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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성산 일출봉

by 산드륵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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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순력을 기록한 탐라순력도 중의 성산관일.

성산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것.

그가 세도가였든지 아니면 가난한 수레꾼이었든지 간에 누구든 이곳에서 새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오정개 포구에서 다시 만난 성산.

 

 

오정개는 자연포구 이름으로 이 포구 일대의 자연마을도 오정개라 부른다. 성산리의 터진목, 수메밋, 우묵개, 통밧알, 오정개 등 자연마을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기도 하다. 오정개의 '오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성산리 중심에서 정오방향에 있다고 하여 오정이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가마우지의 '우지'에서 변형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오정개 바위언덕은 가마우지들이 날아와 앉는 옷덕이라 하는데 '큰옷덕'과 '작은옷덕'이 있다. 옛문헌에는 '암포巖浦'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래가 노는 밭 '곰돌랭이', 우뭇가사리가 많이 나는 '우뭇개', 혹은 우묵하게 파여서 '우묵개', 바닷일을 살펴주는 '용당', 용당의 머리에 해당하는 '용당머리', 용당의 아래는 '용당알', 휘어들어가 용의 꼬리같은 '용촐리'

 

 

 

우뭇개 동산.

 

 

학살의 땅 성산 우뭇개 동산. 제주 4.3 당시 군경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 인해 학살된 이곳 성산리 사람은 확인된 숫자만도 467명에 달한다. 특히 이곳 우뭇개 동산에서는 성산읍 오조리 주민들이 1949년 1월 2일 국군 2연대와 서북청년단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당시 이 마을 주민들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급하게 철수한 일본군들이 남겨두고 간 다이나마이트를 고기잡이용으로 사용했다. 이 다이나마이트는 이 마을에 주둔했던 국군 9연대가 허가한 것이다. 마을마다 인민유격대를 방어하려고 민보단을 꾸릴 때 방어용으로 사용하게끔 한 것으로 마을 초소에 보관해 두면서 고기잡이용으로도 사용했다. 그런데 9연대 이후에 들어온 2연대와 서북청년단은 이 다이나마이트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용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23명의 오조리 주민들을 성산초등학교 맞은 편 감자 창고에 감금했다가 우뭇개 동산에서 집단 학살했다.

 

 

길은 무심하다.

 

 

흐르는 것은 늘 무심하다.

 

 

성산의 등경돌. 등경(燈檠)은 호롱불.

 

 

전설에 의하면 이 등경돌은 설문대 할망이 바느질할 때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도 하고,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성산을 지키려고 토성을 쌓을 때 장군의 부인이 이 등경돌에 등불을 넣고 바느질을 하던 돌이라고도 한다.

 

 

고려 원종 12년 1271년 삼별초의 김통정이나 조선 선조 30년 1598년 제주목사 이경록이나 모두 이 성산에 토성을 쌓으려 했다. 그러나 김통정은 성산 북쪽에 토성을 쌓다가 물이 없어 더이상 성을 쌓을 수 없었고, 이경록은 이곳은 '하늘이 베푼 요새'라며 제주 삼읍의 군기와 창고를 성산으로 옮겨 토성을 쌓았다. 이경록은 그 이후에도 성산 외성을 쌓다가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그 이듬해 제주목사로 성윤문이 부임하여 성산진을 철수하고 수산진으로 복귀하면서 성산 외성은 결국 폐허가 되어 사라졌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이경록이 성산 토성을 쌓았는데 길이 2천척에 높이 9척이며 성안에는 수만명을 수용할만하다 하였다.

 

 

성산일출봉으로 오르는 길의 기암괴석들.

 

 

99개의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성산의 굼부리를 빙 둘렀다고 하나 확인해본 이는 없을 것이다.

 

 

성산항

 

 

오조리와 식산봉

 

 

터진목

 

 

성산의 정상. 성산반도의 수중화산체인 성산은 높이 182m이며, 그 정상의 굼부리는 넓이 129,774㎡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세계자연유산으로도 지정보호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산(城山) 현 동쪽 25리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뻗쳐 큰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 5리 가량 되는데 형세가 개미 허리 같다. 석벽이 깎은 듯이 병풍같이 둘러서 있는데 높이가 천여 길이나 된다. 돌을 파서 길을 만든 연후에야 오를 수 있다. 그 꼭대기는 평평하고 넓어서 2백여 보나 되는데, 잡초가 숲을 이루어 성 안에 사는 것 같으므로 이름지었다. 그 밑에는 땅이 넓기가 10리 가량이나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환박물』에는 "성 안쪽은 가마솥이나 오지병 모습으로 깊이가 가히 백여 길이며 평평하게 펼쳐져 있고 여유로운데, 감귤나무 수백 그루만 심어져 있다. 하늘이 만들어 놓은 돌성은 7~8리에 걸쳐 둘러져 있다. 사람 사는 마을이 수십 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눈 아래 시끄럽거나 더러운 땅의 모습이 없다. 세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선이 과연 있다면 결단코 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에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주목사 이경록 당시에는 이 성산에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니 답사를 꿈꿔봐도 될지 모르겠다.

 

 

하산 길에 다시 바라보는 터진목. 이곳은 밀물과 썰물에 의해 성산일출봉 마을 입구가 열리고 닫히던 자연 수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돌과 콘크리트로 고성리로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되며 막히게 되었다. 제주 4.3 당시에는 성산읍 관내 주민들이 많이 희생당한 희생터이기도 하다. 제주 4.3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성산초등학교를 본거지로 하여 주민들을 폭행, 고문, 약탈하면서 주정공장 창고에 구금하였다가 이곳 터진목으로 몰고와 총살하였다.

 

 

우뭇개 해안

 

 

저 멀리 우도

 

 

푸르러 더욱 시린 제주의 길.

 

 

"살다보니 살아졌다"는 이 고장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푸른 바다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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