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알뜨르를 찾았다. 알뜨르비행장 활주로에서 일본군 수조, 지하벙커를 지나 섯알오름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다크투어리즘'이라 소개되어 있고 '올레길 10코스'도 이어지고 있다. 이 고통의 길을 걷는 까닭은 다시는 그러한 학살의 시대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기 위함일텐데 안내문에는 '섯알오름'의 학살현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도 외면하려 드는 것인가.
이 알뜨르비행장 일대에는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지하벙커, 일제 동굴진지, 고사포진지,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 등의 일제 군사시설들이 보존되어 있다.
일제는 1931년 착공 이후 5년여 공사 끝에 알뜨르 비행장을 완성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같은해 8월 15일 난징에 대해 해양 폭격을 개시할 당시 일제 공격기가 오무라 항공기지에서 이륙하여 난징을 공격한 후에 알뜨르비행장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제주도 항공기지에는 오무라 해군항공부대가 주둔하였는데 그 위치는 모슬봉 앞 해군 9506부대 자리였다. 그러다가 1937년 11월에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그곳에 비행장을 마련하면서 오무라 부대는 상하이로 이동하였고, 알뜨르 비행장에는 오무라 해군항공대 소속 연습비행대와 진해경비부 소속 잠수함공격기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1944년 10월 상순부터 제주도는 일본 본토 작전부대의 후방기지 및 일본과 대륙간의 항공로 연접기지로 부각되었고 그에 따라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가 1945년 6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공사에는 하루 4500여명의 강제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예비검속섯알오름유적지.
섯알오름예비검속 사건은 1948년 발생한 4.3사건이 끝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이 당일 오후 2시 요시찰인 및 형무소 경비강화,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 6월 30일 구금자 처리 등의 내용을 전문으로 각 경찰국에 지시함에 따라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이란 미명하에 344명을 강제 구인하여 관리해오다가 전황이 위난에 처하자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CD급 252명을 대정읍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고 폭파시 형성된 물웅덩이에서 집단학살 후 암매장한 사건이다.
섯알오름.
섯알오름 4.3학살터는 일본군의 탄약고가 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1944년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하던 과정에서 이곳 섯알오름의 가운데를 파내어 탄약고를 마련했다. 그리고 섯알오름 정상부에는 고사포 진지 두 곳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에 의해 이 탄약고가 폭파되고 그때 오름이 함몰되면서 커다란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이곳에서 정부군에 의해 예비검속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예비검속섯알오름희생자추모비
이승만정부는 서울을 떠나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퇴각하였으며, 낙동강전선이 누란지세에 처하게 되자 최종 피난처를 제주도로 잠정 결정하였다.
모슬포 지서 관내(한림, 대정, 두모, 고산, 저지, 무릉, 안덕)에서는 1950년 6월과 7월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유지, 부녀자, 학생 등 344명을 구인하여 모슬포 고구마절간창고와 한림수협창고 및 무릉지서에 분산수용하였다가 사찰계장 채**의 자의적 판단으로 ABCD급으로 분류하여 살생부를 작성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252명중 61명이 1950년 7월 16일 정부군에 인계된 후 20명은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하고 나머지 41명은 행방불명되었으며, 8월 20일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에 세곳의 구금자를 순차에 따라 학살장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대정면 민간인 6명도 무단 강제 압송하였다.
당시 예비검속되어 구금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말만 듣고 트럭에 올랐던 양민들은 트럭이 섯알오름으로 향하자 죽음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고 신었던 고무신을 던지며 가족들에게 자신들이 끌려간 곳을 알리려 애썼다. 어떤이는 가족이 알아보라고 허리띠를 벗어 던지기도 했고 품에 안고 있던 이불을 허공에 날리기도 했다.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되었던 60여명은 폭파된 탄약고 남사면에서, 모슬포 고구마절간창고에 구금되었던 130여명은 물웅덩이에서 정부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후 시신은 암매장되었다.
그날은 1950년 8월 20일이었다.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었다.
국가진실화해위원회는 '이승만 대통령 피난 계획 및 제주도를 대한민국 정부의 마지막 보루로 삼으려는 이유'로 이곳에서 양민을 집단 학살한 것을 인정하고, 2007년 11월 13일 그 억울한 민간인들을 희생자로 결정하였다.
명예회복진혼비에는 그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안내문'에도 비탄의 그날이 기록되어 있다.
학살의 현장.
해병대모슬포부대에서 차출된 해병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들이 도착하자, 소대장이 총알을 나눠주었으며 중대장은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고 지시하였다. 대원들은 일렬종대로 기다리고 있다가 GMC트럭에서 내리는 양민들을 이곳 호 가장자리로 끌고 와서 한 명씩 세워놓고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해 시신을 호 안으로 밀어넣었다.
정부군의 만행은 당일 새벽 발각되었다. 길가에 버려진 고무신을 따라온 가득들은 물웅덩이에 가득한 희생자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신을 수습조차 할 수 없었다. 당국은 시신 수습을 무력저지 하였고 꺼내놓은 시신마저 다시 물구덩이에 집어넣게 하였다. 1956년 3월 30일에야 한림어업조합창고와 무릉지서에 예비검속되었다가 희생된 62구의 유해가 수습되어 만뱅디 공동장지에 안장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슬포지서 수감 희생자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6년 5월 18일 149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중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한 132구가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되었다.
희생당한 어버이 시신들이 엉겨 하나가 된 이곳에서 술잔을 올리는 손이 어찌 떨리지 않으랴. 그들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받아왔다.
모슬봉은 여전히 공군이 주둔하는가
일본군의 수조시설.
이곳은 지금까지 태평양 전쟁 말기 알뜨르 비행장에 설치된 관제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현장조사와 증언 등을 통해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던 수조 시설로 확인되었다.
안내문에도 여전히 관제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쯤 확인후 수정될 것인가.
한 계단 한 계단 걸어 하늘에 닿는다.
제주의 가을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고요한 그 길
제주다움
제주하늘다움
아픔의 땅에 묵묵히 새 씨앗을 뿌리는 제주사람다움
지하벙커
입구
비행대 지휘소 혹은 통신시설로 추측하고 있다.
출구. 지하벙커 위에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발라 견고히 한 다음에 흙을 덮어 위장하였다.
늘어선 격납고들
제로센이 드나들던 저 격납고가 이제 가끔은 토실토실한 제주감자 보관소가 되기도 한다. 이 땅에 그 감자가 열리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양민들의 눈물이 수로를 타고 흘렀다.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우리가 이 땅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풍경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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