

가파도의 여러 사정과는 상관없이 풍요로운 빛깔로 넘실대는 5월

 

 

가파도 보리밭 너머로 걸어올라 산방산까지 가파도의 5월을 따라 걷는다.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이곳 가파도는 모슬포 운진항에서 약 5.5km정도 떨어진 유인도. 현재 가파도로 들어오는 여객선은 운진항에서만 운행되고 있으나, 화순항 등에서 낚시배를 이용하여 들어올 수도 있다. 여객선은 매일 9시부터 4시까지 가파도로 들어오는데 관광객이 넘칠 때는 배편이 늘어나고 관광객이 줄어들면 배편도 줄어든다.

 

 

이곳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헌종 8년 1842년부터라고 하는데, 최초의 주민들은 가파도에 방목하고 있던 흑우를 지키기 위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영조 26년 1750년에 이곳 가파도에 흑우장을 설치하고 진상을 위한 흑우 50마리를 방목하기 시작하였는데, 왜적에 의해 흑우가 약탈당하는 일이 생기자 40여 가구를 이주시켜 방어에 나선 것이다. 이 섬은 당시에는 더우섬, 개파도 등으로 불리다가 가파도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1653년 가파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선박 스펠웰호의 선장 헨드릭 하멜은 '화란선 제주도 난파기', '조선국기' 등을 저술하여 서양에 조선을 알렸는데, 그때 가파도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전한다.

 

 

보리밭 너머 모슬봉.

 

 

모슬포 운진항에서 이곳까지 여객선의 운항 시간은 15분. 섬 한바퀴를 걷는데는 30여분.

 

 

섬을 다 돌아보는데 2시간여도 걸리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느리게 걷는다.

 

 

시詩가 필요한 풍경

 

 

이 고요하여 쓸쓸한 풍경은 명나라 진계유라는 사람을 닮았다.

 

 

고요하게 앉아보고 나니 평소의 내 마음이 들떠 있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켜보고 나니 평상시 나의 언어가 메말라 있었음을 알았네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나니 한가로이 시간을 흘려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걸고 나니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이고 나니 내가 크게 병들어 있었음을 알았네

마음을 기울이고 나니 평소에 내가 각박했었음을 알았네

靜坐 然後知 平日之氣浮

守黙 然後知 平日之言燥

省事 然後知 平日之費閒

閉戶 然後知 平日之交濫

寡慾 然後知 平日之病多

近情 然後知 平日之念刻

 

 

연후지然後知, 삶이란 연후지然後知. '그런 연후'에 알게 되는 것이 삶이라지만 가파도의 풍경은 즉문즉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감히 진계유의 노래를 가파도의 바람에 흘려보낸다.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평화롭다.

 

 

위안을 건네지 않아도 위로 받는다.

 

 

살다보면 길이 없기도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돌아서가는 길.

 

 

그 길에서 만나지는 풍경들.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안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다정한 마음으로 품는다. 아마도 문을 닫아건 진계유도 동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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